經典/중론(中論)

중론 제1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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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제1권
  
  용수보살(龍樹菩薩) 지음
  요진삼장(姚秦三藏) 구마라집(鳩摩羅什)한역
  범지(梵志) 청목(靑目)주석
  박인성 번역
  
  
1.인과 연을 관찰하는 장[觀因緣品] 16偈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斷滅)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네.
  
  이 연기 능히 말씀해 주시어 모든 희론(戱論)을 잘 소멸해 주시니
  모든 설법자 가운데 으뜸이신 부처님께 나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
  
  [문] 무엇 때문에 이 논서를 짓는가?
  [답]어떤 이는 모든 사물들이 대자재천(大自在天)1)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위뉴천(韋紐天)2)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화합(和合)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시간[時]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
  
  
1) 범어 maheśvara의 한역으로 마혜수라(摩醯首羅)라고도 하며 줄여서 자재천(自在天)이라고도 한다. 외도(外道)들은 이 신을 세계의 본체라 하며, 또는 창조의 신이라 하는데 하는데 인도 최고의 신(神)인 śiva 또는 viṣṇu를 지칭하기도 한다.
2) 범어 viṣṇu의 음역으로 우주를 유지하게 하는 인도의 신(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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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세성(世性)3)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변화(變化)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자연(自然)에서 생겨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미진(微塵)에서 생겨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원인이 없다[無因] 한다거나, 그릇된 원인[邪因]을 둔다거나, 단멸하거나 상주한다고 하는 따위의 그릇된 봄(邪見)에 떨어져서 갖가지로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말하게 되어 바른 법(法)을 알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모든 그릇된 봄을 끊고 부처님의 법[佛法]을 알게 해 주시고자 먼저 성문의 법에서는 12연기(因緣)4)를 말씀하셨고, 또 이미 마음을 닦아서 깊은 법을 감당할 수 있는 큰 마음이 있는 이를 위해서 대승의 법으로 인과 연들의 상(相)을 말씀하셨으니, 즉 “모든 법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아, 완전히 공해서 존재하는 것이 없다”고 하셨다. 『반야바라밀다경』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도량에 앉아 있을 때 12연기를 관찰하는 것이 허공과 같이 다함이 없어야 한다.’고 하였다”고 말한 바와 같다.
  부처님께서 입적하신 후 5백 세가 지난 상법(像法)에는 사람의 근기가 둔해져서 모든 법들에 깊이 집착해서, 12연기(因緣)ㆍ5온(蘊)5)ㆍ12처(處)6)ㆍ18계(界)7) 등의 결정적인 상(相)을 구하기만 하여 부처님의 진의를 알지
  
  
3) 인도 6파철학(波哲學)의 하나인 상키야 학파[數論]에서 말하는 정신원리로서의 purṣa에 대조되는 물질의 궁극적인 원리인 prakṛti[根本原質]로서 자성(自性)이나 본성(本性)으로 한역되기도 한다.
4) 무명(無明)ㆍ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6입(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ㆍ노사(老死).
5) 색온(色蘊)ㆍ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薀).
6) 안처(眼處)ㆍ이처(耳處)ㆍ비처(鼻處)ㆍ설처(舌處)ㆍ신처(身處)ㆍ의처(意處)와 색처(色處)ㆍ성처(聲處)ㆍ향처(香處)ㆍ미처(味處)ㆍ촉처(觸處)ㆍ법처(法處).
7) 안계(眼界)ㆍ이계(耳界)ㆍ비계(鼻界)ㆍ설계(舌界)ㆍ신계(身界)ㆍ의계(意界)와 안식계(眼識界)ㆍ이식계(耳識界)ㆍ비식계(鼻識界)ㆍ설식계(舌識界)ㆍ신식계(身識界)ㆍ의식계(意識界)와 색계(色界)ㆍ성계(聲界)ㆍ향계(香界)ㆍ미계(味界)ㆍ촉계(觸界)ㆍ법계(法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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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하고 단지 언설[文字]에 집착할 뿐이었다. 대승의 법에서 “모든 것이 완전히 공하다[畢竟空]”고 하는 말을 듣고도 무슨 이유로 공하다고 하는지는 알지 못하고, ‘모든 것이 공한데 어찌 죄와 복의 과보 따위가 있다고 분별하겠는가? 그러니 세제(世諦)도 제일의제(第一義諦)도 없다’는 의심을 내어 이러한 없음[空]의 상(相)을 취해서 탐착을 일으켜 완전히 공한 것에 대해서 갖가지 과실을 범한다. 용수 보살께서는 이 점들을 감안해서 이 『중론』을 지으신 것이다.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으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네.
  
  이 연기 능히 말씀해 주시어 모든 희론(戱論)을 잘 소멸해 주시니
  모든 설법자 가운데 으뜸이신 부처님께 나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립니다.
  
  이 두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했으니, 간략하게 제일의(第一義)를 말한 것이다.
  [문] 모든 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왜 단지 이 여덟 가지 일만을 들어 타파하는가?
  [답] 법이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긴 하나 간략하게 여덟 가지 일을 들어 모든 법을 통틀어서 타파한 것이다.
  ‘발생하지 않는다’란,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여러 논사들은 갖가지로 사물이 생겨나는 상(相)에 대해 말하니, 어떤 이는 원인과 결과가 같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원인 속에 미리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자기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타자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그 둘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유(有)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무(無)로부터 발생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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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한다. 이렇듯이 사물이 생겨나는 상(相)에 대해 말하지만 모두 옳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후에 상세하게 말할 것이다. 사물이 생겨나는 상(相)이 확정되어 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이다.
  ‘소멸하지 않는다’란, 발생하지 않는데 어떻게 소멸할 수 있겠는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에 여타의 여섯 가지 일도 없다.
  [문]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말로 모든 법들을 이미 다 타파했는데, 왜 다시 여섯 가지 일을 말하는가?
  [답]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이치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이다. 어떤 이는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진 않지만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는다는 것은 믿는다. 만약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깊이 궁구하면, 이것은 곧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왜 그런가? 만약 법이 실제로 있다면 없는 것이 아닌데, 전에는 있다가 지금 없다면 이것은 단멸하는 것이고, 먼저 자성(自性)이 있었다면 이것은 상주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주하지도 않고 단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말하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 않는다’는 이치에 들어간다.
  어떤 이가 네 가지로 모든 법들을 논파하는 것을 듣고서도 여전히 네 가지 문(門)으로 모든 법들을 성립시킨다고 하는데, 이것도 옳지 않다. 같다면 연(緣)이 없을 것이고 다르다면 상속(相續)이 없을 것이니, 후에 여러 가지로 타파할 것이다. 그래서 다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여섯 가지로 모든 법을 타파하는 것을 듣고서도 여전히 ‘온다’와 ‘간다’로 모든 법을 성립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온다란 모든 법이 대자재천(大自在天)ㆍ세성(世性)ㆍ극미(極微) 따위에서 오는 것을 말하며, 간다란 본래의 장소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또 모든 사물들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겁초의 곡식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본다. 왜 그러한가? 겁초의 곡식이 없으면 지금의 곡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겁초의 곡식이 없는데도 지금의 곡식이 있다면, 발생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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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문] 만약 발생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소멸할 것이다.
  [답] 소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서는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겁초의 곡식이 소멸하지 않는 것을 본다. 만약 소멸한다면 지금 곡식이 있지 않을 것이나 실제로는 곡식이 있다. 그러므로 소멸하지 않는다.
  [문] 만약 소멸하지 않는다면 상주할 것이다.
  [답] 상주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이 상주하지 않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곡식의 싹이 틀 때 씨는 변해서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주하지 않는다.
  [문] 만약 상주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단멸할 것이다.
  [답] 단멸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이 단멸하지 않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곡식의 씨에서 싹이 튼다. 그러므로 단멸하지 않는다. 만약 단멸한다면 상속(相續)하지 않을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모든 사물은 같을 것이다.
  [답]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눈으로 모든 사물이 같지 않은 것을 본다. 예를 들면 곡식의 씨가 싹을 내지 싹이 곡식의 씨를 내는 것은 아니다. 만약 곡식의 씨가 싹을 내고 싹이 곡식의 씨를 낸다면 같다고 해야 할 것이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같지 않다.
  [문] 만약 같지 않다면 마땅히 다를 것이다.
  [답] 다르지 않다.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이 다르지 않은 것을 본다. 만약 다르다면 왜 곡식의 싹ㆍ곡식의 줄기ㆍ곡식의 잎을 구별할 때 나무의 싹ㆍ나무의 줄기ㆍ나무의 잎이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다르지 않다.
  [문] 만약 다르지 않다면, 마땅히 오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답] 오는 것은 없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이 오지 않는 것을 본다. 예를 들면 곡식의 씨 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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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싹은 어디에서 오는 일이 없다. 만약 온다면, 마치 새가 와서 나무에 깃들 듯이 다른 곳에서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오지 않는다.
  [문] 만약 오지 않는다면, 마땅히 가는 것은 있을 것이다.
  [답] 가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세간에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눈으로 모든 사물이 가지 않는 것을 본다. 만약 가는 것이 있다면, 마치 뱀이 구멍에서 빠져나가듯이 싹이 씨에서 나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가지 않는다.
  [문] 그대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의 이치를 풀이했는데, 나는 논을 지은 이의 말을 듣고 싶다.
  
