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중론(中論)

중론 제3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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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제3권
  
  
  
  용수보살 지음
  요진삼장 구마라집한역
  범지 청목주석
  박인성 번역
  
  15. 있음과 없음을 관찰하는 장[觀有無品] 11偈
  [문] 모든 법에는 각각 자성이 있다. 용도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물단지에는 물단지의 자성이 있고 천에는 천의 자성이 있다. 이 자성들은 뭇 연이 합할 때 출현한다.
  
  [답] 뭇 연(緣)에 자성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네.
   자성이 뭇 연에서 발생한다면 만들어진 것[作法]이리라. (1)
  
  만약 모든 법에 자성이 있다면 뭇 연에서 출현하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뭇 연에서 출현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만들어진 것[作法]이라 확정된 자성이 없다.
  [문] 만약 법들의 자성이 연들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만약 자성이 만들어진 것[作]이라 한다면 어떻게 이런 주장이 있을 수 있는가?
  자성은 만들어진 것[作]이 아니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성립하네. (2)
  마치 금이 구리와 섞여 있으면 순금이 아닌 것과 같이, 만약 자성이 있다면 연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만약 연들에서 출현한다면 순수함[眞性]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만약 자성이 확정되어 있다면 다른 것에 의존해서 출현하지 않는다. 마치 긴 것과 짧은 것, 저것과 이것에 확정된 자성이 없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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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다른 것에 의존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문] 만약 법들에 자성이 없다면 타성이 있을 것이다.
  
  [답] 법에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이 있겠는가?
   타성에 있어서 자성을 또한 타성이라고 하네. (3)
  
  법들의 자성은 연들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또 의존해서 성립한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없다. 만약 그렇다면 타성은 타자에 있어서 또한 자성이다. (이것) 또한 연들에서 발생하고 서로 의존해서 성립하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법들이 타성에서 발생한다고 말하겠는가? 타성 또한 자성이기 때문이다.
  [문] 자성이나 타성을 떠나 법들이 있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어떻게 존재[法]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자성과 타성이 있을 때 존재가 성립할 수 있네. (4)
  
  그대가 만약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존재[法]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존재[法]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자성과 타성이 있을 때 존재가 성립한다. 가령 물단지 자체는 자성이고 (이에) 의지하는 사물[依物]은 타성이다.
  [문] 자성과 타성에 의해서 존재[有]가 타파되었으니 이제 비존재[無]가 있으리라.
  
  [답] 존재[有]가 성립하지 않는데 비존재[無]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는가?
   존재[有法]가 있기에 존재가 괴멸한 것을 비존재라고 하네. (5)
  
  만약 그대가 존재[有]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면 또한 비존재[無]가 있지 않다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왜 그러한가? 존재[有法]가 괴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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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것을 비존재라 한다. 이 비존재는 존재의 괴멸에 의존해서 있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존재와 비존재, 자성과 타성을 본다면
  그렇다면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한 의미를 보지 못하네. (6)
  
  또 만약 어떤 사람이 법들에 깊이 집착한다면 반드시 있다[有]는 견해를 구하게 된다. 자성을 타파하면 타성을 보고, 타성을 타파하면 존재[有]를 보고, 존재를 타파하면 비존재[無]를 보고, 비존재를 타파하면 미혹하게 된다. 만약 근기가 예리하고 집착하는 마음이 얇다면 온갖 견해들이 소멸한 안은[安隱]함을 알기 때문에 다시 네 가지의 희론(戱論)1)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 사람은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한 이치를 본다. 그러기에 위의 게송을 읊은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존재와 비존재를 부정하셨네. 가전연(迦旃延)을 교화하는
  경전에서 말씀하셨듯이 존재도 없고 비존재도 없네. (7)
  
  또 산타가전연경(刪陀迦旃延經)에서 부처님께서 바른 견해의 이치를 말씀해 주시고자 존재를 부정하셨고 비존재를 부정하셨다. 만약 모든 법(法)이 조금이라도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부처님께서 존재와 비존재를 타파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존재를 타파하면 사람들은 비존재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모든 법의 상(相)에 통달하셨기 때문에 두 가지 모두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존재한다[有]’나 ‘존재하지 않는다[無]’는 견해를 버려야 할 것이다.
  
  만약 법에 자성이 실재한다면 후에 변이하지 않을 것이네.
  만약 자성이 변이하는 일[異相]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결코 옳지 않네. (8)
  
  
1) 자성ㆍ타성ㆍ존재ㆍ비존재의 네 가지에 대한 희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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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만약 법들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결코 변이(變異)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확정되어 자성이 존재한다면 변이[異相]가 있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말한 순금의 비유와 같다. 지금 모든 법에 변이가 있는 것이 분명하게 보이니 확정된 상(相)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법에 자성이 실재하는데 어떻게 변이할 수 있겠는가?
  법에 자성이 실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변이할 수 있겠는가? (9)
  
  만약 법에 자성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변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자성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변이할 수 있겠는가?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상주에 집착하는 것이고, 확정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단멸에 집착하는 것이네.
  그러니 지혜로운 이는 존재성[有]과 비존재성[無]에 집착해서는 안 되네. (10)
  
  또 만약 법의 존재성[有相]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결코 비존재성[無相]이 없을 것이니, 이것은 상주하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삼세(三世)를 말하는 경우와 같다. 미래세에 존재[法相]가 있는데 이 존재가 현재세로 들어와서 과거세로 굴러 들어가면서 본래의 상(相)을 버리지 않으니, 이것은 상주하는 것이 된다. 또 원인 속에 먼저 결과가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도 상주하는 것이 된다. 만약 비존재[無]가 확정되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 비존재는 반드시 전에는 존재하다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니, 이것은 단멸하는 것이 된다. 단멸하는 것은 상속이 없는 것이다. 이 두 견해로 인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멀리하게 된다.
  [문] 왜 존재[有]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은 상주의 견해[常見]이고 비존재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은 단멸의 견해[斷見]인가?
  
  [답]만약 법에 확정된 자성이 있어서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는다면 상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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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것이고
   전에는 존재하다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면 단멸하는 것이네. (11)
  
  만약 법에 자성이 있다면 이것은 존재[有相]이지 비존재[無相]가 아니니, 결코 비존재[無]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법에 자성이) 없다면 존재[有]가 아니니, 비존재[無法]일 것이다. 앞에서 이미 과실을 말했기 때문에, 그렇다면2) 상주의 견해에 떨어지게 된다. 만약 법이 전에는 존재하다가 괴멸해서 비존재가 되었다면 이것은 단멸하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존재는 비존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존재와 비존재는 각각 확정된 상[定相]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만약 단멸의 견해나 상주의 견해를 갖는다면, 죄나 복 등이 없게 되어 세간의 일들을 파괴하게 된다. 그러므로 버려야 한다.
  16. 계박과 해탈을 관찰하는 장[觀縛解品] 10偈
  [문] 생사에는 결코 근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생사를 중생은 윤회한다. 모든 행(行)이 윤회하는데, 그대는 무슨 이유로 중생과 모든 행이 모두 공해서 윤회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는가?
  
  [답]모든 행(行)이 윤회한다면 상주하는 것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고
   무상한 것이 윤회하는 것도 아니네. 중생도 그러하네. (1)
  
  행들이 6도(道)의 생사를 윤회한다면 상주하는 것[常相]이 윤회하는가, 무상한 것[無常相]이 윤회하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만약 상주하는 것이 윤회한다면 생사의 상속(相續)이 없을 것이다.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고 자성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무상한 것이 윤회한다면 또한 생사를 윤회하는 상속이 없을 것이다.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2) ‘만약 법에 자성이 있다고 말한다면’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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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중생이 윤회한다면 또한 이와 같은 과실이 있다.
  
  만약 중생이 윤회한다면 온(蘊)ㆍ계(界)ㆍ처(處)들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모두 존재하지 않네. 누가 윤회하는 자이겠는가? (2)
  
  또 생사와 온ㆍ계ㆍ처는 동일한 의미이다. 만약 중생이 이 온ㆍ계ㆍ처에서 윤회한다고 한다면, 이 중생은 「불과 장작을 관찰하는 장[觀燃可燃品]」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었다.
  누가 온ㆍ계ㆍ처에서 윤회한다고 하겠는가?
  
  만약 몸에서 몸으로 윤회한다면 몸에 없는 것이리라.
  만약 몸이 없다면 윤회하지 않을 것이네. (3)
  
  또 만약 중생이 윤회한다면 몸을 갖고서 윤회하는가, 몸을 갖지 않고서 윤회하는가?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몸을 갖고서 윤회한다면 한 몸에서 다른 한 몸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회하는 자는 몸이 없을 것이다. 또 만약 이전에 이미 몸이 있었다면 다시 한 몸에서 다른 한 몸으로 가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이전에 몸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생사를 윤회하겠는가?
  [문] 경전에서는 “열반은 모든 고(苦)를 소멸시킨다. 이 소멸은 행(行)들의 소멸이거나 중생의 소멸일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답]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모든 행(行)이 소멸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결코 옳지 않네.
  만약 중생이 소멸한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4)
  
  만약 그대가 모든 행의 소멸이나 중생의 소멸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이미 앞에서 답한 바 있다. 모든 행에는 자성이 없다. 중생도 여러 가지로 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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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도 생사를 윤회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행도 소멸하지 않고 중생도 소멸하지 않는다.
  [문] 만약 그렇다면 계박되지 않고 해탈하지 않을 것이다. 근본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답]모든 행(行)은 발생과 소멸의 상(相)을 띠고 있어서 계박되지도 해탈하지도 않네.
   중생 또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계박되지도 해탈하지도 않네. (5)
  
  그대가 모든 행과 중생이 계박되고 해탈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모든 행은 찰나찰나 발생해서 소멸하기 때문에 계박되고 해탈하지 않는다. 중생은 앞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계박되고 해탈하겠는가?
  
