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중론(中論)

중론 제4권

通達無我法者 2007. 12. 26.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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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제4권
  
  
  용수보살 지음
  요진삼장 구마라집한역
  범지 청목주석
  박인성 번역
  
  
22. 여래를 관찰하는 장[觀如來品] 16偈
  [문] 모든 세간에서 존귀하신 분을 들라면 오직 바르게 변지(遍知)하시는 여래가 있을 뿐이다. 법왕(法王)이라 불리는 일체지자(一切智者) 이 분은 존재하신다.
  [답] 이제 자세히 생각해 보라. 만약 존재한다면 파악되어야 한다.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에 의해 파악되겠는가? 왜 이렇게 말하는가? 여래는 다음과 같다.
  
  5온이 아니네. 5온을 떠난 것이 아니네. 이 분과 그것이 서로의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네.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네. 어디에 여래가 존재하겠는가? (1)
  
  만약 여래가 실재한다면 5온이 곧 여래이겠는가, 5온을 떠나 여래가 존재하겠는가,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겠는가,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하겠는가, 여래가 5온을 소유하겠는가? 이것들은 모두 옳지 않다. 5온이 곧 여래인 것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생멸의 상(相)을 갖기 때문이다. 5온은 생멸의 상을 갖는다. 만약 여래가 곧 5온이라면 여래는 생멸의 상을 갖는 것이 된다. 만약 생멸의 상을 갖는다면 여래는 무상해서 단멸 따위의 과실이 있을 것이다. 또 취착하는 자[受者]와 취착[受法]이 하나가 될 것이다. 취착하는 자는 여래이고 취착은 5온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가 곧 5온인 것은 아니다.
  5온을 떠나서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5온은 떠나 여래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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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면 생멸의 상을 갖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여래는 상주 따위의 과실이 있을 것이다. 또 눈 등의 감관[根]들은 보거나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5온을 떠나 또한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약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는 것이 마치 그릇 속에 과실이 있고 물 속에 물고기가 있는 것과 같다면, 다름이 있게 된다. 다름이 있다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상주 따위의 과실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여래 속에 5온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또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약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이 상 위에 사람이 있고 그릇 속에 우유가 있는 것과 같다면, 그렇다면 다름[異]이 있게 되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과실이 있다. 그러므로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만약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이 마치 사람이 자식을 소유하는 것과 같다면, 그렇다면 다름이 있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위와 같은 과실이 있게 되니,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여래가 5온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으니 어떤 것들이 여래이겠는가?
  [문] 이와 같은 주장[義]으로 여래를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5온이 화합해서 여래가 존재한다.
  
  [답] 5온이 화합해서 여래가 존재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네.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에 의존해서 존재하겠는가? (2)
  
  만약 여래가 5온이 화합해서 존재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5온의 화합에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 여래는 자성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타성에 의존해서 존재할 따름이다.
  [답]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에 의존해서 존재하겠는가? 왜 그러한가? 타성 또한 자성이 없는 것이다. 또 서로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타성을 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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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없고,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타성이라 하지 못한다.
  
  만약 어떤 법(法)이 타성에 의존해서 발생한다면 이것은 ‘나(我)’가 없는 것이네.
  ‘나’가 없는 법인데 어떻게 여래이겠는가? (3)
  
  또 만약 어떤 법이 뭇 연(緣)에 의존해서 발생한다면 (이 법은) ‘나’가 없는 것이다. 마치 다섯 손가락에 의존해서 주먹이 있을 때 이 주먹에는 자체(自體)가 없듯이, 그렇듯이 5온에 의존해서 ‘나’라 할 때 이 ‘나’에는 자체가 없는 것이다. ‘나’에는 중생ㆍ사람[人]ㆍ천신ㆍ여래 등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만약 여래가 5온에 의존해서 존재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자성이 없기에 ‘나’가 없다. ‘나’가 없는데 어떻게 여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게송에서 “만약 어떤 법이 타성에 의존해서 발생한다면 이것은 ‘나’가 없는 것이네. ‘나’가 법(法)인데 어떻게 여래이겠는가?”라고 읊은 것이다.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이 있겠는가?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무엇을 여래라 하겠는가? (4)
  
  또 자성이 없다면 타성 또한 있지 않다. 자성에 의존하기에 타성이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기에 저것도 없다. 그러므로 자성과 타성 둘 모두 없는 것이다. 자성과 타성을 떠나서 무엇을 여래라 하겠는가?
  또
  
  만약 5온(陰)에 의존하지 않고 먼저 여래가 존재한다면
  지금 5온을 취착(取著)하는 것이기에 여래라 말하네. (5)
  
  지금 실제로는 5온을 취착하지 않으니 다시 여래가 존재하지 않네.
  (5온을) 취착하지 않아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데 지금 어떻게 취착하겠는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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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아직 취착하지 않았다면 취착되는 것[受法]1)을 취착이라 하지 않네.
  취착이 없다면 여래라 하지 않네. (7)
  
  만약 같음과 다름에 의거해서 여래를 구할 수 없다면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여래가) 존재하지 않거늘 어떻게 취착 속에 존재하겠는가? (8)
  
  또 취착되는 것인 5온은 자성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네.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타성이 있겠는가? (9)
  
  만약 5온을 아직 취착하지 않았는데 먼저 여래가 존재한다면 이 여래는 지금 5온을 취착해서 여래가 된 것이리라. 그러나 실제로는 아직 5온을 취착하지 않았을 때는 먼저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데 지금 어떻게 (5온을) 취착하겠는가? 아직 5온을 취착하지 않았다면 5온을 취착(取著)이라 하지 않는다. 취착이 없다면 여래라 하지 않는다. 또 여래는 같음과 다름에 의거해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5온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그럴진대 5온 속에 여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취착되는 것인 5온은 자성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타성에 의해서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자성에 의해서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타성에 의해서 존재하겠는가? 왜 그러한가? 자성이 없기 때문에 타성 또한 없다.
  이런 이치가 있기에 취착함도 공(空)하고 취착하는 자도 공하네.
  어떻게 공한 것으로 공한 여래를 말하겠는가? (10)
  
  이런 이치로 사유해 보면 취착함[受]과 취착하는 자[受者] 모두 공하다. 만약 취착이 공(空)하다면 어떻게 공한 취착으로 공한 여래를 말하겠는가?
  