  [답] 모든 법(法)은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오 타자로부터도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그 둘로부터도, 또는 원인이 없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그러니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네. (1)8)
  
  ‘스스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오’란, 모든 사물들은 자기로부터 발생하는 일이 없고 반드시 인(因)과 연(緣)에 의존해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만일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하나의 법에 두 가지 자체(自體)가 있게 되니, 하나는 발생하는 것[生]이요 다른 하나는 발생시키는 것[生者]이다. 만일 여타의 인연들이 없이 자기로부터 발생한다면 인(因)도 없고 연(緣)도 없을 것이다. 또 발생에는 다시 발생이 있게 되어 발생이 무한할 것이다. 자기가 없기 때문에 타자도 없다. 왜 그러한가? 자기가 있기 때문에 타자가 있는 것이고, 만일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면 타자로부터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 둘로부터 발생한다’고 한다면 두 과실이 있다. 자기로부터 발생하고 타자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만일 원인이 없이 사물이 있다면 이것은 상주하는 것이리라. 이것은 옳지 않다. 만일 원인이 없다면 결과가 없다. 원인이 없는데
  
  
8) 이하 각 게송에 표기된 일련 번호는 고려대장경 원문에는 없는 것이나 역자가 달아 두었을 것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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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결과가 있다면, 보시(布施)를 하고 지계(持戒)를 하는 이들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며, 10악(惡)9)을 하고 5역(逆)10)을 하는 이들이 천계(天界)에 태어날 것이다. 왜냐 하면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자성은 연(緣) 속에 있지 않네.
  자성이 있지 않으니 타성도 있지 않네. (2)
  
  또 모든 법의 자성은 연 속에 있지 않다. 단지 연이 화합한 것이기에 이름[名字]을 얻을 따름이다. 자성이란 자체이다. 연 속에는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으니 자기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자성이 없으니 타성도 없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있으므로 타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은 타성에 있어서는 또한 자성이다. 만일 자성이 타파된다면 타성도 타파된다. 그러므로 타성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만일 자성과 타성이 타파된다면 양자가 타파되는 것이다. 원인이 없다면 큰 과실이 있다. 원인이 있다 해도 타파되는데 하물며 원인이 없다고 하는 것이랴? 4구(句)11) 중 어느 발생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발생하지 않는다.
  [문] 아비달마학파의 사람은 “법들이 4연(緣)에서 발생한다”고 말하는데, 왜 발생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4연이란 무엇인가?
  
  인연ㆍ등무간연[次等緣]ㆍ소연연[緣緣]ㆍ증상연,
  이 4연(緣)에서 법들이 발생하네. 다시 제5의 연은 없네.(3)
  
  
  
9) 살생[殺生]ㆍ도둑질[偸盜]ㆍ그릇된 성관계[邪淫]ㆍ거짓말[妄語]ㆍ이간질[兩舌] ㆍ욕[惡口]ㆍ꾸미는 말[綺語]ㆍ탐욕[貪]ㆍ증오[瞋]ㆍ그릇된 견해[邪見].
10) 다섯 가지 극악무도한 죄로서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 아라한을 살해하는 것,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나게 하는 것, 승단을 파괴하는 것 등을 말한다.
11) 여기서 말하는 4구란 첫 번째 게송에서 말한 스스로 발생한다[自生], 타자로부터 발생한다[他生], 그 둘로부터 발생한다[共生], 원인이 없이 발생한다[無因生]는 네 가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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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연들은 다 사연에 포함된다. 이 사연에 의지해서 모든 사물들이 발생한다. 인연(因緣)이란 모든 유위법을 말한다. 등무간연이란 과거세와 현재세의 아라한 최후의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을 제외한 그 밖의 과거세와 현재세의 심법과 심소법이다. 소연연과 증상연은 모든 법이다.
  
  [답] 결과가 연(緣)에서 발생하는가,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는가?
   이 연이 결과를 갖는 것인가, 이 연이 결과를 갖지 않는 것인가? (4)
  
  만일 결과가 있다면 이 결과는 연(緣)에서 발생하는가,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는가? 만일 연이 있다면 이 연은 결과를 갖는 것인가, 결과를 갖지 않는 것인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 법에 의존해서 결과가 발생하기에 이 법을 연(緣)이라 하네.
  만일 이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어찌 연 아닌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5)
  
  모든 연은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일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이 때를 연이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연에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을 때에 한해서 이를 연이라 하는 것이다. 연이 성립하는 것은 결과에 연유한다. 결과가 후이고 연이 전이기 때문이다. 만일 결과가 아직 있지 않다면 어찌 연이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물단지의 예를 보자. 물과 흙 등이 화합해서 물단지가 발생한다. 물단지를 보고 나서야 이에 의해서 물과 흙 등이 물단지의 연들이라는 것을 안다. 물단지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 어찌 물과 흙 등을 연 아닌 것이라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결과는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며,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데 하물며 연 아닌 것에서랴?
  