  만약 몸[身]을 계박이라 한다면 몸이 있는 것은 계박되지 않을 것이고
  몸이 없는 것도 계박되지 않을 것이네. 어떤 것에 계박이 있겠는가? (6)
  
  또 만약 5온(蘊)의 몸[身]을 계박(繫縛)이라 한다면, 중생이 이전에 5온이 있을 때는 계박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한 사람에게 두 몸이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몸이 없다면 또한 계박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몸이 없다면 5온이 없고 5온이 없다면 공하다. 그러니 어떻게 계박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세 번째 것3)은 계박되는 일이 없다.
  만약 계박될 것에 앞서 계박하는 것이 있다면 계박될 것을 계박하게 될 것이네.
  앞서 계박이 있지 않다. 그 밖의 것은 감과 옴에서 답한 대로이다. (7)
  
  또 만약 계박될 것[可縛]에 앞서 계박하는 것[縛]이 있다면 계박될 것을 계
  
  
3) 5온(蘊)의 몸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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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계박될 것을 떠나 앞서 계박하는 것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중생에게 계박하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이는 중생이 ‘계박될 것’이고 5온이 ‘계박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이는 5온 중의 번뇌들이 ‘계박하는 것’이고 나머지 5온은 ‘계박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5온을 떠나 앞서 중생이 있다면 5온이 중생을 계박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5온을 떠나 별도로 중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5온을 떠나 별도로 번뇌가 있다면 번뇌가 5온을 계박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5온을 떠나 별도로 번뇌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감과 옴을 관찰하는 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미 간 것을 가지 않고, 아직 가지 않은 것을 가지 않고, 지금 가고 있는 것을 가지 않는다. 이렇듯이 아직 계박되지 않은 것을 계박하지 않고, 이미 계박된 것을 계박하지 않고, 지금 계박되고 있는 것을 계박하지 않는다.
  또 역시 해탈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계박된 자는 해탈하지 않네. 계박되지 않은 자도 해탈하지 않네.
  지금 계박되고 있는 자가 해탈한다면 계박과 해탈이 동시일 것이네. (8)
  
  계박된 자는 해탈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미 계박되었기 때문이다. 계박되지 않은 자도 해탈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계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지금 계박되고 있는 자가 해탈한다고 말한다면 계박과 해탈이 동시일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또 계박과 해탈은 모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 도(道)를 닦아서 현재에 열반에 들어가서 해탈을 얻은 자가 있다. 그런데 왜 없다고 말하는가?
  
  [답]“법들에 취착하지 않는다면 나는 열반을 얻을 것이다.”
   만약 어떤 자가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다시 취착에 계박될 것이네. (9)
  
  만약 어떤 자가 “나는 취착을 여의었으니 열반을 얻을 것이다”고 이와 같은 생각한다면, 이 자는 취착에 계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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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사를 떠나서 별도로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니네.
  실상(實相)의 이치가 이와 같은데 어찌 분별하겠는가? (10)
  
  모든 법의 실상(實相)인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생사를 떠나 별도로 열반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경전에서는 “열반이 생사이고 생사가 열반이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법들의 실상에서 어떻게 ‘이것이 생사이다’, ‘이것이 열반이다’ 하고 말하겠는가?
  17. 업을 관찰하는 장[觀業品] 33偈
  [문] 그대가 비록 여러 가지로 법(法)들을 타파했지만, 업(業)은 확정되어 존재한다. 그래서 모든 중생이 과보를 받게 만든다. 경전에서 “모든 중생은 다 업대로 태어난다. 악한 자는 지옥에 들어가고, 복을 닦은 자는 천계에 태어나고, 도(道)를 수행하는 자는 열반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법들은 공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업이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다스려 잡을 수 있고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다면
  이것을 자선(慈善)이라 하네. 2세(世)의 과보의 씨앗이네. (1)
  
  사람에게는 3독(毒)4)이 있다. 타인을 뇌란(惱亂)하게 하기 위해서 일어난다. 선을 행하는 자는 먼저 스스로 악을 소멸시킨다. 그러므로 “자기 마음을 다스려 잡고 타인을 이롭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타인을 이롭게 한다”란,보시ㆍ지계ㆍ인욕 등을 행해서 타인을 뇌란하게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타인을 이롭게 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자선(慈善)과 복덕(福德)이라고도 하고 금세와 후세의 즐거운 과보의 씨앗이라고도 한다.
  
  
4) 탐욕[貪]ㆍ증오[瞋]ㆍ무지[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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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성인께서 두 업(業), 즉 사(思)와 사(思)에서 생긴 것을 말씀하셨네.
  이 업의 종류를 여러 가지로 구별해서 말씀하셨네. (2)
  
  또 위대한 성인께서는 업에는 크게 보아 두 종류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는 사(思)이고 또 하나는 사(思)에서 생긴 것이다.
  이 두 업을 아비달마에서 어떻게 상술하는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思)란 이른바 의업(意業)이네.
  사(思)에서 생긴 것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네. (3)
  
  사(思)는 심소법(心所法)이다. 심소법들 중에서 ‘능동적인 일어남[能發起]’에는 지음[所作]이 있기 때문에 업(業)이라 하는 것이다. 이 사(思)에 의존해서 바깥의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 일어난다. 그 밖의 심법(心法)과 심소법에도 지음[所作]이 있지만 오직 사(思)만이 지음[所作]의 근본이기 때문에 사(思)를 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제 이 업의 특성을 설명하겠다.
  
  신업과 구업, 작업(作業)과 무작업(無作業),
  이 넷에는 선(善)도 있고 불선(不善)도 있네. (4)
  
  향유하는 데서 생기는 복(福)과 죄(罪)도 이와 같네.
  그리고 사(思)가 일곱째가 되네. 업의 특성을 밝힌 것이네. (5)
  
  구업(口業)이란 네 가지 구업이다. 신업(身業)이란 세 가지 신업이다. 이 일곱 가지 업에는 두 종류의 구별이 있다. 작업(作業)과 무작업(無作業)이다. 지금 짓고 있을 때의 것을 작업(作業)5)이라고 하고, 짓고 난 후에도 항상 좇
  
  
5) 표업(表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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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다니며 일어나는 것을 무작업(無作業)6)이라고 한다. 이 두 종류에는 선(善)과 불선(不善)이 있다. 불선이란 악을 그치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선이란 악을 그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또 향유[用]하는 데서 생기는 복(福)이 있다. 예를 들어 베푸는 자가 받는 자에게 베풀 때 만약 받는 자가 받아서 향유[受用]한다면 베푸는 자는 두 종류의 복을 얻는다. 하나는 베풂에서 생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받는 자가) 향유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마치 어떤 사람이 화살로 다른 사람을 쏠 경우 만약 화살로 다른 사람을 죽인다면 두 종류의 죄가 있게 된다. 하나는 (화살을) 쏨에서 생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죽임에서 생기는 것이다. 만약 쏘긴 했으나 죽이지 않았다면 쏜 사람은 쏜 죄를 얻을 뿐이지 죽인 죄는 없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죄와 복은 향유하는 데서 생긴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여섯 종류의 업7)이라고 한다. 일곱째는 사(思)라 한다. 이 일곱 종류는 업의 특성을 구별한 것이다. 이 업은 금세와 후세의 과보를 갖는다. 그러므로 업이 확정되어 존재하고 과보가 확정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법들은 공하지 않다.
  
  [답]만약 업(業)이 과보(果報)를 받을 때까지 머문다면 이 업은 상주하는 것이 되리라.
   만약 소멸한 것이라면 업이 없는데 어떻게 과보를 낳겠는가? (6)
  
  만약 업이 과보를 받을 때까지 머문다면 이것은 상주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업은 발생해서 소멸하는 것이어서 한 찰나도 머물지 않는데 어떻게 과보를 받을 때까지 머물겠는가? 만약 업은 소멸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소멸한 것은 무(無)이다. 그런데 어떻게 과보를 낳겠는가?
  
  [문]예컨대 싹 등의 상속(相續)은 모두 씨로부터 생기고
   이것에서 열매[果]가 생기네. 씨가 없다면 상속이 없네. (7)
  
  
6) 무표업(無表業).
7) 작업(作業)과 부작업(不作業), 선(善)과 불선(不善), 죄(罪)와 복(福)의 여섯 가11지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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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로부터 (싹 등의) 상속이 있고 (싹 등의) 상속으로부터 열매가 있으니
   씨를 앞으로 해서 뒤에 열매가 있는 것이므로 (씨와 열매는) 단멸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네. (8)
  
   이렇듯이 최초의 마음[心]으로부터 마음[心法]의 상속이 생기고
   이것으로부터 과보가 있네. 마음이 없다면 (마음의) 상속이 없네. (9)
  
   마음으로부터 (마음의) 상속이 있고 상속으로부터 과보(果報)가 있으니
   업(業)을 앞으로 하고 뒤에 과보가 있는 것이므로 단멸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네. (10)
  
  예를 들어 곡식의 씨로부터 싹이 있고 싹으로부터 줄기와 잎 등의 상속(相續)이 있고 이 상속으로부터 열매[果]가 생긴다. 씨가 없으면 상속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곡식의 씨로부터 상속이 있고 상속으로부터 열매[果]가 있는 것이다. 씨를 앞으로 해서 뒤에 열매가 있다. 그러므로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 곡식의 씨의 비유와 같이 업(業)의 과보(果報)도 이와 같다. 최초의 마음[心]이 죄와 복을 일으키는 것이 마치 곡식의 씨가 열매를 낳는 것과 같다. 이 마음이 원인이 되어서 그 밖의 심법과 심소법의 상속이 생기고 나아가 과보가 생긴다. 업을 앞으로 하고 과보를 뒤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 만약 업이 없이 과보가 있다면 단멸함과 상주함이 있는 것이다.
  이 선업의 인연과 과보란, 이른바 다음과 같다.
  
  복(福)을 성취하는 것은 10백업도(白業道)이네.
  2세(世)의 5욕락(欲樂)8)은 깨끗한 업[白業]의 과보이네. (11)
  
  
8) 色(색)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다섯 경계를 향략(享樂)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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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끗한[白]’이란, 선하고 청정한 것이다. ‘복의 인연을 성취하는 것’이란 이 10백업도(白業道)9)에 의지해서 살생하지 않고[不殺] 도둑질하지 않고[不盜] 그릇된 성관계를 하지 않고[不邪婬] 거짓말하지 않고[不妄語] 이간질하지 않고[不兩舌] 욕하지 않고[不惡口] 꾸미는 말을 하지 않고[不無益語] 질투하지 않고[不嫉] 증오하지 않고[不恚] 그릇되게 보지 않는 것[不邪見]이다. 이것을 선(善)10)이라 한다. 몸[身]과 말[口]과 생각[意]으로부터 이 과보가 생기는 자는 금세에 명예와 이득을 얻고 후세에 천계나 인간계의 귀한 곳에 태어난다. 보시나 공경(恭敬) 등에는 여러 가지 복[福德]이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10선도(善道)에 들어가는 것이다.
  
  [답]만약 그대처럼 분별한다면 그 과실이 매우 클 것이네.
   그러니 그대가 말한 것은 옳지 않네. (12)
  
  만약 업과 과보가 상속하기 때문에 곡식을 비유로 삼은 것이라면 그 과실이 매우 크다. 그러나 이것11)에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대가 곡식의 비유를 말한다면 이 비유는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곡식은 만질 수 있고 형체가 있어서 상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이 점을 생각해 보니 이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물며 마음[心]과 업(業)과 같이 만질 수 없고 형체가 없으며 볼 수 없는 것이랴? 발생하고 소멸하기에 머묾이 없는 것인데 상속(相續)을 바란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또 곡식의 씨로부터 상속이 있다고 한다면 소멸하고 난 후에 상속하는 것인가,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하는 것인가? 만약 곡식의 씨가 소멸하고 난 후에 상속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리라. 만약 곡식의 씨가 소멸하지 않고서 상속한다면 이 곡식의 씨에서 항상 곡식이 생기리라. 만약 이와 같다면 한 톨의 곡식의 씨가 모든 세간의 곡식
  
  
9) 10선업도(善業道) 또는 10선도(善道)라고도 한다.
10) 10선(善)이다.
11) 바로 앞의 게송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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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생기게 할 것이니 이것도 옳지 않다. 그러므로 업과 과보가 상속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문]이제 다시 부처님들과 벽지불들과 성자들이 찬탄한
   업(業)과 과보(果報)에 부합하는 이치를 설명하겠네. (13)
  
  이른바 다음 게송과 같다.
  