  
1) 5온(蘊)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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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그대는 취착함도 공하고 취착하는 자도 공하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공한 것이 확정되어 존재하는가?
  [답]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공한 것은 언설할 수 없네. 공하지 않은 것은 언설할 수 없네.
  공한 것이면서 공하지 않은 것,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은 언설할 수 없네. 단지 가명(假名)으로 말할 따름이네. (11)
  
  법들은 공하니 언설할 수 없다. 법들은 공하지 않으니 또한 언설할 수 없다. 법들은 공한 것이면서 공하지 않으니 또한 언설할 수 없다. (법들은) 공한 것도 아니고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니 또한 언설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2) 모순되는 것을 타파하고자 가명(假名)으로 언설했을 따름이다.
  이와 같이 바르게 관찰하고 사유해 보건대, 법들의 실상(實相)에 대해서 이런 저런 공박으로 공박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적멸에는 ‘상주한다’나 ‘무상하다’ 따위의 네 가지가 있지 않네.
  적멸에는 ‘한계가 있다’나 ‘한계가 없다’ 따위의 네 가지가 있지 않네.
  (12)
  
  법들의 실상(實相)은 이와 같이 미묘한 적멸(寂滅)이다. 단지 과거세에 의거해서 네 종류의 그릇된 견해을 일으킨다. 즉 ‘세간은 상주한다’, ‘세간은 무상하다’, ‘세간은 상주하는 것이면서 무상한 것이다’, ‘세간은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다’이다. 적멸에는 (이 견해들이) 모두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법들의 실상은 완전히 청정해서 취할 것이 없다. 공성(空性)은 취착하지 않는 것인데 어찌 하물며 네 종류의 견해가 있겠는가? 네 종류의 견해는 모두 취착[受]에 의존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법들의 실상에는 취착에 의존하는 것이 없다. 네 종류의 견해는 모두 자기의 견해는 귀하다고 하고
  
  
2) 그런데 왜 언설했느냐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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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의 견해는 천하다고 한다. 법들의 실상에는 이편이나 저편이 없다. 그래서 적멸에는 네 종류의 견해가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거세에 의거해서 네 종류의 견해가 있듯이, 미래세에 의거해서 네 종류의 견해가 있는데 또한 그와 같다. 즉 ‘세간은 한계가 있다’, ‘세간은 한계가 없다’, ‘세간은 한계가 있는 것이면서 한계가 없는 것이다’, ‘세간은 한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이다.
  [문] 이와 같이 여래를 타파하는데 그렇다면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답] 그릇된 견해가 깊고 두터운 자는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네.
   여래의 적멸에 대해서도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하네. (13)
  
  그릇된 견해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세간의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이고 하나는 열반의 도(道)를 파괴하는 것이다. ‘세간의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이란, 추대(麤大)한 그릇된 견해로, ‘죄나 복이 없다’, ‘여래 등의 성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릇된 견해를 일으켜서 선을 버리고 악을 행한다면 세간의 즐거움을 파괴하는 것이다. ‘열반의 도를 파괴하는 것’이란, ‘나’(我)에 탐착(貪著)해서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하는 것이다. 선을 일으키고 악을 멸한다면 선을 일으키기 때문에 세간의 즐거움을 얻지만,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하기 때문에 열반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약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깊고 두터운 그릇된 견해이다. 이에 세간의 즐거움을 잃는데 하물며 어찌 열반을 잃지 않겠는가? 만약 여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그릇된 견해이다. 왜 그러한가? 여래의 적멸에 대해서 갖가지로 분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멸 속에 여래가 존재한다고 분별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성이 공한데 여래가 멸도(滅度)한 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네. (14)
  
  법들의 실상은 공하기 때문에 여래가 멸도한 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사유해서는 안 된다. 여래는 본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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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 완전히 공한데 하물며 어찌 멸도한 후에랴?
  
  여래는 희론을 넘어서 있는데 사람들은 희론을 만드네.
  희론은 혜안(慧眼)을 망치니 이들은 모두 부처님을 보지 못하네.
  (15)
  
  ‘희론’이란 기억하고 표상해서 이것 저것을 분별하는 것이다. 부처가 ‘멸도했다’, ‘멸도하지 않았다’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희론을 만들어서 혜안(慧眼)을 덮기에 여래 법신(法身)을 볼 수 없다.
  이 「여래를 관찰하는 장」에서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을 거쳐서 사유해 보아도 여래의 확정된 자성[定性]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이렇게 읊는다.
  
  여래의 자성은 세간의 자성이네.
  여래에게 자성이 없으니 세간에도 자성이 없네. (16)
  
  이 장에서 사유하고 궁구해 보건대 여래의 자성은 곧 모든 세간의 자성이다.
  [문] 어떤 것들이 여래의 자성인가?
  [답] 여래에게는 자성이 없다. 세간에 자성이 없는 것과 같다.
  
  
23. 전도(顚倒)를 관찰하는 장[觀顚倒品] 24偈
  [문]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에서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발생하네.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顚倒)는 모두 뭇 연에서 발생하네. (1)
  
  경전에서는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顚倒)에 의존해서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에서 탐욕[貪]과 증오[恚]와 무지[癡]가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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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 만약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에 의존해서 3독(毒)3)이 발생한다면
   3독은 자성이 없는 것이네. 그러니 번뇌는 실체가 없네. (2)
  
  만약 번뇌들이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해서 기억하고 표상하는 분별[憶想分別]에서 발생한다면, 자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들은 실체가 없다.
  