  결과가 미리 연(緣) 속에 있다는 것도 있지 않다는 것도 모두 있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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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네.
  미리 없다면 무엇을 위해 연이 되며, 미리 있다면 어디에 연을 쓰겠는가? (6)
  
  또 연(緣) 속에 결과가 미리 있는 것도 아니고 결과가 미리 있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약 결과가 미리 있다면 연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과가 미리 있기 때문이다. 만약 결과가 미리 있지 않다면 또한 연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사물을 발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문] 이제까지 모든 연들을 한데 묶어서 타파했다. 이제 연들을 하나하나 논파하는 것을 듣고 싶다.
  
  [답] 결과는 있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있으면서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어떻게 인연(因緣)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7)
  
  만일 인연에서 결과가 발생한다면, 있는 것이거나 없는 것이거나 있으면서 없는 것 이 세 종류일 것이다. 앞의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만일 ‘연 속에 결과가 미리 있다’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리 있기 때문이다. 만일 ‘결과가 미리 있지 않다’면 발생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미리 있지 않기 때문이며, 또 연이 아닌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있으면서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란, 있으면서 없다는 것은 반은 있고 반은 없는 것을 말한다. 둘 모두에 과실이 있다. 또 있는 것은 없는 것과 모순되고 없는 것은 있는 것과 모순되는데, 어떻게 한 법에 두 상(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세 종류로 결과가 발생하는 모습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으니, 어떻게 인연(因緣)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등무간연(等無間緣)을 타파한다.
  
  결과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라면 소멸하는 일이 있을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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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멸한 법이 어떻게 연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등무간연은 있지 않네.
  
  심법과 심소법은 삼세(三世)에 틈이 없이 발생한다. 현재세의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의 소멸함은 미래세의 심법과 심소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된다. 만일 미래세의 법이 이미 있어서 발생한다면 등무간연을 어디에 쓰겠는가? 현재세의 심법과 심소법은 머물거나 또는 머물지 않거나이다. 만일 머물지 않는다면 어떻게 등무간연이 될 수 있겠는가? 만일 머문다면 유위법이 아니다. 왜 그러한가? 모든 유위법(有爲法)에는 항상 소멸의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소멸했다면 미래세의 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될 수 없다. 만일 소멸하는 법이 여전히 있다면 이 법은 상주하는 것이다. 만일 상주하는 것이라면 죄와 복 등이 없다. 만일 소멸하고 있을 때 미래세의 법에 대해 등무간연이 된다고 한다면, 소멸하고 있는 법이란, 반은 이미 소멸한 법이고 반은 아직 소멸하지 않은 법이어서 다시 제3의 법이 없는 것을 소멸하고 있는 법이라 한다.
  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유위법(有爲法)들은 찰나찰나 소멸하기에 한 찰나도 머물 때가 없는데 어떻게 현재세의 법에 소멸하려는 것[欲滅]과 소멸하지 않으려 하는 것[未欲滅]이 있다고 말하는가?”
  만일 그대가 한 찰나에 이 소멸하려는 법과 소멸하지 않으려는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대 자신의 법을 깨뜨리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대의 아비달마학파는 “소멸한 법[滅法]이 있고 소멸하지 않은 법[不滅法]이 있으며, 소멸하려는 법이 있고 소멸하지 않으려는 법이 있다. 소멸하려는 법이란 현재세의 장차 소멸하려는 법이다. 소멸하지 않으려는 법이란, 현재세의 장차 소멸하려는 법을 제외한 그 밖의 현재세의 법ㆍ과거세의 법ㆍ미래세의 법ㆍ무위법(無爲法)을 소멸하지 않으려는 법이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등무간연이 있지 않다.
  소연연(所緣緣)을 타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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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진실하고 미묘한 법
  연(緣)이 없는 이 법에 어떻게 소연연이 있겠는가? (9)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대승의 법들은, 유색(有色)ㆍ무색(無色)ㆍ무형(無形)ㆍ유형(有形)ㆍ유루(有漏)ㆍ무루(無漏)ㆍ유위(有爲)ㆍ무위(無爲) 등의 모든 법상(法相)들은 법성(法性)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은 다 공하며 상(相)이 없고 연(緣)이 없다. 비유하면 뭇 강물이 바다로 들어가 다같이 한 맛이 되는 것과 같다.”
  진실한 법을 믿어야 하고, 방편의 말을 진실한 법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소연연이 있지 않다.
  증상연을 타파한다.
  
  모든 법은 자성이 없으므로 있음[有相]이 없네.
  “이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고 하는 말은 옳지 않네. (10)
  
  경전에서 12연기(緣起)를 말할 때 “이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모든 법은 여러 연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자체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다. 자체에 확정된 자성이 없으므로 있음[有相]이 없다. 있음이 없는데 어떻게 이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증상연이 있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범부를 따라서 있다 또는 없다고 분별해서 말씀하실 따름이다.
  
  연 일반 속에서도, 각각의 연 속에서도 결과를 구할 수 없네.
  연(緣)에 없는데 어떻게 연에서 나오겠는가? (11)
  
  또 ‘연 일반 속에서…’란 구별하지 않은 연 일반 속에 결과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각각의 연 속에서도…’란 하나하나의 연 속에도 결과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연 일반 속에도 각각의 연 속에도 결과가 없는데 어떻게 결과가 연에서 나온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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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緣)에 결과가 없는데도 연에서 나온다 한다면
  이 결과가 어떻게 연 아닌 것에선 나오지 않겠는가? (12)
  
  또 연에서 결과를 구할 수 없는데 (연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왜 연 아닌 것에선 나오지 않는가? 예를 들어 진흙에 물단지가 없는데 (진흙에서 물단지가 나온다고 한다면), 왜 우유에선 나오지 않는가?
  
  만일 결과가 연(緣)에서 발생한다면 이 연은 자성이 없는 것이네.
  자성이 없는 것에서 발생하는데 어떻게 연에서 발생할 수 있겠는가? (13)
  
  결과는 연(緣)에서 발생하지도 않으며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네.
  결과가 있지 않으니 연과 연 아닌 것 또한 있지 않네. (14)
  
  또 결과가 연에서 발생한다면 이 연은 자성이 없는 것이다. 만일 자성이 없다면 없는 것[無法]인데, 없는 것이 무엇을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란, 연이 부정되었기 때문에 연 아닌 것이라 말한다. 연 아닌 법은 실제로는 없다. 그러므로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그 둘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결과가 없는 것이다. 결과가 없으니 연도 연 아닌 것도 없다.
  