  망실되지 않는 법(法)은 채권과 같고 업(業)은 빚진 재물과 같네.
  이것의 성품은 무기(無記)이고 분별하면 네 종류가 있네. (14)
  
  4제(諦)를 봄으로써 끊어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사유(思惟)함으로써 끊어지는 것이네.
  이 망실되지 않는 법 때문에 모든 업들에는 과보가 있네. (15)
  
  만약 4제를 봄으로써 끊어지고 업이 서로 유사하게 이전(移轉)한다면
  업을 파괴하는 따위와 같은 과실이 있게 되네. (16)
  
  모든 업은 서로 유사하든 유사하지 않든
  한 계(界)에서 최초로 몸을 받을 때 그 때 과보가 홀로 발생하네. (17)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업은 현세에 과보를 받네.
  어떤 이는 과보를 받고 난 후에도 업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하네. (18)
  
  과보를 넘어서고 난 후에 소멸하거나 죽고 난 후에 소멸하네.
  이것에 있어서 유루(有漏)와 무루(無漏)를 구별하네. (19)
  
  망실되지 않는 법[不失法]은 채권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업(業)은 취한 물건과 같다. 이 망실되지 않는 법은 욕계(欲界)에 매여 있는 것이든가, 색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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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色界)에 매여 있는 것이든가, 무색계(無色界)에 매여 있는 것이든가, 아무 계(界)에도 매여 있지 않는 것이든가이다. 선ㆍ악ㆍ무기(無記) 중에서 어느 것인가 구별해 보면 이것은 무기일 따름이다. 이 무기의 의미는 아비달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12)
  4제를 봄으로써 끊어지는 것[見諦所斷]13)이 아니다. 한 과보에서 다른 한 과보에 이르는 도중에 사유(思惟)함으로써 끊어지는 것[思惟所斷]14)이다. 그러므로 모든 업들에는 망실되지 않는 법 때문에 과보가 발생한다.15)
  만약 4제(諦)를 봄으로써 끊어지고 업이 서로 유사하게 이전(移轉)한다고 한다면 업(業)을 파괴하는 과실을 얻게 된다. 이것은 아비달마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16)
  또 망실되지 않는 법이란, 󰠏�󰠏�󰠏�한 계(界)에서 모든 업이 서로 유사하든 유사하지 않든 최초로 몸을 받을 때 과보가 홀로 발생한다.17)
  현재의 몸에 있어서 업에서 다시 업이 발생한다. 이 업에는 두 종류가 있다. 무거움에 따라서 과보를 받는다. 어떤 이는 “이 업은 과보를 받고 난 후에도 업이 여전히 남아 있다. 찰나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 말한다.18)
  ‘(망실되지 않는 법이) 과보를 넘어서고 난 후나 죽고 난 후에 소멸하네’란, 수다원(須陀洹) 등은 과보를 넘어서고 난 후에 (망실되지 않는 법이) 소멸하고, 모든 범부와 아라한은 죽고 난 후에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있어서 유루와 무루를 구별하네’란, 수다원 등의 모든 성인들에서 유루와 무루 등을 구별한다는 것이다.19)
  [답] 이 주장들은 모두 단멸과 상주의 과실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또
  
  
12) 이상은 게송 13을 풀이한 것이다.
13) 견도(見道)에서 끊어지는 것이라는 견도소단(見道所斷)과 같은 의미이다.
14) 수도(修道)에서 끊어지는 것이라는 수도소단(修道所斷)과 같은 의미이다.
15) 이상은 게송 14를 풀이한 것이다.
16) 이상 게송 16를 풀이한 것이다.
17) 이상 게송 17를 풀이한 것이다.
18) 이상 게송 18를 풀이한 것이다.
19) 이상 게송 19를 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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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인정할 수 없다.
  [문] 만약 그렇다면 업과 과보가 없는 것이 되리라.
  
  [답]공하다 해도 단멸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한다 해도 상주하는 것이 아니네.
   업과 과보의 망실되지 않는 법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네. (20)
  
  이 논서에서 말하는 이치는 단멸함과 상주함를 떠난 것이다. 왜 그러한가? 업(業)은 완전히 공해서 적멸해 있기 때문이다.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떤 법이 단멸할 수 있고 어떤 법이 망실될 수 있겠는가? 전도(顚倒) 때문에 생사를 윤회하는 것이다. 또한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약 법이 전도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이것은 허망해서 진실이 없는 것이다. 진실이 없으니 상주하는 것이 아니다. 또 전도를 탐착(貪著)해서 실상(實相)을 알지 못하기에 “업의 망실되지 않는 법 이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네” 하고 (게송에서) 말한 것이다.
  
  모든 업은 본래 발생하지 않네. 확정된 자성이 없기 때문이네.
  모든 업은 소멸하지도 않네.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네. (21)
  
  만약 업에 자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상주하는 것이네.
  짓지 않은 것도 업(業)이네. 상주하는 것은 짓지 못하네. (22)
  
  만약 짓지 않은 업이 존재한다면 짓지 않았는데도 죄가 있게 되고
  범행을 끊지 않았는데도 청정하지 못하다는 과실이 있게 되네. (23)
  
  그렇다면 모든 세간 언설의 법을 파괴하게 되네.
  또한 죄를 짓는 것과 복을 짓는 것의 차별이 없어지게 되네. (24)
  만약 업이 확정되어 있어서 자체에 자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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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보를 받고 난 후에 다시 받게 될 것이네. (25)
  
  만약 모든 세간의 업이 번뇌에서 발생한다고 한다면
  이 번뇌가 실체가 없는데 업에 어떻게 실체가 있겠는가? (26)
  
  또 제일의(第一義)에서 모든 업(業)은 발생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발생하지 않기에 소멸하지 않는다. 상주하기에 소멸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20)
  그렇지 않다면 업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할 것이다. 만약 업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이는 상주하는 것이다. 상주하는 것이라면 업을 짓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상주하는 법은 (무엇이든) 짓지 못하기 때문이다.21)
  또 만약 짓지 않은 업이 존재한다면 다른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도 이 사람이 과보를 받게 되고, 또 다른 사람이 범행(梵行)22)을 끊었는데도 이 사람이 죄가 있게 되어 세속의 법을 파괴하게 된다. 만약 먼저 존재한다고 한다면 겨울이 봄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봄이 여름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등 이와 같은 과실들이 있게 될 것이다. 또 복을 짓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의 차이가 없게 될 것이다. 보시나 지계 등의 업을 일으키는 것을 복을 짓는 것이라고 하고 살생이나 도둑질 등의 업을 일으키는 것을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짓지 않았는데도 업이 존재한다면 구별이 없게 될 것이다.23)
  만약 업이 확정되어 있어서 자성이 존재한다면 일시에 과보를 받고 난 후에 또 다시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망실되지 않는 법이기 때문에 과보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와 같은 과실들이 있게 된다.24)
  또 만약 업이 번뇌로부터 발생한다고 한다면 이 번뇌는 확정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로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모
  
  
20) 이상 게송 21를 풀이한 것이다.
21) 이상 게송 22를 풀이한 것이다.
22) 청정행(淸淨行)으로 음욕(婬欲)을 끊는 행위 등을 뜻한다.
23) 이상 게송 23과 24를 풀이한 것이다.
24) 이상 게송 25를 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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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든 번뇌가 실체가 없는데 업이 어떻게 실체가 있겠는가? 왜냐 하면, 자성이 없는 것에 의존하기에 업도 또한 자성이 없는 것이 때문이다.25)
  [문] 모든 번뇌와 업이 자성이 없고 실체가 없다고 하는데 금세의 과보의 몸이 지금 분명히 존재하니 실체가 있는 것이다.
  
  [답]모든 번뇌와 업은 몸[身]의 인연이라고 말씀하시네.
   모든 번뇌와 업이 공한데 하물며 모든 몸이랴? (27)
  
  모든 성인들께서 번뇌와 업은 몸의 인연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중에서 갈애(渴愛)가 능히 생(生)을 윤택하게 하고 업(業)이 능히 상(上)과 중(中)과 하(下)나 아름답고 추하거나 귀하고 천한 따위의 과보를 생기게 한다. 이제 모든 번뇌와 업은 여러 가지로 구해 보아도 확정된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모든 몸에게 확정된 것이 존재하겠는가? 과보는 인연을 따르기 때문이다.
  [문] 그대가 비록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업과 과보를 타파했지만 경전에서 곧 “업을 일으키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업을 일으키는 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업이 존재하고 과보가 존재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명에 덮여 있고 갈애에 묶여 있으니
  본래의 지은 자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네. (28)
  
   『무시경(無始經)』에서는 “중생은 무명에 덮여 있고 갈애의 결(結)26)에 묶여 있어서 무시의 생사를 윤회하며 여러 가지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업보를) 받는 자는 앞서 지은 자와 같지도 않고 다르지 않다. 만약 (업보를 받는) 바로 그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소의 형체를 받는다고 한다면, (답한다) 사람은 소가 되지 않고 소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만약
  
  
25) 이상 게송 26를 풀이한 것이다.
26) 중생을 미혹의 경계에 결박한다는 뜻이다. 번뇌의 다른 이름이며 결사(結使)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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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르다고 한다면, 업과 과보를 상실하게 되어 원인이 없다는 견해에 떨어진다. 원인이 없다면 단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받는 자는 앞서 지은 자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답]업은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연 아닌 것에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네.
   그러므로 업을 일으키는 자는 있지 않네. (29)
  
   업도 있지 않고 (업을) 짓는 자도 있지 않은데 어떻게 업이 과보를 생기게 하겠는가?
   과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과보를 받는 자가 있겠는가? (30)
  
  업도 있지 않고 업을 짓는 자도 있지 않은데 어떻게 업에서 과보가 생기겠는가? 과보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과보를 받는 자가 있겠는가? 업에는 세 종류가 있다. 5온(蘊)에 임시로 사람이란 이름을 붙여 짓는 자[作者]라고 하는 것이다. 이 업이 선처(善處)나 악처(惡處)를 생기게 하는데, 이것을 과보라 한다. 업을 일으키는 자도 없는데 하물며 업이 있고 과보가 있고 업을 일으키는 자가 있겠는가?
  [문] 그대가 비록 여러 가지로 업ㆍ과보ㆍ업을 일으키는 자를 타파했지만 지금 분명히 중생이 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것이 보인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답]마치 세존께서 신통력으로 만들어 낸 화인(化人)이 있고
   이 화인이 다시 화인을 화작(化作)해 내는 것과 같네. (31)
  