  ‘나[我]’의 있음이나 없음 이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네.
  ‘나’가 없으니 번뇌들의 있음이나 없음도 성립하지 않네. (3)
  
  또 ‘나’에 있음이나 없음이 성립할 이유[因緣]가 없다. 이제 ‘나’가 있지 않으니 번뇌들에 어떻게 있음이나 없음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왜 그러한가?
  
  누군가가 이 번뇌를 소유하는 것인데 이 사람이 성립하지 않네.
  만약 이 사람 없이 있다면 번뇌는 속하는 데가 없는 것이네. (4)
  
  ‘번뇌’란 남을 뇌란[惱亂]하는 것이다. 뇌란을 당하는 남이란 중생이다. 이 중생은 모든 곳에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만약 중생 없이 오직 번뇌만 있다고 말한다면 이 번뇌는 속하는 데가 없는 것이다.
  만약 비록 ‘나’가 없다 해도 번뇌는 마음[心]에 속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몸이 있다는 견해를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듯이
  번뇌는 염오심(染汚心)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네. (5)
  
  
3) 탐욕[貪]ㆍ증오[恚]ㆍ무지[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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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이 있다는 견해를 5온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듯이, 번뇌들도 염오심[垢心]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또 염오심도 번뇌들 속에서 다섯 가지로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는 자성이 없네.
  어떻게 이 둘에 의존해서 번뇌들이 발생하겠는가? (6)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란, 󰠏�󰠏�󰠏�전도(顚倒)는 허망(虛妄)을 말한다. 허망하다면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다면 전도가 없다. 전도가 없는데 어떻게 전도에 의존해서 번뇌들이 발생하겠는가?
  
  [문]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그리고 법(法)은 여섯인데
   이 여섯 가지는 3독의 근본이네. (7)
  
  이 여섯 입처(入處)는 3독(毒)의 근본이다. 이 여섯 입처에 의존해서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의 전도가 발생한다.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해서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발생한다.
  
  [답]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 그리고 법(法) 자체 여섯 가지는
   모두 공해서 신기루나 꿈과 같고 간다르바성과 같네. (8)
  
   이 여섯 가지 중 어느 것에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마치 화인[幻化人]과 같고 또 마치 거울의 영상과 같네. (9)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法) 자체가 아직 마음과 화합하지 않았을 때는 공해서 있는 바가 없다. 마치 신기루와 같고 꿈과 같고 화인[化]과 같고 거울 속의 영상과 같다. 단지 마음을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것일 뿐 확정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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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여섯 중 어느 것에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이 있겠는가?
  
  청정함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청정하지 않음이 없네.
  청정함에 의존해서 청정하지 않음이 있네. 그러니 청정하지 않음이 있지 않네. (10)
  
  또 청정함에 의존하지 않고서 먼저 청정하지 않음이 있는 것이 아닌데, 무엇에 의존해서 청정하지 않음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청정하지 않음이 있지 않다.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청정함도 없네.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해서 청정함이 있네. 그러니 청정함이 있지 않네. (11)
  
  또 청정하지 않음에 의존하지 않고서 먼저 청정함이 있는 것이 아닌데, 무엇에 의존해서 청정함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청정함이 있지 않다.
  
  청정함이 있지 않은데 어디에 탐욕이 있겠는가?
  청정하지 않음이 있지 않은데 어디에 증오가 있겠는가? (12)
  
  또 청정함과 청정하지 않음이 있지 않기에 탐욕과 증오가 발생하지 않는다.
  [문] 경전에서 상주함 따위의 네 가지 전도를 말하고 있다. 만약 무상한 것에서 상주함을 본다면 이것은 전도된 것이다. 만약 무상한 것에서 무상함을 본다면 이것은 전도되지 않은 것이다. 나머지 세 가지 전도도 이와 같다. 전도가 있기에 전도된 자도 있는 것인데 왜 도무지 있지 않다고 말하는가?
  
  [답] 무상한 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이것을 전도라 하네.
   공함[空]에 있어서는 상주하는 것이 없는데 어느 곳에 상주함의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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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있겠는가? (13)
  
  만약 무상한 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전도라 한다. 법들의 자성이 공한 것에는 상주하는 것이 있지 않다. 이 중의 어느 곳에 상주함의 전도가 있겠는가? 나머지 세 가지4)또한 이와 같다.
  
  만약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면
  공함에 있어서는 무상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전도 아닌 것이 있겠는가? (14)
  
  또 만약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면 법들의 자성이 공한 것에는 무상한 것이 있지 않다. 무상한 것이 있지 않은데 무엇이 전도 아닌 것이 되겠는가? 나머지 셋도 또한 이와 같다.
  
  집착되는 것, 집착하는 자, 집착함, 집착 수단,
  이것은 모두 적멸해 있는데 어떻게 집착이 있겠는가? (15)
  
  또 ‘집착되는 것[可著]’이란 (집착의) 대상[物]이다. ‘집착하는 자[著者]’란 (집착의) 행위자이다. ‘집착함[著]’이란 행위[業]이다. ‘집착에 쓰이는 법[所用著法]’5)이란 (집착에) 쓰이는 사물[事]이다. 이것은 모두 자성이 공해서 적멸해 있다. 「여래를 관찰하는 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집착이 있지 않다.
  