  
2.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觀去來品] 25偈
  [문] 세간에서는 눈으로 이미 간 것[已去]ㆍ아직 가지 않은 것[未去]ㆍ지금 가고 있는 것[去時]의 3시(時)의 지음[作]이 있음을 본다. 지음이 있으니 법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답] 이미 간 것에 감이 없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감이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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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없네. (1)
  이미 간 것에는 감이 없다. 이미 갔기 때문이다. 만일 감[去]이 없이 감[去業]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도 감이 없다.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가고 있는 것이란 반은 이미 간 것이고 반은 아직 가지 않은 것이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동작이 있는 곳에 감이 있네. 이것에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없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네. (2)
  
  [문]거동[作業]이 있는 곳마다 감이 있다.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거동이 있음을 눈으로 본다. 이미 간 것에는 거동이 이미 사라져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거동이 아직 없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답] 지금 가고 있는 것에 어떻게 감이 있겠는가?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는데. (3)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마치 그릇 속에 과일이 담겨 있는 것처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는 것이 될 것이다.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는 과실이 있네. 지금 가고 있는 것만에 감이 있기 때문이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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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만일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감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실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과실이 있다. 만일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서로 의존하지[因待] 않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둘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감이 없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면 두 가지의 감이 있게 되네.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의 감이네. (5)
  
  또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두 가지 감이 있다라는 과실이 있게 된다. 두 가지 감이란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을 있게 하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의 감이다.
  [문] 만일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만일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두 가는 이가 있게 되네.
  가는 이 없이 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네. (6)
  
  만일 두 가지 감이 있다면 두 가는 이가 있게 된다. 왜 그러한가? 감이 있어야 가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두 감이 있고 그래서 두 가는 이가 있게 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금 가고 있는 것에도 감이 없다.
  [문] 가는 이 없이 감이 있지 않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 이제 3시(時)12)에 가는 이가 확정되어 존재한다.
  
  [답] 가는 이 없이 감이 있다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12) 앞에서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한, 과거세ㆍ 미래세ㆍ현재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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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이 있지 않은데 어떻게 가는 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 (7)
  
  가는 이가 없다면 감을 얻을 수 없다. 이제 감이 없는데 어떻게 3시(時)에 가는 이가 확정되어 존재한다고 말하는가?
  
  가는 이는 가지 않네. 가지 않은 이도 가지 않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의 제3의 가는 자는 있지 않네. (8)
  
  또 가는 이는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가는 이가 있다면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가는 이 또는 가지 않는 이이다. 이 둘 이외의 제3의 가는 자는 있지 않다.
  [문] 만일 가는 이가 간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가는 이가 간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
   감이 없이 가는 이는 얻을 수 없는데. (9)
  
  만일 가는 이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어서 이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는 이가 없는데 감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면 가는 이가 따로 있어서 가는 작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만일 가는 이에게 감이 있다면 두 가지의 감이 있을 것이니
  하나는 가는 이의 감이고 다른 하나는 감의 감이네. (10)
  
  또 만일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의 과실이 있다. 가는 이는 하나인데 두 가지 감이 있게 된다. 하나는 가는 이에게 성립하고 있는 감이고, 다른 하나는 감에 성립하고 있는 가는 이이다. 가는 이가 성립하고 난 후에 가는 작용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앞의 “3시(時)에 가는 이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이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는 것”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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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 옳지 않다.
  
  만일 가는 이가 간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다는
  과실이 있네. 가는 이에게 감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네. (11)
  
  또 만일 어떤 사람이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다는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가는 이가 가는 작용을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먼저 가는 이가 있고 후에 감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옳지 않다. 그러므로 3시(時)에 가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만일 확실하게 결정되어 감이 존재하고 가는 이가 존재한다면 최초의 시작[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3시에서 시작을 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이미 간 것에는 시작이 없네.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시작이 없네.
  지금 가고 있는 것에는 시작이 없네. 어느 곳에서 시작이 있겠는가? (12)
  
  왜 그러한가? 3시에 시작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때는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없고 이미 간 것도 없네.
  이 둘에 시작이 있을 것이니,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어찌 시작이 있겠는가? (13)
  
  이미 간 것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도 없네.
  모든 것에 시작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분별하는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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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어떤 사람이 아직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가고 있는 것이 없으며 이미 간 것도 없다. 만일 지금 가고 있는 것이나 이미 간 것 두 곳에 시작이 있다고 한다면, 둘 모두 옳지 않다. 아직 가지 않았을 때는 아직 시작이 있지 않는데,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어찌 시작이 있겠는가? 시작이 없으니 감이 없고 감이 없으니 가는 이가 없는데 어찌 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ㆍ지금 가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문] 만약 감이 있지 않고 가는 이가 있지 않을지라도 마땅히 머묾과 머무는 이는 있을 것이다.
  
  [답] 가는 이는 머물지 않네. 가지 않는 이도 머물지 않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에 어찌 제3자가 머무는 일이 있겠는가? (15)
  
  만일 머묾이 있고 머무는 이가 있다면, 가는 이가 머물거나 가지 않는 이가 머무는 것일 것이다. 이 두 가지를 제외한다면 마땅히 제3자가 머무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가고 있는 이는 머물지 않는다. 감이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감의 특징[去相]과 모순되는 것을 머묾이라 이름한다. 가지 않는 이도 머물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감이 소멸했을 때 머묾이 있는 것인데 감이 있지 않다면 아예 머묾이 있지 않다. 가는 이와 가지 않는 이 이외의 제3의 머무는 이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제3의 머무는 이가 있다면 가는 이나 가지 않는 이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할 수 없다.
  
  가는 이가 머문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는가?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는데. (16)
  
  그대가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감이 없이는 가는 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는 이에게 감의 특징이 있는데 어찌 머묾이 있겠는가? 감과 머묾은 모순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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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간 것이나 아직 가지 않은 것에는 머묾이 있지 않네. 지금 가고 있는 것에도 머묾이 있지 않네.
  행(行)과 지(止)의 법도 모두 감의 이치와 동일하네. (17)
  
  또 만일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지금 가고 있는 것이거나 이미 간 것이거나 아직 가지 않은 것에 있으면서 머무는 것이리라. 세 곳 모두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가는 이가 머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감과 머묾이 타파되었듯이 행(行)과 지(止)도 타파될 것이다. 행(行)이란 이를테면 곡식의 씨로부터 상속(相續)해서 싹ㆍ줄기ㆍ잎 따위에 이르는 것과 같으며, 지(止)란 곡식의 씨가 소멸해서 싹ㆍ줄기ㆍ잎 따위가 소멸하는 것과 같다. 상속되기에 행(行)이라 이름하고 단절되기에 지(止)라 이름한다. 또 이를테면 무명을 연(緣)해서 모든 행(行)이 있고 나아가 발생을 연해서 노사(老死)가 있는 것을 행(行)이라 하고, 무명이 멸하기에 모든 행(行)이 멸하고 하는 따위를 지(止)라고 하는 것과 같다.
  [문] 그대가 갖가지 문(門)을 세워서 감과 가는 이, 머묾과 머무는 이를 타파하긴 했지만 감과 머묾의 있음이 눈에 보인다.
  [답] 눈에 보이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만일 감과 가는 이가 실재한다면 하나의 법(法)으로 성립하는가, 두 가지 법(法)으로 성립하는가?
  둘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감이 곧 가는 이라면 이것은 옳지 않네.
  감이 가는 이와 다르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18)
  
  만일 감이 가는 이와 같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다르다고 해도 옳지 않다.
  [문] 같다고 하거나 다르다고 하는 것에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감이 곧 가는 이라고 한다면
   행위자와 행위 이것들이 하나가 될 것이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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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이 가는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가는 이 없이 감이 있고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있는 것이네. (20)
  