   마치 처음의 화인이 짓는 자이고
   화인이 만들어 낸 것이 업(業)인 것과 같네. (32)
  
   모든 번뇌와 업, 짓는 자와 과보는
   모두 환영이나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고 메아리와 같네.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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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치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만들어 낸 화인(化人)이 있고 이 화인이 다시 화인을 화작(化作)해 내는 것과 같다. 마치 화인이 실체가 없고 단지 눈에 보이기만 하는 것과 같다. 또 화인은 입으로 설법을 행하고 몸으로 보시 따위를 행하는데 이 행위[業]들은 실체가 없지만 눈에 보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태어나고 죽는 몸의 짓는 자와 업도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27)
  모든 번뇌란 3독(毒)을 말한다. 자세히 나누어 말하면 98사(九十八使),28) 9결(九結)29), 10전(十纏)30), 6구(六垢)31) 따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들이 있다. 업이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을 말한다. 금세와 후세에 의거해서 구별하면, 선과 불선과 무기, 고보(苦報)와 낙보(樂報)와 불고불락보(不苦不樂報), 현보업(現報業)32)과 생보업(生報業)33)과 후보업(後報業)34)이 있다. 이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짓는 자[作者]들을 모든 번뇌와 업을 일으키고 과보를 받는 자라고 한다. 과보란 선업이나 악업에서 무기의 5온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업들은 다 공해서 자성이 없으니 마치 환영과 같고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고 메아리와 같다.35)
  
  
27) 이상 게송 31ㆍ32를 풀이한 것이다.
28) 98수면(睡眠)이라고도 한다. 번뇌들의 근본인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의 10수면(睡眠)을 3계(界)의 5부(部)에 배당한 것이다. 3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이고 5부는 고제, 집제, 멸제, 도제의 4제(諦)와 수도(修道)를 합한 것이다. 결국 98수면은 88견혹(見惑)과 10수혹(修惑)를 말한다.
29) 애(愛)ㆍ에(恚)ㆍ만(慢)ㆍ무명(無明)ㆍ견(見)ㆍ취(取)ㆍ의(疑)ㆍ질(嫉)ㆍ간(慳) 등이다. 이는 여섯 근본번뇌에다 질(嫉)과 간(慳)을 더한 것이다. 탐(貪)ㆍ진(瞋)ㆍ치(癡)ㆍ만(慢)ㆍ의(疑)ㆍ악견(惡見)이 여섯 근본번뇌인데 이 가운데 악견을 다섯으로 나누어 신견(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은 견결(見結)이라 하고 견취견(見取見)과 계금취견(戒禁取見)은 취결(取結)이라 하기 때문에 일곱이 되는 것이다.
30) 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질(嫉)ㆍ간(慳)ㆍ회(悔)ㆍ수면(睡眠)ㆍ도거(掉擧)ㆍ혼침(惛沈)ㆍ분(忿)ㆍ부(覆)의 10수번뇌(隨煩惱)이다.
31) 뇌(惱)ㆍ해(害)ㆍ한(恨)ㆍ첨(諂)ㆍ광(誑)ㆍ교(憍)의 6수번뇌이다.
32) 금생(今生)에 과보를 받게 하는 업이다.
33) 바로 다음 생(生)에 과보를 받게 하는 업이다.
34) 다음 생 이후의 생에 과보를 받게 하는 업이다.
35) 이상 게송 33을 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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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법을 관찰하는 장[觀法品] 12偈
  [문] 만약 모든 법이 완전히 공하고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면 이것을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모든 법의 실상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답] ‘나[我]’와 ‘나의 것[我所]’에 대한 집착을 없앴기 때문에 모든 법들이 공(空)하고 무아(無我)인 지혜를 얻는다. 이것을 (모든 법의 실상에) 들어간다고 한다.
  [문] 어떻게 모든 법들이 무아라는 것을 아는가?
  
  [답]만약 ‘나’(我)가 곧 5온이라면 ‘나’는 생멸하는 것이리라.
   만약 ‘나’가 5온과 다르다면 5온의 상(相)을 갖는 것이 아니리라. (1)
  
   ‘나’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나의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와 ‘나의 것’을 소멸시켜서 무아의 지혜를 얻는다고 하네. (2)
  
   무아의 지혜를 얻은 사람은 진실을 보네.
   무아의 지혜를 얻은 사람은 드무네. (3)
   안이든 바깥이든 ‘나’와 ‘나의 것’이 모두 소멸해서 있지 않으니
   취착[受]들이 소멸하게 되네. 취착이 소멸하니 몸도 소멸하네. (4)
  
   업과 번뇌가 소멸했으니 이를 해탈이라 하네.
   업과 번뇌는 실재하지 않네. 공성에 들어가면 희론이 소멸하네. (5)
  
   모든 부처님께서는 ‘나가 있다’고도 말씀하시고 ‘나가 없다’고도 말씀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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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법들의 실상(實相)에서는 ‘나가 있다’고도 ‘나가 없다’고도 말씀하시지 않네. (6)
  
  모든 법들의 실상에는 마음의 작용과 언설이 끊어져 있네.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아 적멸해서 열반과 같네. (7)
  
  모든 것은 진실이다, 진실이 아니다,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네. (8)
  
  스스로 아는 것이기에 다른 것을 따르지 않으며, 적멸해 있고, 희론이 없으며,
  수다한 것이 없고, 분별이 없는 것, 이것을 실상이라고 하네. (9)
  
  만약 어떤 법이 연에서 발생했다면 연과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네.
  그러므로 실상은 단멸하는 것도 상주하는 것도 아니네. (10)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단멸하는 것도 아니네.
  이것을 모든 세존들의 교화(敎化)의 감로의 맛이라 하네. (11)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아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모든 벽지불들의 지혜가 세속을 멀리함으로부터 나오네. (12)
  
  어떤 이들은 ‘나[神]’36)가 있다고 말한다. (이 ‘나’는)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36) 원문의 신(神)은 아뜨만(ātman)를 한역한 것이다. 아(我)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말이기에 ‘나’로 번역했다.
[111 / 187] 쪽
  5온이 곧 ‘나’이든가 5온을 떠나 ‘나’가 있든가이다. 만약 5온이 곧 ‘나’라면 ‘나’는 생멸의 상(相)을 띨 것이다. 게송에서 “만약 ‘나’가 곧 5온이라면 생멸의 상을 띨 것이네” 하고 말한 바와 같다. 왜 그러한가? 발생하고서 괴멸하는 것이니 생멸의 상을 띠기 때문이다. 5온은 무상하다. 5온이 무상한 것과 같이 발생과 소멸 두 법도 또한 무상하다. 왜 그러한가? 발생과 소멸도 또한 발생하고서 괴멸하는 것이니 무상하다. 만약 ‘나’가 곧 5온이라면, 5온이 무상하기에 나도 또한 무상해서 생멸의 상을 띨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5온을 떠나 ‘나’가 있다면 나는 5온의 상(相)을 띠지 않을 것이다. 게송에서 “만약 ‘나’가 5온과 다르다면 5온의 상을 띠지 않을 것이네” 하고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5온을 떠나 다시 법(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5온을 떠나 법이 있다면 어떤 상(相)의 어떤 법이 있겠는가? 만약 ‘나’가 허공과 같아서 5온을 떠나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6계(界)를 타파하는 장」37)에서 이미 타파되었다. 허공은 법이 있지 않은 것이기에 허공이라 한다. 만약 믿을 수 있기에 ‘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믿을 수 있는 것에는 네 종류가 있다. 첫째, 감관에 지각되는 것[現事]은 믿을 수 있다. 둘째, 추리[比知]는 믿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연기를 보고 불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셋째, 비유(譬喩)는 믿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 구리[鍮石]가 없을 때 그것을 금과 같다고 비유하는 것이다. 넷째,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기에 믿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인께서) 지옥이 있고 천계가 있고 울단왈(鬱單曰)38)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보지 않은 사람은 성인의 말씀을 믿기에 아는 것이다.39) 이 ‘나’는 모든 믿을 수 있는 것에서 얻을 수 없다. 감관[根]에 지각되는 것에도 없고 추리되는 것에도 없다. 왜 그러한가? 추리란 이전에 본 것이기 때문에 후에 추량해서 아는
  
  
37) 제5 「6계를 관찰하는 장[觀六種品]」을 가리킨다.
38) 범어 uttara󰠏�kura의 음역으로 수미산 4대주(大洲)의 하나이며 북쪽에 위치한다. 북구로(北拘盧)라고도 한다.
39) 이상 네 종류의 믿을 수 있는 것을 순서대로 현량(現量)ㆍ비량(比量)ㆍ비유량(譬喩量)ㆍ성언량[聖言量]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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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전에 불에 연기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후에 연기만을 보고서도 불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누가 이전에 ‘나’와 5온이 합해 있는 것을 보고서 후에 5온을 보고서 ‘나’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인가?
  만약 세 종류의 추리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첫째는 전에 본 대로 아는 추리[如本]이고, 둘째는 남아 있는 것을 아는 추리[如殘]이고, 셋째는 공통점을 보아서 아는 추리[共見]이다. ‘전에 본 대로 아는 추리’[如本]란, 이전에 불에 연기가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지금 연기를 볼 때 전에 본 대로(如本) 불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을 아는 추리’[如殘]란, 예를 들어 밥을 지을 때 쌀 한 톨이 익었어도 남은 것들이 모두 익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공통점을 보아서 아는 추리’[共見]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 곳에서 가서 저 곳에 다다르는 것이 눈에 보일 때 그 가는 것(去)도 보이듯이, 태양도 그러해서 동쪽에서 나와 서쪽에 다다를 때 가는 것이 보이지 않더라도 사람에게 가는 것[去相]이 있기 때문에 태양도 간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괴로움과 즐거움, 미움과 사랑, 지각[覺]과 인식[知] 등도 의지하는 곳이 있어야 한다. 마치 백성을 볼 때 (그들이) 반드시 왕에게 의지하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공통점을 보아서 아는 추리[共相]에서 생기는 믿음은, 이전에 사람과 가는 것[去法]이 합해서 다른 곳에 다다르는 것을 보고서 후에 태양이 다른 곳에 다다르기에 (태양에) 가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전에 5온과 ‘나’가 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후에 5온을 보고서 ‘나’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공통점을 보아서 아는 추리[共相比知]에 의거해서도 ‘나’가 있지 않다. 성인의 말씀에 의거해서도 ‘나’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성인의 말씀은 모두 전에 눈으로 본 것을 후에 말씀하신 것이다. 또 성인들께서 하시는 다른 말씀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옥 따위를 말씀하셔도 믿을 수 있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전에 ‘나[神]’를 보고서 후에 말씀하시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믿을 수 있는 것 등 믿을 수 있는 것 중에서 ‘나’를 구할 수 없다. ‘나’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5온을 떠나 별도로 ‘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근(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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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파하는 장」40)에서 봄ㆍ보는 자ㆍ봄의 대상이 타파되었기에 ‘나’도 또한 같은 방식으로 타파된다. 또 눈에 보이는 거치른 법[鹿法]도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허망한 기억과 표상 따위에 의해 존재하는 ‘나[神]’이랴? 그러므로 ‘나[我]’가 없다는 것을 안다.41)
  ‘나[我]’가 있기에 ‘나의 것[我所]’이 있는 것이다. 만약 ‘나’가 없다면 ‘나의 것’이 없을 것이다. 8성도(聖道)의 분지를 수습(修習)해서 ‘나’와 ‘나의 것’의 인연을 소멸시켜서 ‘나’가 없고 나의 것이 없는 결정적인 지혜를 얻는다.42)
  또 ‘나’가 없고 ‘나의 것’이 없는 것이란,󰠏�󰠏�󰠏�제일의제에서는 또한 얻을 수 없다. ‘나’가 없고 ‘나의 것’이 없는 사람은 모든 법들을 진실되게 볼 수 있다. 범부는 ‘나’와 ‘나의 것’이 혜안(慧眼)을 덮기에 진실을 볼 수 없다. 이제 성인은 ‘나’와 ‘나의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번뇌들이 소멸하고, 모든 번뇌들이 소멸하기 때문에 모든 법들의 실상을 볼 수 있다.43)
  안과 바깥에서 ‘나’와 ‘나의 것’이 소멸했기 때문에 취착이 소멸하고, 모든 취착이 소멸했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후세의 몸이 모두 또한 소멸한다. 이것을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 말한다.44)
  [문] 유여열반(有餘涅槃)은 무엇인가?
  [답] 모든 번뇌와 업이 소멸했기에 마음은 해탈을 얻는다고 한다. 이 모든 번뇌와 업은 다 기억과 표상의 분별에서 발생한 것이라서 실체가 없다. 모든 기억과 표상의 분별은 다 희론에서 발생한 것이다. 모든 법들의 실상인 완전한 공성을 얻으면 모든 희론이 소멸한다. 이것을 유여열반이라고 말한다.45)
  실상(實相)의 법은 이와 같다.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모든 지혜[一切智]로써 중생을 관찰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니, ‘나가 있다’고도 말씀하시고 ‘나가 없다’고도 말씀하신다. 만약 마음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
  