  만약 집착이 있지 않다면 누가 그릇된 것을 전도라고 말하겠으며
  누가 바른 것을 전도가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16)
  
  
4) 고(苦)를 낙(樂)이라고 집착하는 것, 무아(無我)를 아(我)라고 집착하는 것, 청정하지 않음을 청정함이라고 집착하는 것의 세 가지를 말한다.
5) 고려대장경에는 “소용법(所用法)”으로 되어 있다. 송(宋)ㆍ원(元)ㆍ명(明) 3본(本)을 따라 “소용저법(所用著法)”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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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집착’이란 이것이다, 저것이다, 있다, 없다 따위를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런 집착이 있지 않다면, 누가 그릇된 것을 전도라고 하겠으며 누가 바른 것을 전도 아닌 것이라고 하겠는가?
  
  전도가 있는 자에게는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전도가 없는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전도된 자에게는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전도되지 않는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17)
  
  지금 전도되고 있는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네.
  누구에게 전도가 발생하는지 그대 스스로 관찰해 보거라. (18)
  
  또 이미 전도된 자에게는 다시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미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전도되지 않은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전도가 없기 때문이다. 전도되고 있는 자에게도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 두 과실6)이 있기 때문이다. 그대 지금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누가 전도를 행하는 지를 스스로 잘 관찰해 보거라.
  
  갖가지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이런 주장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전도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전도된 자가 있겠는가? (19)
  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타파했기 때문에 전도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따른다. 그 사람은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에 탐착해서, 발생하지 않는 것[不生]이야말로 전도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게송에서 ‘왜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나아가 무루법도 발생하지 않는 것이라 하지 않는데 어찌 하물며 전도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6) 이미 전도된 자의 과실과 아직 전도되지 않은 자의 과실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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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겠는가? 전도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전도된 자가 있겠는가? 전도에 의존해서 전도된 자가 있는 것이다.
  
  만약 상주함[常]ㆍ즐거움[樂]ㆍ아(我)ㆍ청정함[淨]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은 전도가 아니네. (20)
  
  또 만약 상주함[常]ㆍ즐거움[樂]ㆍ아ㆍ청정함[淨] 이 넷의 자성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은 전도가 아니다. 왜 그러한가? 실체[實事]가 확정되어 존재하는데 어떻게 전도라 말하겠는가? 만약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 이 넷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상함[無常]ㆍ괴로움[苦]ㆍ무아(無我)ㆍ청정하지 않음[不淨] 이 넷이 실제로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은) 전도가 아니다. 전도와 모순되기에 전도가 아닌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상주함ㆍ즐거움ㆍ아(我)ㆍ청정함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상함ㆍ괴로움ㆍ청정하지 않음이 존재하지 않네. (21)
  
  만약 상주함ㆍ즐거움ㆍ아ㆍ청정함 이 넷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상 등 네 가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서로 의존하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전도가 소멸하기에 무명도 소멸하네.
  무명이 소멸하기에 행들도 소멸하네. (22)
  또 ‘이와 같이’란 그 의미와 같이라는 뜻이다. 전도들이 소멸하기에 12연기(緣起)의 근본인 무명(無明)도 소멸한다. 무명이 소멸하기에 세 종류의 행[行業] 내지 늙음과 죽음(老死) 등도 소멸한다.
  
  만약 번뇌의 자성이 실재하고 (누군가에게) 속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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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누가 그 자성을 끊을 수 있겠는가? (23)
  
  또 만약 번뇌들이 전도이고 그 자성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누가 그 자성을 끊을 수 있겠는가? 만약 번뇌들은 모두 허망해서 자성이 없기 때문에 끊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번뇌가 허망해서 자성이 없다면, (누군가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누가 자성이 없는 법을 끊을 수 있겠는가? (24)
  
  번뇌들은 허망해서 자성이 없으니, 속하는 데가 없는데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누가 자성이 없는 법을 끊을 수 있겠는가?
  
  
24. 사제를 관찰하는 장[觀四諦品] 40偈
  [문] 네 가지 전도(顚倒)7)를 타파해서 4성제(聖諦)를 통달하면 네 가지 사문의 과보[四沙門果]를 얻는다.
  
  만약 모든 것이 다 공해서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면
  그렇다면 4성제가 있지 않을 것이네. (1)
  4성제가 있지 않기에 고(苦)를 보는 것, (번뇌와 업의) 집(集)을 끊는 것,
  멸(滅)을 증득하는 것,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것이 모두 있지 않네. (2)
  
  이와 같은 것이 있지 않기에 네 과보(果報)도 있지 않네.
  
  
7) 앞 장에서 말한 무상한 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 고(苦)를 낙(樂)이라고 집착하는 것, 무아(無我)를 아(我)라고 집착하는 것, 청정하지 않은 것을 청정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의 네 가지 전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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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과보가 있기 않기에 (과보를) 얻은 자도 (과보로) 향하는 자도 있지 않네. (3)
  
  만약 여덟 부류의 성자가 있지 않다면 승보(僧寶)가 있지 않네.
  4성제가 있지 않기에 또한 법보(法寶)도 있지 않네. (4)
  
  법보과 승보가 있지 않기에 또한 불보(佛寶)도 있지 않네.
  이와 같이 공함을 말한다면 이는 3보(寶)를 파괴하는 것이네. (5)
  