  이와 같은 두 가지는 모두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만일 감이 곧 가는 이라면, 이것은 착란(錯亂)된 것이니 인(因)과 연(緣)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된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고, 가는 이를 의존해서 감이 있다. 또 감을 법(法)이라 이름하고 가는 이를 인(人)이라 한다. 인(人)은 상주하는 것이고 법(法)은 무상한 것이다. 만일 같다면, 두 가지 모두가 상주하는 것이 되거나 두 가지 모두가 무상한 것이 된다. 같다고 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만일 다르다면, 서로 배척하는 것이 된다. 감이 아직 있지 않아도 가는 이가 있을 것이고, 가는 이가 아직 있지 않아도 감이 있을 것이다. 서로 의존하지[因待] 않으니 하나의 법이 멸하더라도 하나의 법은 남아 있을 것이다. 다르다고 하는 것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감과 가는 이 이 둘이 만일 같은 법으로 성립한다거나 다른 법으로 성립한다고 한다면
  두 문(門)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성립하는 일이 있겠는가? (21)
  
  또 만일 가는 이와 감이 같은 법으로나 다른 법으로 성립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두 가지 모두 얻을 수 없다. 앞에서 이미 제3의 법이 성립하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만일 성립하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감과 가는 이가 없는 인연을 말하는 셈이 된다.
  이제 다시 말한다.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 가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네.
  이전에 감이 있는 것이 아니니 가는 이와 감이 있지 않네.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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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 감이 아직 있지 않을 때는 가는 이가 없으며, 또한 지금 가고 있는 것ㆍ이미 간 것ㆍ아직 가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과 성읍(城邑)이 먼저 있고 그리고 나서 사람이 성읍으로 가는 것처럼 그렇게 감과 가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가는 이는 감에 의존해서 성립하고 감은 가는 이에 의존해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와) 다른 감을 쓰지 않네.
  나의 가는 이에게서 두 가지 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네. (23)
  
  또 감에 의해서 가는 이가 알려질 때, 이 가는 이는 (이와) 다른 감을 쓰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나의 가는 이에게서 두 가지 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도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24)
  
  실재하면서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
  그러니 감이나 가는 이, 갈 곳이 모두 없네. (25)
  
  ‘실재하는 가는 이’에서, ‘실재하는[決定有]’이란 실제로 존재한다는[本實有]것으로 감에 의존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감’이란 몸의 움직임[身動]이다. ‘세 가지의 감’이란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이미 간 것과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가는 이가 실재한다면, 감이 없이 가는 이가 존재할 것이고 머묾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에서 ‘실재하지 않는[不決定有]’이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本實無]것을 의미한다. 감에 의존할 때 가는 이라 할 수 있는데, 감이 없으니 세 가지 가는 작용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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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는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는 것인데, 이전에 감이 없으니 가는 이가 없다. 어떻게 실재하지 않는 가는 이가 세 가지 가는 작용을 하겠는가?
  감도 가는 이의 경우와 같다. 만일 이전에 가는 이 없이 감이 실재한다면, 가는 이에 의존하지 않고 감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는 이는 세 가지의 가는 작용을 하지 않는다. 감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가는 이를 어디에 쓰겠는가?
  이렇게 사유(思惟)하고 관찰(觀察)해 보건대 감ㆍ가는 이ㆍ갈 곳 이 법들은 모두 서로 의존한다. 감에 의존해서 가는 이가 있고 가는 이에 의존해서 감이 있다. 이 두 법에 의존해서 갈 곳이 있는 것이니, 실재한다고 말해서 안 되고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세 가지 법(法)은 허망(虛妄)하고 공(空)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가명(假名)이 있을 뿐이어서 환영과 같고 변화(變化)와 같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3. 6근(根)을 관찰하는 장[觀六情品] 8偈
  [문] 경전에서는 여섯 근(根)이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다음과 같다.
  
  눈[眼]ㆍ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ㆍ뜻[意] 등의 6정(情:根)이네.
  이 눈 등 여섯 근은 색(色) 등 여섯 경계에 작용하네. (1)
  
  이 중에서 눈[眼]이 안[內]의 근(根)이 되고 색(色)이 바깥의 경계가 되어 눈이 색을 보고, 나아가 뜻[意]이 안의 근이 되고 법(法)이 바깥의 경계가 되어 뜻[意]이 법(法)을 능히 인식한다.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 눈은 자기를 볼 수 없네.
  자기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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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눈은 자기를 볼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마치 등불이 자기를 비추고 또 다른 것을 비출 수 있듯이 그렇게 눈이 봄[見相]을 갖는 것이라면, 자기도 비추고 다른 것도 비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게송에서 ‘자기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문] 눈은 자기를 볼 수 없긴 하나 다른 것을 볼 수는 있다. 마치 불이 다른 것을 태울 수는 있으나 자기를 태우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
  
  [답] 불의 비유는 눈의 봄을 성립시키지 못하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과 지금 가고 있는 것에서 이미 다 이것에 답했네. (3)
  
  그대가 불의 비유를 제시하긴 했지만 눈의 봄[見法]을 성립시키진 못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觀去來品]」에서 이미 답했다. 이미 간 것에 감이 없고 아직 가지 않은 것에 감이 없고 지금 가고 있는 것에 감이 없듯이, 이미 탄 것과 아직 타지 않은 것과 지금 타고 있는 것 모두에 태움(燒)이 없다. 이렇듯이 이미 본 것과 아직 보지 않은 것과 지금 보고 있는 것 모두에 봄[見相]이 없다.
  
  봄이 아직 보지 않았을 때라면 봄이라 하지 않네.
  그런데 봄이 본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네. (4)
  
  또 눈이 아직 색을 대하지 않았을 때는 보지 못하니, 그 때를 봄이라 할 수 없다. 색을 대함으로 인하여 봄이라 한다. 그래서 게송에서 ‘아직 보지 않았을 때라면 봄이라 하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어찌 봄이 볼 수 있겠는가?
  또 두 경우 모두 봄이 없다. 왜 그러한가?
  
  봄은 보지 않네. 보지 않음도 보지 않네.
  봄이 타파되었다면 보는 이도 타파된 것이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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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보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과실을 말했기 때문이다. 보지 않음도 보지 않는다. 봄[見相]이 없기 때문이다. 봄[見相]이 없는데 어떻게 보겠는가? 봄[見法]이 없으니 보는 이도 없다. 왜 그러한가? 만약 봄[見]을 떠나서 보는 이가 있다면 눈이 없는 이가 다른 감관[根]으로 보는 것이리라. 만약 봄이 본다면 봄에 봄[見相]이 있는 것이니 보는 이에게는 봄[見相]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봄이 타파되었다면 보는 이도 타파된 것이네”라고 말한 것이다.
  
  봄이 없어도 봄이 없지 않아도 보는 이를 얻을 수 없네.
  보이는 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봄과 봄의 대상이 있겠는가? (6)
  
  또 봄이 있다 해도 보는 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봄이 있지 않다 해도 보는 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보는 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봄과 봄의 대상[可見]이 있겠는가? 보는 이가 있지 않은데 누가 봄에 의해서 바깥의 색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게송에서 ‘보는 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봄과 봄의 대상이 있겠는가?’ 하고 말한 것이다.
  
  봄과 봄의 대상이 있지 않으니 식(識) 등 네 법(法)이 있지 않네.
  4취(取) 등의 연(緣)들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7)
  
  또 봄과 봄의 대상이 있지 않으니 식(識)ㆍ촉(觸)ㆍ수(受)ㆍ애(愛)의 네 법이 모두 있지 않다. 애(愛) 등이 있지 않으니 4취(取)13) 등 12연기의 분지(分枝)도 있지 않다.
  