  
40) 제3 「6근을 관찰하는 장[觀六情品]을 가리킨다.
41) 이상 게송 1를 풀이한 것이다.
42) 이상 게송 2를 풀이한 것이다.
43) 이상 게송 3을 풀이한 것이다.
44) 이상 게송 4를 풀이한 것이다.
45) 이상 게송 5를 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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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면 아직 열반의 요소를 갖고 있지 않고 죄를 두려워할 줄 모른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나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 도(道)를 얻은 사람이라면 모든 법들이 공해서 단지 가명(假名)에 의해서만 ‘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나가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해도 과실이 없다. 또 보시나 지계 등 복덕(福德)이 있는 사람이라면 생사의 고뇌를 싫어하고 멀리하지만 열반이 영원한 소멸은 아닐까 두려워한다.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위해 ‘나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법들은 단지 인과 연들이 화합한 것일 뿐이라서 발생할 때는 공(空)하게 발생하고 소멸할 때는 공하게 소멸한다. 그러므로 ‘나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단지 가명(假名)에 의해서만 ‘나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또 도(道)를 얻은 사람은 ‘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되 단멸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가 없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해도 과실이 없다. 그래서 게송에서 “모든 부처님께서 ‘나가 있다’고도 말씀하시고 ‘나가 없다’고도 말씀하시네. 진실(眞實)에서는 ‘나가 있다’고도 ‘나가 없다’고도 말씀하시지 않네”라고 말한 것이다.
  [문] 만약 ‘나가 없다’는 것이 진실인데 단지 세속에 의해서 ‘나가 있다’고 말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나[我法]’가 타파된 것에 의존해서 ‘나가 없다’는 것이 있는 것이다. ‘나’의 확정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나가 없다’는 것이 있겠는가? 만약 ‘나가 없다’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이것은 단멸(斷滅)이고 그래서 탐착(貪著)이 발생한다. 『반야경』에서 “보살은 ‘나가 있다’고 하며 수행하는 것도 아니고 ‘나가 없다’고 하며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고 말하고 있다.46)
  [문] 만약 ‘나’ㆍ‘나’가 없음[無我]ㆍ공함ㆍ공하지 않음을 말하지 않는다면 부처님의 가르침[佛法]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 부처님은 모든 법들의 실상을 말씀하신다. 실상에는 언설의 길이 없고 마음의 작용이 소멸해 있다. 마음은 상(相)을 파악하는 연(緣)에 의해 발생하고 선세의 업의 과보로서 존재하는 것이어서 법들을 진실되게 볼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의 작용이 소멸해 있다고 말한 것이다.
  
  
46) 이상 게송 6를 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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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모든 범부들의 마음이 진실을 볼 수 없다면 성인들의 마음이 진실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모든 마음의 작용이 소멸해 있다고 말하는가?
  [답] 모든 법들의 실상이 곧 열반이다. 열반은 소멸이다. 이 소멸47)은 열반으로 향하기 때문에 소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마음이 곧 진실이라면 왜 공(空) 등의 해탈문48)을 쓰겠는가? 모든 선정 중에서 왜 멸진정을 으뜸으로 여기겠는가? 또 그리하여 마침내 무여열반으로 돌아가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마음의 작용은 다 허망한 것이고 허망한 것이기에 소멸한다. 모든 법들의 실상이란, 모든 심소법들을 일어나게 하지만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다. 적멸해 있는 것이 마치 열반과 같다.
  [문] 경전에서 “모든 법들은 본래 적멸해 있는 것이어서 곧 열반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왜 굳이 열반과 같다고 말하는가?
  [답] 법에 집착하는 자들은 법에 두 종류 즉 세간과 열반이 있다고 분별해서, 열반을 적멸이라고 말하지 세간을 적멸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 논서에서는 모든 법들이 공해서 적멸해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법에 집착하는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열반을 비유로 삼은 것이다. 열반의 특징[相]은 공하고 상(相)이 없고 적멸해 있고 희론이 없다. 모든 세간의 법들도 이와 같다.49)
  [문] 만약 부처님께서 ‘나’, ‘나가 없다’, ‘마음의 작용이 소멸해 있다’, ‘언설의 길이 끊어져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을 때는 어떻게 사람들이 모든 법들의 실상을 알게 하도록 하시는가?
  [답] 모든 부처님들께서는 무량한 방편의 힘으로 모든 법들은 확정된 상(相)이 없기에 중생을 제도하고자 어떤 때는 “모든 것이 진실이다”고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다”고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모든 것이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고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모든 것이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것
  
  
47) 마음의 작용의 소멸을 뜻한다.
48)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해탈문의 3해탈문을 말한다.
49) 이상은 게송 7를 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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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진실이다‘란,모든 법들의 진실성을 궁구해 보면 모두 제일의(第一義)의 평등하고 동일한 상(相), 말하자면 상(相)이 없는 것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마치 강물들은 색깔이 다르고 맛이 다른데 큰 바다로 들어가면 색깔도 같아지고 맛도 같아지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다’란, 모든 법들이 아직 실상(實相)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 각각을 구별해서 관찰해 보면 다 진실성이 없고 단지 연들이 화합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란,중생은 상과 중과 하 세 부류가 있어서 상급의 중생은 모든 법들의 상(相)이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고, 중급의 중생은 모든 법들의 상(相)이 모두 진실이고 모두 진실이 아니라고 관찰하며, 하급의 중생은 지혜의 힘이 얕기 때문에 모든 법들의 상(相)이 일부는 진실이고 일부는 진실이 아니라고 관찰한다는 것이다. 즉 열반은 무위법(無爲法)이라서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 진실이라고 관찰하고 생사는 유위법(有爲法)이라서 허위(虛僞)이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라고 관찰한다.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란,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는 것을 타파하기 위해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 부처님께서는 다른 곳에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非有非無]도 떠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을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가?
  [답] 다른 곳에서는 네 가지의 탐착50)을 타파하고자 말씀하셨지만 여기서는 그 4구(句)51)에 희론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도(道)를 얻는다. 그래서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2)
  [문] 부처님께서 이 4구(句)을 방편삼아 말씀하신 것은 알겠다. 또 모든 법들
  
  
50) 있는 것[有], 없는 것[無], 있는 것이면서 없는 것[亦有亦無],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非有非無]에 대한 네 가지 탐착이다.
51) 모든 것이 진실이다’, ‘모든 것이 진실이 아니다’, ‘모든 것이 진실이기도 하고 진실 아니기도 하다’, ‘모든 것이 진실인 것도 아니고 진실 아닌 것도 아니다’의 4구이다.
52) 이상 게송 8을 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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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실상을 얻은 사람을 어떤 특징을 보고 알아낼 수 있겠는가? 또 실상이란 무엇인가?
  [답] 만약 다른 것을 따르지 않는다면 (모든 법들의 실상을 얻은 사람이다.) 다른 것을 따르지 않는다란, 󰠏�󰠏�󰠏�만약 외도(外道)가 비록 신력(神力)를 나타내어 ‘이것이 도(道)이다’, ‘이것은 도(道)가 아니다’ 하고 말하더라도, 스스로 그 마음을 믿기에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 더 나아가 변신(變身)을 했을 때 비록 부처님이 아닌 줄은 알지 못하더라도 실상을 잘 요해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돌어서질 않는다. 이것에는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기에 적멸의 상이라고 한다. 적멸의 상이기에 희론에 의해 희론되지 않는다. 희론[戱論]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애론(愛論)53)이고 또 하나는 견론(見論)54)이다. 이것에는 이 두 희론이 없다. 이 두 희론이 없기에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이 없어서 다름의 상(相)이 없다. 이것을 실상(實相)이라고 한다.55)
  [문] 만약 모든 법들이 완전히 공하다면 단멸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또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면 행여 상주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답] 그렇지 않다. 앞에서 “실상에는 희론이 없으며 마음의 상이 적멸해 있고 언설의 길이 끊어져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대는 지금 탐착해서 상(相)을 취해서 실상(實相)에 있어서 단멸이나 상주를 보는 과실을 범하고 있다. 실상을 얻은 사람은 모든 법들이 연들에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원인과 같지도 않고 원인과 다르지도 않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단멸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결과가 원인과 다르다면 단멸이고, 만약 (결과가) 원인과 다르지 않다면 상주이다.56)
  [문]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하면 어떤 이익들이 있는가?
  [답] 만약 도(道)를 행하는 사람이라면 능히 이와 같은 이치를 통달한다. 즉 모든 법에 있어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음과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53) 정적(情的)인 집착을 담고 있는 언설(言說)을 말한다.
54) 지적(知的)인 집착을 담고 있는 언설(言說)을 말한다.
55) 이상 게송 9를 풀이한 것이다.
56) 이상 게송 10을 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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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 않음의 이치를 통달한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을 수 있다면, 모든 번뇌와 희론을 소멸시켜서 영원한 즐거움[常樂]의 열반을 얻는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감로의 맛으로써 교화하신다고 말한 것이다. 마치 세간에서 천계의 감로즙을 얻으면 늙고 병들고 죽는 일이 없고 쇠약해져서 괴로움을 받는 일이 없다고 말하듯이, 이 실상의 법은 진짜 감로의 맛이다.57)
  부처님께서 실상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모든 법들의 실상을 얻었기에 모든 번뇌들이 소멸했다면, 성문(聲聞)의 법이라고 한다. 만약 대비(大悲)를 내어 위 없는 마음[無上心]을 일으켰다면, 대승(大乘)의 법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시지 않아 부처님의 가르침이 존재하지 않을 때에 벽지불(辟支佛)은 (세간을) 멀리 벗어나서 지혜를 낳는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고 난 후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어 남긴 법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에, 만약 선세에 만약 도(道)를 얻게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면 ‘싫어해서 벗어나는 것[遠離]’의 인연을 다소 관찰해서 홀로 산림에 들어가 어지럽고 떠들썩함을 멀리 벗어나서 도(道)를 얻게 되는데, 이를 벽지불이라고 한다.58)
  19. 시간을 관찰하는 장[觀時品] 6偈
  [문] 시간이 존재한다.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성립한다.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고, 현재 시간에 의존해서 과거 시간과 미래 시간이 존재하고, 미래 시간에 의존해서 과거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한다. 위와 가운데와 아래, 같음과 다름 등의 법도 서로 의존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답]만약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한다면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은 과거 시간 속에 존재할 것이네. (1)
  