  만약 모든 세간이 다 공해서 있지 않다면, 발생하지 않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을 것이다.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에 4성제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집제(集諦)에서 고제(苦諦)가 발생한다. 집제는 원인이고 고제는 결과이다. 고제와 집제를 소멸시키는 것이기에 멸제(滅諦)이다. 멸제에 다다르게 하는 것이기에 도제(道諦)이다. 도제는 원인이고 멸제는 결과이다. 이와 같이 4성제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으니, 만약 발생함도 없고 소멸함도 없다면 4성제가 있지 않을 것이다. 4성제가 있지 않으니 고(苦)를 보는 것, (번뇌와 업의) 집(集)을 끊는 것, 멸(滅)을 증득(證得)하는 것,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고를 보는 것, (번뇌와 업의) 집을 끊는 것, 멸을 증득하는 것, 도를 수습하는 것이 있지 않으니 네 사문(沙門)의 과보가 있지 않을 것이다. 네 사문의 과보가 있지 않으니 네 부류의 (과보로) 향하는 자8)와 네 부류의 (과보를) 얻은 자9)가 있지 않을 것이다. 만약 여덟 부류의 성자가 있지 않다면, 승보(僧寶)가 있지 않을 것이다. 또 4성제(聖諦)가 있지 않으니 법보(法寶)도 있지 않을 것이다. 법보와 승보가 있지 않은데 어찌 불보(佛寶)가 있겠는가? 법(法)을 얻은 이를 불(佛)이라 한다. 법이 없는데 어찌 불이 있겠는가? 그대가 모든 법이 다 공하다고 말한다면 3보10)
  
  
8) 예류향(豫流向)ㆍ일래향(一來向)ㆍ불환향(不還向)ㆍ아라한향(阿羅漢向)을 가리키는 말이다.
9) 예류과(豫流果)ㆍ일래과(一來果)ㆍ불환과(不還果)ㆍ아라한과(阿羅漢果)을 가리키는 말이다.
10) 승보(僧寶), 법보(法寶), 불보(佛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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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하는 것이 된다.
  
  공성[空法]은 원인과 결과를 파괴하고 죄와 복도 파괴하고
  모든 세속의 법도 파괴하네. (6)
  
  또 만약 공성[空法]을 받아들인다면 죄와 복, 죄와 복의 과보, 세속의 법도 파괴한다. 이와 같은 과실들이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은 공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
  
  [답] 그대는 지금 공성[空]과 공성의 목적[空因緣]을 여실하게 알지 못하고
   그리고 공성의 대상[空義]를 알지 못하네. 그래서 스스로 번민을 만들어 내네. (7)
  
  공성[空相]이 무엇인지, 무슨 목적[因緣]으로 공성을 말하는지 알지 못하고, 또 공성의 대상[空義]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여실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의심을 내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들은 이제(二諦)에 의지해서 중생을 위해 설법하시네.
  하나는 세속제이고 다른 하나는 제일의제이네. (8)
  
  만약 사람이 이제의 구별을 알지 못한다면
  심원한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한 의미를 알지 못하네. (9)
  
  또 ‘세속제’란,󰠏�󰠏�󰠏�모든 법의 자성은 공한데 세간의 전도(顚倒) 때문에 허망한 법이 발생한다. 세간에 있어서는 이것이 진실이다. 성인들은 전도성(顚倒性)을 핍진하게 알기 때문에 모든 법들이 다 공하고 발생이 없다는 것을 안다. 성인에게 있어서는 이 제일의제(第一義諦)가 진실이다. 부처님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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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제에 의지해서 중생을 위해 설법하신다. 만약 사람이 이제의 구별을 여실하게 알지 못한다면 심원한 부처님 가르침의 진실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만약 모든 법의 발생하지 않음인 제일의제는 제2의 속제(俗諦)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속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네.
  제일의제를 얻지 못하면 열반을 얻지 못하네. (10)
  
  제일의제는 모두 언설(言說)에 의존한다. 언설은 세속제이다. 그러므로 만약 세속제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제일의제를 언설할 수 없다. 제일의제를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열반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법이 비록 발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제(二諦)는 있다.
  
  공성을 올바르게 관찰할 수 없어서 근기가 약한 자는 스스로를 해치네.
  마치 주술에 능하고 못하고 뱀을 잡는 것에 능하지 못한 것과 같이. (11)
  
  또 만약 어떤 사람이 근기가 약하다면 공성[空法]을 잘 알지 못한다. 공성[空]을 상실해서 그릇된 견해가 일어난다. 마치 이득을 위해 독사를 잡으려다 제대로 잡지 못해 도리어 해가 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주술로 무엇을 만들려다가 제대로 만들지 못해 도리어 스스로를 해치는 것과 같다. 근기가 약한 자가 공성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다.
  
  세존께서는 이 법이 매우 깊고 오묘해서
  근기가 약한 자가 미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고 말씀하려 하지지 않으셨네. (12)
  
  또 세존께서는 이 법이 매우 깊고 오묘해서 근기가 약한 자가 알 바가 아니기에 말씀하시려 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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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는 내가 공성에 집착하기에 내가 과실을 범한다고 말하네.
  그대가 지금 말하는 과실은 공성에는 있지 않네. (13)
  
  또 그대가 만약 내가 공성에 집착하기에 내가 과실을 범한다고 말한다면, 내가 말하는 성질의 공성은 공성[空]도 또한 공한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과실이 없다.
  
  공성의 이치가 있기에 모든 법이 성립하네.
  만약 공성의 이치가 없다면 모든 법이 성립하지 않네. (14)
  
  또 공성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법이 다 성취된다. 만약 공성의 이치가 없다면 모두 성취되지 않는다.
  
  그대는 지금 자신에게 과실이 있으면서 나에게 돌리네.
  마치 사람이 말을 타고 있을 때 (말을) 탄 것을 스스로 잊어 버리는 것과 같네. (15)
  
  또 그대는 있다고 하는 것에 과실이 있는데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공하다 하는 것에서 과실을 본다. 마치 사람이 말을 타고 있으면서 그 (말을) 탄 것을 잊어 버리는 것과 같다. 왜 그러한가?
  