  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 성(聲), 듣는 이[聞者] 등도
  이와 같은 이치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모두 위에서 말한 바와 같네.(8)
  
  
13)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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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봄과 봄의 대상[可見]이 뭇 연(緣)에 귀속되기 때문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없어 공(空)하듯이, 그 밖의 이(耳) 등의 다섯 근(根)이나 성(聲) 등의 다섯 경계[塵]도 봄이나 봄의 대상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치가 같기 때문에 별도로 설명하지 않겠다.
  
  
4. 오온(五蘊)을 관찰하는 장[觀五陰品] 9偈
  [문] 경전에서는 5온(蘊)이 있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답] 색(色)의 원인 없이 색을 얻을 수가 없네.
   색 없이 색의 원인을 얻을 수가 없네. (1)
  
  ‘색(色)의 원인’이란 베[布]의 원인인 실과 같은 것이다. 실을 없애면 베가 없고 베를 없애면 실이 없다. 베는 색과 같고 실은 색의 원인과 같다.
  [문] 색의 원인 없이 색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색의 원인 없이 색이 있다면 이 색은 원인이 없는 것이네.
   원인이 없이 법(法)이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2)
  
  예를 들어 실 없이 베가 있다면 이 베는 원인이 없는 것이다. 원인이 없이 법(法)이 있는 일은 세간에 없다.
  
  [문] 불교의 법(法), 외도의 법, 세간의 법에 모두 원인이 없는 법이 있다. 불교의 법에는 세 무위(無爲)가 있다. 무위는 상주하는 것이므로 원인이 없는 것이다. 외도의 법에는 허공ㆍ시간ㆍ장소ㆍ신(神)14)ㆍ미진(微塵)15)ㆍ열반 따위가 있다. 세간의 법에는 허공ㆍ시간ㆍ장소 따위가 있다. 이 세 법(法)16)
  
  
14) 아뜨만(ātman)은 보통 아(我)로 한역되는데 여기서는 신(神)으로 한역하고 있다.
15) 극미(極微)라고도 한다.
16) 앞에서 말한 불교의 법ㆍ외도의 법ㆍ세간의 법 등 세 가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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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상주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주하는 것이기에 원인이 없다. 그런데 그대는 무슨 까닭에 원인이 없는 법이 세간에 없다고 하는가?
  [답] 이 원인이 없는 법은 그저 언설(言說)이 있을 따름이다. 사유(思惟)해서 분별(分別)한 것은 모두 있지 않은 것이다. 만일 법이 인연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라면 원인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인연이 없다면 내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문] 두 종류의 원인이 있다. 하나는 발생의 원인[作因]이고 다른 하나는 언설의 원인[言說因]이다. 이 원인이 없는 법은 발생의 원인이 없고 단지 언설의 원인이 있을 따름이다. 사람들이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답] 언설의 원인이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허공은 「6계(界)를 관찰하는 장」에서 타파하는 바와 같다. 그 밖의 것들은 후에 논파할 것이다. 또 눈에 보이는 분명한 것도 모두 타파되는데 하물며 극미[微塵] 따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랴? 그러므로 원인이 없는 법은 세간에 없다.
  [문] 색 없이 색의 원인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만일 색 없이 원인이 있다면 이것은 결과가 없는 원인이리라.
   만일 결과가 없는 원인을 말한다면 옳은 점이 없네. (3)
  
  색이라는 결과가 없이 오직 색의 원인만이 있다면 이것은 결과가 없는 원인이다.
  [문]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는 일은 세간에 없다. 왜 그러한가? 결과가 있기에 원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만일 결과가 없다면 어떻게 원인이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또 만일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면 사물이 어떻게 원인 아닌 것에서 발생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인과 연을 타파하는 장[破因緣品]17)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결과가 없이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미 색이 있다면 색의 원인을 쓰지 않네.
  
  
17) 인과 연을 타파하는 장이란 「관인연품(觀因緣品)」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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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색이 있지 않다면 색의 원인을 쓰지 않네. (4)
  
  또 두 경우에 색의 원인이 있을 터인데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미리 있는 원인 속에 색이 있다면 색의 원인이라 하지 않는다. 만약 미리 있는 원인 속에 색이 있지 않다면 또한 색의 원인이라 이름하지 않는다.
  [문] 두 경우라면 모두 옳지 않다. 단지 원인이 없이 색이 있을 따름이다.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면 이것은 결코 옳지 않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색을 분별하지 않네. (5)
  
  원인 속에 (색이라는) 결과가 있다는 것이나 원인 속에 (색이라는) 결과가 있지 않다는 것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는 것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원인이 없이 색이 있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색을 분별하지 않는다. 분별하는 이를 범부라 이름한다. 무명과 탐욕[愛染]으로써 색을 탐착(貪著)하고 그런 후에 그릇된 봄[邪見]으로써 분별과 희론을 일으켜 원인 속에 결과가 있다거나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고 하는 따위를 말한다. 이제 이 중에서 색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라면 분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일 결과가 원인과 유사하다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만일 결과가 원인과 유사하지 않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6)
  
  또 만일 결과와 원인이 서로 유사하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원인은 미세하고 결과는 거칠고 크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색은 힘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베가 실과 유사하다면 베라 이름할 수 없다. 실은 다(多)이고 베는 일(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일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예를 들어 삼[麻]의 실은 명주를 이루지 않듯이 거친 실은 미세한 베를 만들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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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않는다. 그러므로 원인과 결과가 서로 유사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두 주장 모두 이치에 맞지 않으니 색도 없고 색의 원인도 없는 것이다.
  
  수온[受蔭]ㆍ상온[想蔭]ㆍ행온[行蔭]ㆍ식온[識蔭] 등
  여타의 모든 법은 다 색온[色蔭]과 동일하네. (7)
  
   (나머지) 네 온(蔭)과 모든 법도 이와 같이 사유해서 논파해야 한다.
  또 이제 논을 짓는 이는 공성의 이치를 찬미하고자 게송을 읊는다.
  
  만일 어떤 자에게 묻는 자가 있을 때 (어떤 자가) 공성(空性)이 없이 답한다면
  이것은 답이 되지 못하네. 모두 그가 의심하는 것과 같게 되네. (8)
  
  만일 어떤 자가 논박하고자 할 때 공성(空性)이 없이 그 과실을 말한다면
  이것은 논박이 되지 못하네. 모두 그가 의심하는 것과 같게 되네. (9)
  
  사람들이 논쟁을 벌일 때는 제각기 주장하는 바가 있다. 공성(空性)의 이치가 없이 묻고 답한다면, 물음은 물음이 되지 못하고 답은 답이 되지 못해서 모두 (그들이) 의심하는 것이 되고 만다. 가령 어떤 자가 “물단지는 무상하다”고 말했을 때 묻는 자가 “무엇에 근거해서 무상하다고 하는가?” 했다고 하자. 이 물음에 “무상한 원인에서 생겼기 때문이다”고 답한다면 이것은 답이라 할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원인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되어 그것18)이 상주하는 것인지 무상한 것이지 알지 못한다. 이것19)은 그가 의심하는 것20)과 같게 된다.
  만일 묻는 자가 그 과실을 말하고자 할 때 공성에 의지해서 “모든 법은 무상
  