  
57) 이상 게송 11를 풀이한 것이다.
58) 이상 게송 12를 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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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한다면 과거 시간 속에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어떤 법은 이 어떤 법이 의존하는 법이 놓여 있는 장소에 존재한다.59)예를 들어 등불에 의존해서 밝음이 성립한다면 등불이 놓여 있는 곳에 밝음이 있는 것과 같다. 그렇듯이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한다면 과거 시간 속에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할 것이다. 만약 과거 시간 속에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한다면, 세 부류의 시간이 소진한 것을 과거 시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과거 시간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일체의 시간이 과거 시간 속에 소진했다면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없을 것이다. 과거 속에 소진했기 때문이다. 만약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거 시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과거 시간은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에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과거 시간이라 하는 것이다.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한다면, 그렇듯이 또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에 의존해서 과거 시간이 성립해야 한다. 이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지 않으니 과거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먼저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한다고 말한 것이지만,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만약 과거 시간 속에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한다고 말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과거 시간 속에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어떻게 과거 시간에 의존하겠는가? (2)
  
  만약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과거 시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59) 어떤 장소에 있는 어떤 법[甲]에 의존해서 이 법[乙]이 성립한다면 이 장소에 이 법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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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하겠는가? 왜 그러한가? 만약 세 부류의 시간이 상이하다면 서로 의존해서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물단지와 옷 따위의 사물이 각자 독립해서 성립하고 있어서 서로 의존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과거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하지 않고, 현재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과거 시간과 미래 시간이 성립하지 않고, 미래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과거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대가 앞에서 “과거 시간 속에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지 않지만 과거 시간에 의존해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한다”고 말했는데,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문] 만약 과거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서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과거 시간에 의존하지 않으면 미래 시간이 존재하지 않고
   현재 시간도 존재하지 않네. 그러니 두 부류의 시간이 존재하지 않네. (3)
  
  과거 시간에 의존하지 않으면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성립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만약 과거 시간에 의존하지 않고서 현재 시간이 존재한다면 어느 곳에 현재 시간이 존재하는 것인가? 미래 시간도 이와 같으니 어느 곳에 미래 시간이 존재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과거 시간에 의존하지 않으면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서로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치가 있기에 다른 두 부류의 시간,
  위와 가운데와 아래, 같음과 다름 이 법들이 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네. (4)
  
  이와 같은 이치 있기 때문에 다른 미래 시간과 현재 시간도 존재하지 않고, 위와 가운데와 아래, 같음과 다름 따위 법들도 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위에 의존해서 가운데와 아래가 존재하지 위 없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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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운데와 아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위 없이 가운데와 아래가 존재한다면 서로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같음에 의존해서 다름이 존재하고 다름에 의존해서 같음이 존재한다. 만약 같음이 실재한다면 다름에 의존해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만약 다름이 실재한다면 같음에 의존해서 실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법들도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논파된다.
  [문] 이를테면 년ㆍ월ㆍ일ㆍ찰나[須庾] 등의 구별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답]시간이 머무는 것은 얻을 수 없네. 시간이 가는 것도 얻을 수 없네.
   시간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시간의 상(相)을 말하겠는가? (5)
  
   사물에 의존해서 시간이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사물을 떠나서 시간이 있겠는가?
   사물도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시간이 존재하겠는가? (6)
  
  만약 시간이 머물지 않는다면 (시간을) 얻을 수 없다. 시간이 머무는 일도 없다. 시간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시간의 상(相)을 말하겠는가? 만약 시간의 상이 없다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에 의존해서 생기기 때문에 시간이라 한다. 만약 사물을 떠난다면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까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사물들을 논파했다.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시간이 존재하겠는가?
  20. 원인과 결과를 관찰하는 장[觀因果品] 24偈
  [문] 여러 인연이 화합한 것에서 결과가 현재에 분명히 발생하기 때문에 이 결과는 뭇 연[緣]이 화합함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답]만약 연들이 화합해서 결과가 발생한다면
   화합 속에 이미 존재하는데 왜 화합해서 발생하는 것을 기다리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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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1)
  
  만약 “여러 인연이 화합해서 결과가 발생한다. 이 결과가 화합 속에 이미 존재한다. 그래서 화합한 것에서 발생하는 것이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결과가 이미 확정된 자체 속에 존재한다면 화합해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문] 뭇 연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하진 않지만 결과는 뭇 연에 의해 발생한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만약 뭇 연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뭇 연이 화합한 것에서 결과가 발생하겠는가? (2)
  
  만약 뭇 연이 화합한 것에서 결과가 발생한다면 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으면서 화합한 것에서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사물에 자성이 없다면 이 사물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뭇 연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화합한 것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제로는 얻을 수 없네. (3)
  
  또 만약 뭇 연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한다면, 색이라면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색이 아니라면 사유[意]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화합한 것 속에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뭇 연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여러 인연(因緣)은 인연들이 아닌 것과 동일할 것이네. (4)
  
  또 만약 뭇 연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뭇 연(緣)은 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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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이 아닌 것과 동일한 것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유가 타락[酪]의 인연인 경우를 보자. 만약 우유 속에 타락이 없다면 물 속에도 타락이 없다. 만약 우유 속에 타락이 없다면 (우유는) 물과 동일할 것이니 (타락이) 우유에서 나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연들이 화합한 것 속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은 옳지 않다.
  [문] 원인이 결과를 위해서 원인이 되고서 소멸하는 것이기에 원인과 결과가 존재한다.
  
  [답]만약 원인이 결과에게 원인이 되고서 소멸한다면
   이 원인은 두 자체가 있게 되네. 하나는 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멸하는 것이네. (5)
  
  만약 원인이 결과에게 원인이 되고서 소멸한다면 이 원인에는 두 자체가 있게 된다. 하나는 주는 원인[與因]이고 또 하나는 소멸하는 원인[滅因]이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한 법에 두 자체가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은 결과에게 원인이 되고서 소멸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문] 만약 원인이 결과에게 원인이 되지 않고서 소멸해도 또한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만약 원인이 결과에게 원인이 되지 않고서 소멸한다면
   원인이 소멸했는데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니 이 결과는 원인이 없는 것이네. (6)
  
  만약 이 원인이 결과에게 원인이 되지 않고서 소멸한다면, 원인이 소멸했는데 결과가 발생하는 것이니 이 결과는 원인이 없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모든 결과가 현재에 분명히 보이니 원인이 없이 발생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원인이 결과에 대해 원인이 되지 않고서 소멸해도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문] 연들이 화합하고 있을 때 결과가 발생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124 / 187] 쪽
  
  [답] 만약 연들이 화합하고 있을 때 결과가 발생한다면
   발생하게 하는 것과 발생하는 것이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 될 것이네. (7)
  
  만약 연들이 화합하고 있을 때 결과가 발생한다면, 발생하게 하는 것[生者]과 발생하는 것[可生]이 동시에 함께 존재하는 것이 되리라. 그러나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은 동시에 생겨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가 연들이 화합하고 있을 때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문] 만약 먼저 결과가 발생하고 나중에 연들이 화합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만약 먼저 결과가 발생하고 나중에 연들이 화합한다면
  이것은 인연을 벗어난 것이니 원인이 없는 결과이리라. (8)
  
  만약 연들이 아직 화합하지 않았는데 먼저 결과가 발생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결과가 인연(因緣)을 벗어났으니 원인이 없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연들이 아직 화합하지 않았을 때 먼저 결과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문] 원인이 소멸했을 때 변해서 결과가 된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만약 원인이 변해서 결과가 된다면 원인은 결과에 다다른 것이 되네.
   그렇다면 앞에 발생한 원인이 발생하고 나서 다시 발생하는 것이 되리라. (9)
  
  원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앞에 발생한 것[前生]이고, 또 하나는 동시에 발생하는 것[共生]이다. 만약 원인이 소멸했을 때 변해서 결과가 된다면 이 앞에 발생한 원인이 다시 발생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미 발생한 사물은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이 원
[125 / 187] 쪽
  인이 변해서 결과가 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이것 그대로라면 변한다고 하지 않는다. 만약 변한다면 이것 그대로라고 하지 않는다.
  [문] 원인이 완전히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름[名字]이 소멸하고 원인 자체는 변해서 결과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진흙덩어리가 변해서 물단지가 될 때 진흙덩어리란 이름이 상실되고 물단지란 이름이 생기는 것과 같다.
  [답] 진흙덩어리가 먼저 소멸하고 물단지가 생기는 것을 변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진흙덩어리 자체에서 물단지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동이ㆍ항아리 등도 다 진흙덩어리에서 나온다. 만약 진흙덩어리에 단지 이름만이 있다면 변해서 물단지가 된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변한다는 것은 마치 우유가 변해서 타락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대가 원인인 이름은 소멸했지만 변해서 결과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문] 비록 원인이 소멸해서 상실되더라도 결과를 발생하게 해서 결과가 존재하므로, 이와 같은 과실이 없다.
  