  만약 그대가 법들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고 본다면
  법들에 인(因)이 없고 연(緣)이 없다고 보는 것이네. (16)
  또 그대는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법들에 인(因)이 없고 연(緣)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발생하지 않고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법에 인과 연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만약 법들이 인과 연에서 발생한다면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법들에 자성이 존재한다면 인과 연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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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법들에 자성이 확정되어 머물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원인과 결과, 행위와 행위자와 행위 수단[作法],
  또 모든 사물의 발생과 소멸을 파괴하는 것이 되네. (17)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면 원인과 결과 등의 모든 것이 있지 않게 된다.
  이렇게 게송으로 읊는다.
  
  인(因)과 연(緣)들에서 발생하는 법을 나는 ‘공한 것[無]’이라고 말하네.
  가명(假名)이라고도 하고 중도(中道)의 이치라고도 하네. (18)
  
  인과 연들에서 발생하지 않는 법은 하나도 없네.
  그러니 모든 법은 공하지 않은 것이 없네. (19)
  
  인(因)과 연(緣)들에서 발생하는 법을 나는 ‘공한 것[空]’이라고 말한다. 왜 그러한가? 인과 연들이 다 갖춰지고 화합해서 사물이 발생한다. 이 사물은 인과 연들에 귀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성이 있지 않다. 자성이 있지 않기에 공하다. 공함도 또 공하다. 단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서 가명(假名)으로 말하는 것이다. ‘있다’와 ‘없다’의 양 극단을 여의었기에 중도(中道)라 한다. 이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또한 공하지 않기 때문에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법에 자성이 있다면 인과 연들에 의존하지 않고서 있는 것이다. 만약 인과 연들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법이 있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하지 않은 법은 없다.
  그대가 위에서 말한 공성[空法]에 과실이 있다고 한다면 이 과실은 이제 다시 그대에게 있다. 왜 그러한가?
  
  만약 모든 법이 공하지 않다면 발생과 소멸이 없을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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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4성제[聖諦法]도 없을 것이네. (20)
  
  만약 모든 법이 각각 자성이 있어서 공하지 않다면 발생과 소멸이 없을 것이다. 발생과 소멸이 없기 때문에 4성제[聖諦法]가 없다.
  왜 그러한가?
  
  고(苦)가 연들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고가 있겠는가?
  “무상한 것은 고이다”고 설파하네. 확정된 자성(自性)은 무상하지 않네. (21)
  
  고(苦)가 뭇 연(緣)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면 고가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경전에서는 “무상한 것은 고이다”고 설파하고 있다. 만약 고에 자성이 있다면 어떻게 무상하겠는가? 자성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왜 (업과 번뇌의) 집(集)에서 발생하겠는가?
  그러니 집(集)이 있지 않네. 공성의 이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네. (22)
  
  또 만약 고에 자성이 있다면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이미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집제가 있지 않을 것이다. 공성의 이치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멸(滅)이 있지 않을 것이네.
  그대가 자성에 집착하기 때문에 멸제를 파괴하는 것이 되네. (23)
  
  또 만약 고에 자성이 있다면 멸이 있기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있다면 멸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고(苦)에 자성이 있다면 도(道)를 수습(修習)하는 일이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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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네.
  만약 도를 수습할 수 있다면 자성이 있는 것이 아닐 것이네. (24)
  
  또 만약 법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도를 수습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법이 실재한다면 상주하는 것일 터이고, 상주하는 것이라면 증대[增益]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도를 수습할 수 있다면 도는 자성이 없는 것이다.
  
  고제가 없고 그리고 집제와 멸제가 없는데
  고를 멸할 수 있는 도에 대체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 (25)
  
  또 만약 법들에 미리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고제와 집제와 멸제가 없을 것이다. 이제 고를 멸하는 도는 고를 멸하는 어떤 곳에 다다르는 도이겠는가?
  
  만약 고(苦)에 자성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지금 어떻게 보겠는가? 그 자성이 상이하기 때문이네. (26)
  
  또 만약 앞서 범부의 시절에 고(苦)의 자성을 볼 수 없었다면 지금도 볼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확정된 것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고(苦)를 보는 것이 그렇지 못하듯이 (업과 번뇌의 집을) 끊는 것, 멸(滅)을 증득하는 것, 도(道)를 수습하는 것,
  그리고 네 가지 과보 이것들도 모두 그렇지 못하네. (27)
  
  또 고제(苦諦)의 자성을 전에 보지 못하는 자는 후에도 보지 못하듯이 그렇듯이 (업과 번뇌의 집을) 끊지 못하고, 멸을 증득(證得)하지 못하고, 도를 수습(修習)하지 못한다. 왜 그러한가? 이 집(集)의 자성을 이제껏 끊지 못했다면 지금도 끊지 못할 것이다. (집의) 자성은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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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이제껏 증득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증득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껏 증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를 이제껏 증득하지 못했다면 지금도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껏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성제(四聖諦)의 보는 것, 끊는 것, 증득하는 것, 수습하는 것인 네 가지 수행[行]이 모두 있지 않다. 네 가지 수행이 있지 않기 때문에 네 가지 도(道)의 과보도 있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 네 가지 도의 과보는 이제껏 얻을 수 없었는데
  법들의 자성이 확정된 것이라면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28)
  
  또 만약 법들에 확정된 자성[定性]이 있다면 네 가지 사문의 과보를 이제껏 얻을 수 없었는데 이제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만약 얻을 수 있다면 자성이 확정된 것이 아니다.
  
  만약 네 가지 과보가 없다면 (과보를) 얻은 자도 (과보로) 향하는 자도 없네.
  여덟 부류의 성인이 없으니 승보(僧寶)가 없네. (29)
  
  또 네 가지 사문의 과보가 없기에 (과보를) 얻은 자도 (과보로) 향하는 자도 없다면, 여덟 부류의 성인이 없는 것이니 승보(僧寶)가 없다. 그러나 경전에서 여덟 부류의 성인을 승보라고 말하고 있다.
  