  
18) 물단지를 가리킨다.
19) “무상한 원인에서 생겼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한 것을 말한다.
20) ‘물단지는 무상하다’고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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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논박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그대가 무상함에 의거해서 나의 상주함을 논파한다면, 나도 상주함에 의거해서 그대의 무상함을 다음과 같이 논파한다.
  “상주함이 없다면 업보가 없을 것이다. 눈[眼]ㆍ귀[耳] 등 법(法)들이 찰나찰나 소멸하기에 분별도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실이 있기 때문에 모두 논박이 되지 못하고 그가 의심하는 것21)과 같게 된다.
  만일 공성(空性)에 의거해서 상주함을 논파한다면 과실이 없다. 왜 그러한가? 이 사람은 공성의 상(相)에 취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묻고 답하고자 한다면 공성[空法]에 의거해야 하는데 하물며 고(苦)가 없는 적멸[寂滅相]을 구하고자 하는 자에게 있어서이겠는가?
  
  
5. 6계(界)를 관찰하는 장[觀六種品] 8偈
  [문] 6계(界)에는 각각 확정된 상(相)이 있다. 확정된 상이 있기 때문에 6계가 있다.
  
  [답] 허공의 상(相)이 아직 있지 않을 때 허공은 없네.
   만약 미리 허공이 있다면 상(相)이 없는 것이 되네. (1)
  
  만약 아직 허공의 상(相)이 있지 않은데 미리 허공이 있다면 허공은 상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색(色)이 없는 공간[處]이 허공의 상이기 때문이다. 색은 지어진 것[作法]이기에 무상하다. 만약 색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아직 발생하지 않았으니 소멸하지 않을 것이며 그 때에는 허공의 상이 없을 것이다. 색에 의존해서 색이 없는 공간이 있다. 색이 없는 공간을 허공의 상(相)이라 한다.
  [문] 만약 상(相)이 없이 허공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21) 상주함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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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 이 상(相)이 없는 법은 어떤 곳에도 있지 않네.
   상이 없는 법에 있어서 상은 상을 띠는 일[所相]이 없네. (2)
  
  만약 상주하는 법(法)과 무상한 법 중에서 상(相)이 없는 법을 구한다면 얻을 수 없다. 논자가 말하는 바와 같은 이 유위와 무위가 어떻게 각각 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답한다.) 그러므로 발생과 머묾과 소멸은 유위(有爲)의 상이고, 발생과 머묾과 소멸의 없음은 무위(無爲)의 상이다. 만약 허공이 상이 없는 것이라면 허공은 있지 않다.
  만약 전에는 상이 없다가 후에 상이 와서 상이 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전에 상이 없다면 상을 띠게 하는 법[可相]이 없다. 왜 그러한가?
  
  상(相)을 갖는 것에도 상을 갖지 않는 것에도 상은 거주하지 않네.
  상을 갖는 것과 상을 갖지 않는 것을 떠난 다른 곳에도 거주하지 않네. (3)
  
  등이 불룩 튀어나와 있는 것, 뿔이 있는 것, 꼬리 끝에 털이 나 있는 것, 목덜미가 축 늘어져 있는 것, 이것들이 소의 상(相)이다. 이 상들을 떠나서 소는 있지 않다. 만약 소가 있지 않다면 이 상들이 거주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상을 갖지 않는 법에서 상은 상을 띠는 일이 없다. 상을 갖는 법에도 상은 거주하지 않는다. 미리 상이 있기 때문이다. 물[水相]에 불의 상은 거주하지 않는다. 미리 자기의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또 상을 갖지 않는 법에 상이 거주한다고 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 될 것이다. 원인이 없는 것을 무[無法]라 한다. 상을 갖는 것[有相]과 상(相)과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은 항상 서로 의존[因待]하기 때문이다. 상을 갖는 것과 상을 갖지 않는 것을 떠나 다시 제3의 장소에서 상을 띠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게송에서 “상을 갖는 것과 상을 갖지 않는 것을 떠난 다른 곳에도 거주하지 않네” 하고 말한 것이다.
  상[相法]이 있지 않으니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法]도 있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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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을 띠게 하는 것이 있지 않으니 상도 있지 않네. (4)
  
  또 상이 거주하는 곳이 없기 때문에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法]이 없다. 상을 띠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상도 없다. 왜 그러한가? 상에 의존해서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이 있고 상을 띠게 하는 것에 의존해서 상이 있다.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상이 있지 않고 상을 띠게 하는 것도 있지 않네.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을 떠나 다시 사물[物]이 있지 않네. (5)
  
  인과 연들 속에서 처음에서 끝까지 구해 보아도 상과 상을 띠게 하는 것의 확정을 얻을 수 없다. 이 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법들은 다 있지 않다. 모든 법들은 다 상과 상을 띠게 하는 두 법에 포함된다. 어떤 때는 상(相)이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이 되고 어떤 때는 상을 띠게 하는 것이 상이 된다. 예를 들어 연기가 불의 상이 되고 다시 불이 연기의 상이 되는 경우와 같다.
  [문] 유(有)가 있지 않다면 무(無)는 있을 것이다.
  
  [답] 유(有)가 없다면 어떻게 무(無)가 있겠는가?
   유와 무가 이미 없으니 유와 무를 아는 자는 누구인가? (6)
  
  무릇 사물[物]이 스스로 괴멸했거나 다른 것에 의해 괴멸했다면 이를 무(無)라 한다. 무는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다. 유(有)에 의지해서 있다. 그러므로 유가 없다면 어떻게 무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사물의 무이겠는가?
  [문] 유가 있지 않기에 무도 있지 않다. (그러나) 유와 무를 아는 자는 있을 것이다.
  [답] 만약 (유와 무를) 아는 자가 있다면 유에 있거나 무에 있을 것이다. 유와 무가 이미 타파되었으므로 (유와 무를) 아는 자도 같이 타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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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허공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며
  상(相)도 아니고 상을 띠게 하는 것[可相]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그 밖의 다섯도 허공과 같네. (7)
  
  허공에서 갖가지 상(相)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듯이, 그 밖의 다섯 가지22)도 이와 같다.
  [문] 허공은 최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최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왜 먼저 타파하는가?
  [답]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은 연들이 화합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타파된다. 식(識)은 고(苦)와 낙(樂)의 원인이기 때문에, 무상하게 변이하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쉽게 논파된다. 허공은 이와 같은 상(相)이 없고 단지 범부가 있다고 희망하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먼저 타파한다. 또 허공은 4대(大)를 지닌다. 4대를 인연으로 해서 식(識)이 있다. 그러므로 먼저 근본이 되는 것을 타파하면 그 밖의 것은 저절로 타파된다.
  [문] 세간의 사람들은 모든 법의 있음[有]이나 없음[無]을 본다. 그대는 왜 홀로 세상과 상반되게 보지 않는다고 말하는가?
  