  [답] 원인이 소멸해서 상실됐는데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또 만약 원인이 결과에 존재한다면 어떻게 원인이 결과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10)
  
  만약 원인이 소멸해서 상실됐다면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원인이 소멸하지 않고서 결과와 합한다면 어떻게 다시 결과를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문] 이 원인이 결과에 편재해서 결과를 발생하게 한다.
  
  [답]만약 원인이 결과에 편재한다면 다시 어떤 결과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원인은 결과를 보든 보지 않든 이 두 경우 모두 발생하게 하지 않네. (11)
  
  만약 이 원인이 결과를 본다고 한다면, 결과를 발생하게 하지도 못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결과를) 보겠는가? 만약 원인 자체가 결과를 보지 못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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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를 발생하게 하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만약 결과를 보지 못한다면 결과는 원인을 따르지 않는다. 또 아직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만약 원인이 미리 결과를 본다면 다시 (결과를) 발생하게 하지 못할 것이다. 결과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의 원인을 말한다면, 과거의 결과나
  미래나 현재의 결과와 이것은 결코 합하지 않네.60)(12)
  
  만약 미래의 원인을 말한다면, 미래의 결과나
  현재나 과거의 결과와 이것은 결코 합하지 않네. (13)
  
  만약 현재의 원인을 말한다면, 현재의 결과나
  미래나 과거의 결과와 이것은 결코 합하지 않네. (14)
  
  과거의 결과가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원인과 합하지 않는다. 미래의 결과가 미래나 현재나 과거의 원인과 합하지 않는다. 현재의 결과가 현재나 미래나 과거의 원인과 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세 종류의 결과는 결코 과거나 미래나 현재의 원인과 합하지 않는다.
  만약 합하지 않는다면 원인이 어떻게 결과를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합한다면 원인이 어떻게 결과를 발생할 수 있겠는가? (15)
  
  또 만약 원인과 결과가 합하지 않는다면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원인이 결과를 발생할 수 있겠는가? 만약 원인과 결과가 합하고 있을 때 원인이 결과를 발생하게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결과가 원인 속에 존재한다면, 원인 속에 결과가 이미 존재하는 것인데 어떻게 다시 (결과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60) 아래의 풀이를 보거나 산스끄리뜨 게송을 볼 때 이 게송은 잘못 번역된 듯싶다. 원인을 결과로 바꿔 “만약 과거의 결과를 말한다면, 과거의 원인이나 미래나 현재의 원인과 이것은 결코 결합하지 않네”[若言過去果 而於過去因 未來現在果 是則終不合]로 번역되어야 할 것 같다. 이하 두 게송도 마찬가지다.
[127 / 187] 쪽
  
  만약 원인이 공해서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인이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원인이 공하지 않아서 결과가 존재하다면 원인이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할 수 있겠는가? (16)
  
  또 만약 원인에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에 원인은 공하다.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회임(懷妊)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자식을 낳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경우와 같다. 만약 원인에 이미 결과가 존재한다면 이미 결과가 존재하니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이제 결과를 설명하겠다.
  
  결과는 공하지 않기에 발생하지 않네. 결과는 공하지 않기에 소멸하지 않네.
  결과는 공하지 않기에 발생하지 않고 소멸하지도 않네. (17)
  
  결과는 공하기에 발생하지 않네. 결과는 공하기에 소멸하지 않네.
  결과는 공하기에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네. (18)
  
  만약 결과가 공하지 않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결과가 원인 속에 미리 실재한다면 다시 발생할 필요가 없다. 발생이 없으니 소멸도 없다. 그러므로 결과는 공하지 않기에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 만약 결과가 공하기에 발생과 소멸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결과가 공하다면 공함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어떻게 발생과 소멸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결과가 공하기에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이제 같음과 다름으로 원인과 결과를 논파하겠다.
  
  원인과 결과가 같다면 이것은 결코 옳지 못하네.
[128 / 187] 쪽
  만약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네. (19)
  
  만약 원인과 결과가 같다면 발생하게 하는 것과 발생하는 것이 같을 것이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원인은 원인 아닌 것과 같을 것이네. (20)
  
  만약 결과에 자성이 실재한다면 원인은 무엇을 발생하게 하겠는가?
  만약 결과에 자성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원인은 무엇을 발생하게 하겠는가? (21)
  
  만약 원인이 결과를 발생하게 하지 않는다면 원인의 상(相)이 없는 것이네.
  만약 원인의 상이 없다면 무엇에 이 결과가 있겠는가? (22)
  
  만약 인연들의 화합에서 발생한다면
  화합이 자체를 발생하지 않는데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게 하겠는가?
  (23)
  
  그러므로 결과는 인연들의 화합에서도 화합하지 않음에서도 발생하지 않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디에 합함이 존재하겠는가? (24)
  이 뭇 연의 화합[衆緣和合法]은 자체를 발생하게 하지 못한다.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결과를 발생하겠는가? 그러므로 결과는 뭇 연의 화합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뭇 연의) 화합하지 않음에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디에 합함[合法]이 존재하겠는가?
  21. 생성과 괴멸을 관찰하는 장[觀成壞品] 20偈
  [문] 모든 세간의 사물들은 분명히 괴멸의 상(相)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괴
 
[129 / 187] 쪽
  멸이 있다.
  
  [답] 생성을 떠나서도 생성과 함께해서도 괴멸은 있지 않네.
   괴멸을 떠나서도 괴멸과 함께해서도 생성은 있지 않네. (1)
  
  생성이 있든 생성이 없든 괴멸이 있지 않다. 괴멸이 있든 괴멸이 없든 생성이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생성을 떠나서 어떻게 괴멸이 있겠는가?
  마치 태어남이 없이 죽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옳지 않네. (2)
  
  생성과 괴멸이 함께 있는데 어떻게 생성이나 괴멸이 있겠는가?
  마치 세간의 태어남과 죽음이 동시에 함께 있다는 것이 옳지 않듯이.
  (3)
  괴멸을 떠나서 어떻게 생성이 있겠는가?
  무상함은 모든 법에 어느 때든 있지 않을 때가 없네. (4)
  
  생성을 떠나서 괴멸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만약 생성을 떠나 괴멸이 있다면 생성에 의존하지 않고 괴멸이 있는 것이니 괴멸은 원인이 없는 것이다. 또 생성[成法]이 없이 괴멸할 수 있게 된다. 생성은 뭇 연(緣)이 취합(聚合)하는 것이고 괴멸은 뭇 연이 이산(離散)하는 것이다. 만약 생성을 떠나 괴멸이 있다면 생성이 없는데 어떻게 괴멸하겠는가? 마치 물단지가 없을 때 물단지가 깨졌다[壞]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러므로 생성을 떠나 괴멸은 있지 않은 것이다. 61)
  만약 생성과 함께 해서 괴멸이 있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법(法)이 먼저 따로 성립하고 난 후에 합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합함[合法]은 다름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괴멸이 다름을 떠나서 괴멸한다면 원인
  
  
61) 이상 게송 2를 풀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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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성과 함께 해서도 괴멸이 있지 않다. 만약 괴멸을 떠나서도 괴멸과 함께 해서도 생성이 있지 않다면, 󰠏�󰠏�󰠏�만약 괴멸을 떠나 생성이 있다면, 생성은 상주하는 것이 된다. 상주하는 것은 괴멸의 상(相)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괴멸의 상을 갖지 않는 상주하는 법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괴멸을 떠나 생성이 있지 않다. 만약 괴멸과 함께해서 생성이 있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생성과 소멸은 모순되는 것인데 어떻게 동시에 함께 하겠는가? 마치 사람에게 머리카락이 있음과 머리카락이 없음이 동시에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생성과 소멸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괴멸과 함께 해서 생성이 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법(法)을 분별하는 자가 생성 속에 항상 괴멸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생성 속에 괴멸이 있다면 머묾[住法]이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머묾이 있다. 그러므로 괴멸을 떠나서든 괴멸과 함께해서든 생성은 있지 않다.62)
  
  생성과 괴멸이 함께해서도 성립하지 않고 (서로) 떠나서도 성립하지 않네.
  이 둘이 모두 가능하지 않거늘 어떻게 성립하겠는가? (5)
  
  또 만약 생성과 소멸이 함께해서도 성립하지 않고 (서로) 떠나서도 성립하지 않는다면, 󰠏�󰠏�󰠏�만약 함께해서 성립한다면, 두 법이 모순되는 것인데 어떻게 동시에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서로) 떠나서 성립한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다. 두 문(門)이 모두 성립하지 않는데 어떻게 (생성과 괴멸이) 성립하겠는가? 만약 성립한다면 논해 보아라.
  [문] 멸진(滅盡)의 상(相)을 갖는 법이 지금 분명히 있다. 이 멸진의 상을 갖는 법은 멸진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멸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와 같으니 생성과 괴멸이 있다.
  
  
62) 이상 게송 3과 4를 풀이한 것이다.
[131 / 187] 쪽
  [답] 멸진하는 것에는 생성이 있지 않네. 멸진하지 않는 것에도 생성이 있지 않네.
   멸진하는 것에는 괴멸이 있지 않네. 멸진하지 않는 것에도 괴멸이 있지 않네. (6)
  
  법들은 밤낮으로 찰나찰나 항상 과거 속으로 멸진한다. 마치 물이 흘러서 머물지 않는 것과 같으니 이를 ‘멸진하는 것’이라 한다. 이것은 파악할 수도 없고 언설할 수도 없다. 아지랑이에서 확정된 자성을 얻을 수 없듯이 이 멸진에서도 확정된 자성을 얻을 수 없다. 어떻게 생성이 있다고 분별해서 언설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게송에서는) “멸진하는 것에는 생성이 있지 않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생성이 있지 않으니 괴멸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멸진하는 것에는 괴멸이 있지 않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찰나찰나 생멸하고 항상 상속해서 단절이 없기 때문에 ‘멸진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법은 확정되어 상주해서 단절이 없다. 어떻게 지금이 생성하는 때라고 분별해서 언설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멸진하지 않는 것에도 생성이 있지 않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생성이 있지 않으니 괴멸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멸진하지 않는 것에도 괴멸이 있지 않네” 하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궁구해 보아도 실체[實事]를 얻을 수 없으니 생성도 있지 않고 괴멸도 있지 않다.
  [문] 생성과 소멸은 일단 제쳐놓자. 법(法)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생성과 소멸을 떠나서 법이 있지 않네.
   법을 떠나서 생성과 소멸이 있지 않네. (7)
  
  ‘생성과 소멸을 떠나서 법이 있지 않네’란,󰠏�󰠏�󰠏�만약 어떤 법에 생성이 없고 괴멸이 없다면 이 법은 무(無)이거나 상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간에는 상주하는 법[常法]이 없다. 그대가 생성과 괴멸을 떠나서 법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132 / 187] 쪽
  [문] 법을 떠나서 생성과 괴멸이 있다고 한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답] 법을 떠나서 생성과 괴멸이 있다는 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법을 떠난다면 무엇이 생성하고 무엇이 괴멸하는 것인가? 그러므로 법을 떠나서 생성과 괴멸이 있다는 것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법의 자성이 공하다면 무엇에 생성이 있고 괴멸이 있겠는가?
  만약 법의 자성이 공하지 않다면 생성과 괴멸이 있지 않네. (8)
  