  4성제가 없으니 또한 법보도 없네.
  법보와 승보가 없는데 어떻게 불보(佛寶)가 있겠는가? (30)
  
  또 4성제를 수행하면 열반을 얻는다. 만약 4성제가 없다면 법보가 없는 것이다. 두 가지 보(寶)가 없는데 어떻게 불보(佛寶)가 있겠는가? 그대는 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3보(寶)를 파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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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그대가 법들을 타파했지만 완전무결한 도(道)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11)는 있다. 이 도가 있기에 불(佛)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답] 그대가 (그렇게) 말한다면, 보리(菩提)에 의존하지 불(佛)이 있고
  또한 불에 의존하지 않고서 보리가 있는 것이 되네. (31)
  
  그대가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보리(菩提)에 의존하지 않고서 불(佛)이 있고 불에 의존하지 않고서 보리가 있는 것이 된다. 이 두 자성은 항상 확정돼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정진(精進)해서 보리의 도를 수행하더라도
  만약 미리 불성(佛性)이 없다면 성불할 수 없을 것이네. (32)
  
  또 미리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쇠에 금의 자성이 없어서 설사 갖가지로 단련한다 해도 결코 금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모든 법이 공하지 않다면 죄나 복을 짓는 자가 없을 것이네.
  공하지 않은데 무엇을 짓겠는가? 그 자성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33)
  
  또 만약 법들이 공하지 않다면 결코 사람이 죄나 복을 짓는 일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죄나 복의 자성이 이미 확정돼 있기 때문이다. 또 짓는 일과 짓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대가 죄나 복이 있어도 과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죄나 복 없이 과보가 있는 것이 되네. (34)
  
  또 그대가 죄나 복의 인연이 있어도 전혀 과보가 없다고 한다면 죄나 복의
  
  
11) 범어 anuttara-saṃyak-saṃbodhi의 음사이며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으로 한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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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연 없이 과보가 있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과보가 인연에 의존해서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문] 죄나 복 없이는 선악의 과보가 있을 수 없다. 단지 죄나 복에서 선악의 과보가 생길 따름이다.
  
  [답] 만약 죄나 복에서 과보가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과보가 죄나 복에서 발생했는데 어떻게 공하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35)
  
  만약 죄나 복 없이는 선악의 과보가 없다면 어떻게 과보가 공하지 않다고 말하겠는가? 만약 그렇다면12) 짓는 자 없이 죄나 복이 없을 것이다. 그대가 앞에서 모든 법은 공하지 않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그대가 모든 법의 인연성[因緣法]13)과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세속의 모든 다른 법을 파괴하는 것이 되네. (36)
  
  또 그대가 만약 여러 인연성[衆因緣法]과 제일(第一)의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모든 세속의 법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왜 그러한가?
  
  만약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지어야 할 것이 없고
  짓지 않아도 짓는 일이 있고 짓지 않아도 지은 자라 할 것이네. (37)
  
  만약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모든 결과에는 전혀 짓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원인이 없었을 것이다. 짓지 않아도 짓는 일이 있을 것이다. 또 모든 짓는 자들에게는 지어야 할 것이 있지 않을 것이다. 또 짓는 자 없이 업(業)이 있고 과보가 있고 받는 자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그러므로
  
  
12) ‘만약 죄나 복 없이는 선악의 과보가 없다면’이라는 뜻이다.
13) 모든 법의 인연성이란 연기(緣起)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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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성을 파괴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확정된 자성이 있다면 세간의 갖가지 상(相)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아 상주해서 괴멸하지 않을 것이네.
   (38)
  
  또 만약 법들에 확정된 자성이 있다면 세간의 갖가지 상(相) 즉 천신ㆍ사람ㆍ축생ㆍ사물들은 모두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아 상주해서 괴멸하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실재하는 자성이 있는 것은 변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사물들은 각각 변이의 상(相)이 있어서 생멸하고 변이한다. 그러므로 확정된 자성이 있지 않다.
  
  만약 공성이 없다면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지 못할 것이고
  번뇌를 끊는 일도 없을 것이며 고(苦)가 멸진하는 일도 없을 것이네.
  (39)
  
  또 만약 공성[空法]이 없다면 세간과 출세간의 공덕(功德)을 아직 얻지 못한 자는 모두 (그 공덕을) 얻지 못할 것이다. 또 번뇌를 끊는 일도 없을 것이다. 또 고(苦)가 멸진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자성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만약 인연성[因緣法]을 본다면
  부처님을 보게 되고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보게 된다”고 말하고 있네. (40)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법들이 인과 연들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본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볼 수 있다. 지혜를 증대시켜서 4성제인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볼 수 있다. 4성제를 본다면, 네 가지 과보를 얻기에 모든 고가 소멸한다. 그러므로 공성의 이치[空義]를 파괴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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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안 된다. 만약 공성의 이치를 파괴한다면 인연성[因緣法]을 파괴하는 것이 되고, 인연성을 파괴한다면 3보(寶)를 파괴하는 것이 되고, 3보를 파괴한다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 된다.
  
  
25. 열반을 관찰하는 장[觀涅槃品] 24偈
  [문] 만약 모든 법들이 공하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데
   무엇을 끊고 무엇을 멸하기에 열반이라 부르는가? (1)
  
  만약 모든 법들이 공하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이다.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데 무엇을 끊고 무엇을 멸하기에 열반이라 이름하는가? 그러므로 모든 법들은 공하지 않다. 모든 법들이 공하지 않기에 모든 번뇌들을 끊고 5온을 멸할 수 있는 것이니, 이를 열반이라 이름한다.
  