  [답] 지혜가 얕은 사람은 모든 법의 있음[有]이나 없음[無]를 보네.
   그러니 봄[見]이 멸한 안은(安隱)한 법을 보지 못하네. (8)
  
  만약 어떤 사람이 아직 도(道)를 얻지 못했다면 법들의 실상(實相)을 보지 못한다. 봄[見]을 사랑하기 때문에 갖가지 희론이 생긴다. 법(法)이 발생하는 것을 볼 때 이를 있다[有]고 여겨서 상(相)을 취해 “있다”라고 말한다. 법이 소멸하는 것을 볼 때 이를 단멸한다[斷]고 여겨서 상을 취해서 “없다”라고 말한다. 지혜로운 이[智者]는 모든 법이 발생하는 것을 볼 때 없다고 보는 것[無見]을 멸하고, 모든 법이 소멸하는 것을 볼 때 있다고 보는 것[有
  
  
22)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식(識)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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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見]을 멸한다. 그러므로 비록 모든 법들을 보는 것[所見]이 있다 할지라도 모두 환영과 같고 꿈과 같다. 나아가 무루도(無漏道)를 보는 것[見]도 멸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보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봄[見]이 멸한 안은(安隱)한 법을 보지 못한다면 있음[有]를 보거나 없음[無]을 보게 된다.
  
  
6.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를 관찰하는 장[觀染染者品]10偈
  [문] 경전에서 탐욕ㆍ증오[瞋恚]ㆍ무지[愚癡]는 세간의 근본이라고 말하고 있다. 탐욕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애(愛)라고도 하고 착(著)이라고도 하고 염(染)이라고도 하고 음욕(婬欲)이라고도 하고 탐욕(貪欲)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이름들이 있다. 이것은 결사(結使)로서 중생에 의지한다. 중생을 물든 자[染者]라 하고 탐욕을 물듦[染法]이라 한다. 물듦과 물든 자가 있기 때문에 탐욕이 있다. 그 밖의 둘도 이와 같다. 증오[瞋]가 있기에 증오하는 자[瞋者]가 있고 무지[癡]가 있기에 무지한 자[癡者]가 있다. 이 3독(毒)이 인연이 되어서 3업(業)23)이 일어난다. 3업이 인연이 되어서 3계(界)24)가 일어난다. 그러므로 모든 법들이 있다.
  [답] 경전에서는 비록 3독의 이름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체를 구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만약 탐욕[染法]을 떠나 먼저 스스로 탐욕을 내는 이[染者]가 있다면
  이 탐욕을 내는 이[染欲者]에 의존해서 탐욕이 생길 것이네. (1)
  
  만약 탐욕을 내는 이가 없다면 어떻게 탐욕이 있겠는가?
  탐욕이 있을 때든 탐욕이 없을 때든 탐욕을 내는 이도 이와 같네. (2)
  만약 먼저 탐욕을 내는 이가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다시 탐욕을 필요로 하지
  
  
23) 신업(身業)ㆍ구업(口業)ㆍ의업(意業).
24)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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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을 것이다. 탐욕을 내는 이가 이미 탐욕을 냈기 때문이다. 만약 먼저 탐욕을 내는 이가 없다면 또한 다시 탐욕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탐욕을 내는 이가 있고 나서야 탐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먼저 탐욕을 내는 이가 없다면 탐욕의 대상이 되는 것도 없을 것이다. 탐욕[染法]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먼저 사람이 없이 탐욕이 있다면, 이것은 원인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는가? 마치 장작이 없이 불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먼저 탐욕이 없다면 탐욕을 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 ‘탐욕이 있을 때든 탐욕이 없을 때든 탐욕을 내는 이도 이와 같네.’라고 말한 것이다.
  [문]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전후로 서로 의존해서 발생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면, (동시에 발생하는 것이리라.) 만약 동시에 발생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은 옳지 않네.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동시라면 서로 의존하는 일이 없을 것이네. (3)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동시에 성립한다면 서로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탐욕을 내는 이에 의존하지 않고 탐욕이 있거나 탐욕에 의존하지 않고 탐욕을 내는 이가 있다면, 이 둘은 상주하는 것이리라. 원인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상주한다고 한다면 과실이 많아 해탈하지 못할 것이다.
  또 이제 같음과 다름으로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를 타파해야 하겠다. 왜 그러한가?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같다면 같은 법이 어떻게 합하겠는가?
  탐욕을 내는 이와 탐욕이 다르다면 다른 법이 어떻게 합하겠는가?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같은 법으로 합하거나 다른 법으로 합한다. 만약 같다면 합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같은 법이 어떻게 자기와 합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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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가? 마치 손가락 끝이 자기를 감촉할 수 없듯이. 만약 다른 법으로 합한다면 이것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다른 법으로 성립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각각 성립해 있기에 끝내 다시 합할 필요가 없다면, 설령 합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다르다.
  또 같음과 다름을 모두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같아야 합한다고 한다면 짝이 없이 합할 것이네.
  달라야 합한다고 한다면 짝이 없이 합할 것이네. (5)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같기에 합한다고 억지로 그래 본다면, 여타의 인연이 없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있을 것이다. 또 만약 같다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 두 이름이 있지 않을 것이다. 탐욕은 법(法)이고 탐욕을 내는 이는 사람이다. 만약 사람과 법이 같다면, 큰 혼란이 있을 것이다.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다르기에 합한다고 말한다면 여타의 인연을 기다리지 않고 합할 것이다. 만약 다른데도 합한다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합할 것이다.
  [문] 같은 것이 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렇다 치자. 눈이 다른 것을 볼 때 함께 합하는 것이다.
  
  [답] 만약 다르기에 합한다고 한다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무엇인가?
   이 두 상(相)은 먼저 다르기에 연후에 합한다고 말하는 것이네. (6)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먼저 다름이 있기에 이후에 합한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합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 두 상(相)은 먼저 이미 다르고 이후에 합한다고 억지로 말하는 것이다.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먼저 각각 다름이 성립한다면
  이미 다름이 성립해 있는데 왜 합한다고 말하는가? (7)
  또 만약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가 먼저 각각 다름이 성립한다면 그대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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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굳이 합함을 말하는가?
  
  다름이 성립하지 않기에 그대는 합하고자 하네.
  합함이 끝내 성립하지 않기에 다시 다름을 말하네. (8)
  
  또 그대는 이미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의 다름이 성립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합함[合相]을 말한다. 그러나 합함에는 과실이 있다.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성립하지 않았는데 그대는 합함을 성립하게 하기 위해 다시 다름[異相]을 말한다. 그대 스스로 확정해 놓고서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셈이다.25)
  
  다름이 성립하지 않으니 합함이 성립하지 않네
  어떤 다름 속에서 합함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9)
  
  이 중에서는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의 다름이 성립하지 않기에 합함도 성립하지 않는다. 그대는 어떤 다름 속에서 합함을 말하고자 하는가?
  
  이와 같이 탐욕과 탐욕을 내는 이는 합함도 합하지 않음도 성립하지 않네.
  모든 법들 또한 이와 같이 합함도 합하지 않음도 성립하지 않네. (10)
  
  또 증오[恚]와 무지[癡]도 탐욕[染]과 같다. 모든 번뇌와 모든 법도 3독과 같다. 전도 아니고 후도 아니며, 합해지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 같이 인과 연들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25) 다르지 않다고 확정해 놓고서는 다시 다르다고 말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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