  또 만약 모든 법의 자성이 공하다면, 공한데 어떻게 생성과 괴멸이 있겠는가? 만약 모든 법의 자성이 공하지 않다면, 공하지 않으니 확정되어 존재하는 것이므로 또한 생성과 괴멸이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생성과 괴멸이 같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만약 생성과 괴멸이 다르다면 이것도 옳지 않네. (9)
  
  또 생성과 괴멸이 같다는 것은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다른 것[異相]이기 때문이고 여러 면에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또 생성과 소멸이 다르다는 것도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구별되지 않기 때문이고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발생과 소멸을 눈으로 본다고 말한다면
  무지[癡妄] 때문에 발생과 소멸을 보는 것이네. (10)
  또 만약 발생과 소멸을 눈으로 본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언설로써 (이를) 타파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63)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발생과 소멸을 눈으로 본다면 무지[愚癡]에 의해 전도(顚倒)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자성이 공해서 확정돼 있지 않은 것이 마치 환영과 같고 꿈과 같음을 보는데, 단지 범부가 전세(前世)에서 전도된 인연 때문에 이 눈을 얻어 금세에서
  
  
63) 발생과 소멸이 눈에 보인다는 것을 말한다.
[133 / 187] 쪽
  기억과 표상으로 분별하는 인연 때문에 발생과 소멸을 눈으로 본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일의(第一義)에는 발생과 소멸이 실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미 「相을 타파하는 장」64)에서 자세하게 말한 바 있다.
  
  법(法)에서 법이 발생하지 않네. (법에서) 법 아닌 것이 발생하지 않네.
  법 아닌 것에서 법이 발생하지 않네. 법 아닌 것에서 법 아닌 것이 발생하지 않네.65)(11)
  
  또 ‘법(法)에서 법이 발생하지 않네’란,󰠏�󰠏�󰠏�망실한 것이든 도달한 것이든 둘 모두 옳지 않다. 법에서 법이 발생할 때 망실해서 발생하거나 도달해서 발생하거나 하는데, 그렇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 된다. 원인이 없는 것이라면 단멸이나 상주에 떨어진다. 만약 이미 도달해서 법에서 법이 발생한다면, 이 법은 이미 도달한 것이니 발생한 것[生]이다. 그렇다면 상주하는 것이다. 또 발생한 것이 다시 발생하는 것이 되며 또한 원인이 없이 발생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이미 망실해서 법에서 법이 발생한다면 이것은 원인을 망실한 것이다. 발생하는 것은 원인이 없다. 그러므로 망실한 것에서도 또한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 ‘법에서 법 아닌 것이 발생하지 않네’에서법 아닌 것은 무[無所有]이고 법은 유[有]이다. 어떻게 유에서 무가 발생하겠는가? 그러므로 법에서 법 아닌 것이 발생하지 않는다. ‘법 아닌 것에서 법이 발생하지 않네’에서법 아닌 것은 무이다. 무에서 어떻게 유가 발생하겠는가? 만약 무에서 유가 발생한다면 이것은 원인이 없는 것이다. 원인이 없다면 큰 과실이 있다. 그러므로 법 아닌 것에서 법이 발생하지 않는다. ‘법 아닌 것에서 법 아닌 것이 발생하지 않네’에서법 아닌 것은 무이다. 어떻게 무에서 무가 발생하겠는가? 마치 토끼의 뿔에서 거북이의 털이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법 아닌 것에서 법 아닌 것이 발생
  
  
64) 제7장 「삼상을 관찰하는 장[觀三相品]」을 말한다.
65) “종비법불생 법급어비법[從非法不生 法及於非法]”은 있는 대로 번역하면 “법 아닌 것에서 법이나 법 아닌 것이 발생하지 않네”이겠지만, 주석을 보면 이렇게 번역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34 / 187] 쪽
  하지 않는다.
  [문] 법과 법 아닌 것 따위 여러 가지로 분별해 보아도 발생하지 않으니, 단지 법이 법을 발생하게 할 따름이다.
  
  [답] 법은 자기에게서 발생하지 않네. 타자에게서도 발생하지 않네.
   자기와 타자에게서 발생하지 않네. 어떻게 발생이 있겠는가? (13)
  
  법은 아직 발생하지 않았을 때 있지 않기 때문이고, 또 자기 자체에 의해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은 자기에게서 발생하지 않는다. 만약 법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또한 타자가 없다. 타자가 없으니 타자에게서 발생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또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면 자기가 없다. 자기가 없으니 타자도 없다. 양자66)에게서도 발생하지 않는다. 세 종류67)에서 발생하지 않는데 어떻게 법에서 법이 발생하는 일이 있겠는가?
  
  만약 법을 받아들인다면 단멸이나 상주에 떨어지네.
  받아들이는 법은 상주하는 것이거나 무상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13)
  
  또 ‘법을 받아들인다’란, ‘이것은 선(善)이다’, ‘이것은 불선(不善)이다’, ‘(이것은) 상주한다’, ‘(이것은) 무상하다’ 따위를 분별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반드시 상주의 견해[常見]나 단멸의 견해[斷見]에 떨어진다. 왜 그러한가? 받아들이는 법에는 두 종류가 있다. 상주하는 것과 무상한 것인데 둘 모두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상주하는 것이라면 상주의 극단[常邊]에 떨어지고, 만약 무상한 것이라면 단멸의 극단[斷邊]에 떨어진다.
  
  [문] 법을 받아들이는 자는 단멸이나 상주에 떨어지지 않네.
  
  
66) 자기와 타자을 말한다.
67) 자기ㆍ타자ㆍ양자를 말한다.
[135 / 187] 쪽
  원인과 결과가 상속하니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네. (14)
  
  어떤 사람이 믿고 받아들여 법들을 분별해서 말한다 하더라도 단멸이나 상주에 떨어지지 않는다. 경전에서 “5온은 무상하고 고(苦)이고 무아(無我)이다”고 말하고 있으니, 단멸하지 않는다. 비록 “죄나 복은 무한한 겁 동안 망실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나, 상주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이 법의 원인과 결과는 항상 생멸하며 상속하기 때문에 윤회하며 단절되지 않는다. 발생하고 소멸하기에 상주하지 않고,상속하기에 단멸하지 않는다.
  
  [답] 만약 원인과 결과가 생멸하며 상속하기에 단멸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소멸한 것은 다시 발생하지 않으니 원인이 단멸한 것이 되네. (15)
  
  만약 그대가 법들의 원인과 결과는 상속하기 때문에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면, 소멸한 법[滅法]은 이미 소멸했기에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인이 단멸한 것이다. 원인이 단멸했는데 어떻게 상속하겠는가? 이미 소멸한 것은 다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 자성에 머물고 있다면 있음과 없음이 존재하지 않네.
  열반에서는 상속이 소멸하니 단멸에 떨어지네. (16)
  
  또 법이 있음 그대로[有相中]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그 때에는 없는 일[無相]이 존재하지 않는다. 가령 물단지가 물단지 그대로[甁相]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그 때에는 깨지는 일[失壞相]이 없다. 물단지가 존재할 때 그대로를 따르기에 깨지는 일이 없다.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을 때도 깨지는 일이 없다. 왜 그러한가? 물단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깨지는 일[所破]이 없다. 이런 이치가 있기 때문에 소멸을 얻을 수 없다. 소멸을 여의었기 때문에 또한 발생도 없다. 왜 그러한가? 발생과 소멸은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또 상주 따위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법(法)에 있음과 없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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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그대는 앞에서 원인과 결과는 생멸하며 상속하기 때문에 비록 법들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단멸과 상주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그대는 “원인과 결과가 생멸하며 상속하기 때문에 3유(有)68)의 상속이 있다. 상속이 소멸한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열반의 시기에는 단멸에 떨어질 것이다. 3유의 상속이 소멸하기 때문이다.
  
  만약 전의 유(有)가 소멸한다면 후의 유가 존재하지 않네.
  만약 전의 유(有)가 소멸하지 않는다면 후의 유가 존재하지 않네. (17)
  
  또 전의 유(有)란 금세의 유를 말하고, 후의 유란 내세의 유를 말한다. 만약 전의 유가 소멸하고서 다음에 후의 유가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원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전의 유가 소멸하고서 후의 유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전의 유가 소멸하지 않는다면 또한 후의 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전의 유가 아직 소멸하지 않았는데 후의 유가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한 시기에 두 유가 존재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전의 유가 소멸하지 않으면 후의 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문] 후의 유는 전의 유가 소멸해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전의 유가) 소멸하지 않고서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전의 유가) 소멸하고 있을 때 (후의 유가) 발생하는 것이다.
  
  [답] 만약 전의 유(有)가 소멸하고 있을 때 후의 유가 발생한다면
   소멸하고 있는 것이 한 유이고 발생하고 있는 것이 한 유일 것이네. (18)
  
  만약 전의 유가 소멸하고 있을 때 후의 유가 발생한다면 두 유가 동시에 함께 존재하게 된다. 한 유는 소멸하고 있는 것이고, 한 유는 발생하고 있는
  
  
68)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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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다.
  [문] 소멸하고 있는 것과 발생하고 있는 것인 두 유(有)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단지 전의 유가 소멸하고 있을 때 후의 유가 발생하는 것을 분명하게 볼 따름이다.
  
  [답] 만약 발생하는 것과 소멸하는 것이 동시라고 말한다면
   이 온[陰]에서 죽을 때 바로 이 온에서 태어날 것이네. (19)
  
  만약 발생하고 있는 것과 소멸하고 있는 것이 동시여서 두 유(有)가 존재하지 않고 전의 유가 소멸하고 있을 때 후의 유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지금 어떤 온(蘊)에서 죽는 그대로 이 온에서 태어나지 다른 온에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죽는 자가 그대로 태어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죽음과 태어남이라는 모순되는 법들은 시간을 같이하고 장소를 같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앞에서 “소멸하고 있는 것과 발생하고 있는 것이 동시여서 두 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전의 유가 소멸하고 있을 때 후의 유가 발생하는 것이다”고 말한 것은 옳지 않다.
  
  삼세에서 유(有)의 상속을 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네.
  삼세에 있지 않은데 어떻게 상속이 있겠는가? (20)
  
  또 3유(有)란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이다. 무시(無始)의 생사에는, 진실의 지혜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3유의 상속이 있다. 이제 삼세(三世)을 자세히 살펴서 (유의 상속을) 구한다 해도 얻을 수 없다. 삼세에 있지 않은데 어디에 유의 상속이 있겠는가? 유의 상속이 있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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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 무지[愚癡]에 의해 전도(顚倒)되었기 때문에 있는 것이지 실제로는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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