  [답] 만약 모든 법들이 공하지 않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데
   무엇을 끊고 무엇을 멸하기에 열반이라 부르는가? (2)
  
  만약 모든 세간의 법들이 공하다면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데 무엇을 끊고 무엇을 멸하기에 열반이라 이름하는가? 그러므로 있음과 없음14)의 두 문(門)을 통해서 열반에 다다르지 못한다. 열반이란,다음 게송에서와 같다.
  획득되지도 않고 도달되지도 않으며 단멸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으며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을 열반이라 이름하네. (3)
  
  ‘획득되지 않는다’란, 수행[行]과 과보[果]가 획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도달되지 않는다’란, 도달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단멸하지 않는다’란, 5온은
  
  
14) 공하지 않음과 공함을 말한다.
[165 / 187] 쪽
  원래 완전히 공하기 때문에 도(道)를 획득해서 무여열반에 들어갈 때 단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주하지 않는다’란,󰠏�󰠏�󰠏�분별되는 법이 있다면 이 법을 상주한다고 한다. 열반은 적멸이어서 분별되는 법이 아니기 때문에 상주한다고 하지 않는다. 발생함과 소멸함도 이와 같다. 이와 같은 상(相)을 갖는 것을 열반이라 이름한다. 또 경전에서는 “열반은 존재[有]가 아니며, 비존재[無]가 아니며,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이 아니며, 비존재[非有]인 것도 아니고 존재[非無]인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을 그 안에 수용하지 않고 적멸해 있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 그러한가?
  
  열반은 존재[有]가 아니네. 존재라면 늙음과 죽음의 상(相)이 있네.
  늙음과 죽음의 상을 떠난 존재[有法]는 결코 없네. (4)
  
  모든 사물들이 다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 눈에 보이니, 이것15)은 늙음과 죽음의 상을 갖는 것이다. 만약 열반이 존재라면 늙음과 죽음의 상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기에 열반을 존재라 하지 않는다. 또 발생과 소멸, 늙음과 죽음을 떠나서 별도로 열반이라 하는 확정된 법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만약 열반이 존재라면 발생과 소멸, 늙음과 죽음의 상이 있을 것이다. 늙음과 죽음의 상을 떠났기 때문에 열반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열반이 존재라면 열반은 유위일 것이네.
  무위인 법은 결코 한 법도 없을 것이네. (5)
  또 열반은 존재가 아니다. 왜 그러한가? 모든 사물들은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유위이다. ‘무위인 법은 결코 한 법도 없을 것이네’란,󰠏�󰠏�󰠏�비록 상주하는 법을 임시로 무위라 이름하기는 하지만, 이치에 의거해서 추구해 보건대, 무상한 법도 있지 않거늘 하물며 볼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상주하는 법이 있겠는가?
  만약 열반이 존재라면 어떻게 취착이 없는 것이겠는가?
  
  
15) 존재(有)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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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취착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존재[有法]라고 이름하는 것은 없네. (6)
  
  또 만약 열반이 존재[有法]라고 말한다면 경전에서 “취착이 없는 것이 열반이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취착이 없는 것이면서 있는 존재[有法]는 없다. 그러므로 열반은 존재가 아니다.
  [문] 만약 존재가 열반이 아니라면 비존재가 열반일 것이다.
  
  [답]존재가 열반이 아닌데 하물며 비존재가 열반이겠는가?
   열반에 존재가 있지 않은데 어디에 비존재가 있겠는가? (7)
  
  존재[有]가 열반이 아닌데 어떻게 비존재[無]가 열반이겠는가? 왜냐 하면, 존재에 의존해서 비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존재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비존재가 있겠는가? 경전에서는 “전에는 있다가 지금 없는 것을 비존재[無]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열반은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존재가 변이해서 비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존재도 열반이 아니다.
  
  만약 비존재가 열반이라면 어떻게 취착이 없는 것이겠는가?
  취착이 없는 것이면서 비존재[無法]라 이름하는 것은 없네. (8)
  
  또 만약 비존재가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경전에서 “취착이 없는 것이 열반이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취착이 없는 것이면서 비존재[無法]라 이름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반은 비존재가 아니다.
  [문] 만약 열반이 존재가 아니고 비존재가 아니라면 어떤 것들이 열반인가?
  인연들을 받기 때문에 생사 속을 굴러가네.
  인연들을 받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하네. (9)
  
  여실하게 전도(顚倒)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5취온(取蘊)에 의존해서 생사를 왕래한다. 전도를 여실하게 알기 때문에 다시 5취온에 의존해서 생사를 왕래하지 않는다. 자성이 없는 5온(蘊)은 다시 상속하지 않기 때문에 열반
[167 / 187] 쪽
  이라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유(有)도 끊고 비유(非有)도 끊으라고 말씀하셨네.
  그러니 열반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10)
  
  또 유(有)란 3유(有)이다. 비유(非有)란 3유가 단멸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두 가지를 끊으라고 말씀하셨으니 열반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문] 존재도 비존재도 열반이 아니라면 이제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한 것이 열반인 것인가?
  
  [답]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을 열반이라 말한다면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이 해탈일 것이네. 이것은 옳지 않네. (11)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가 합한 것이 해탈일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는 서로 모순되는 것인데 어떻게 한 장소에 있겠는가?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열반은 취착이 없는 것이 아닐 것이네. 이 둘은 취착에서 생기는 것이네. (12)
  
  또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합한 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면, 경전에서 “열반은 취착이 없는 것이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는 취착에서 생기는 것이고, 서로 의존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는 합함을 얻더라도 열반이 되지 않는다.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해서 성립한 것이 어떻게 열반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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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반은 무위이고 존재와 비존재는 유위인데. (13)
  
  또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는 함께 합하더라도 열반이라 할 수 없다. 열반은 무위이고 존재와 비존재는 유위이다. 그러므로 존재와 비존재는 열반이 아니다.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가 함께한 것이 어떻게 열반이겠는가?
  이 둘은 장소를 같이하지 않네. 마치 밝음과 어둠처럼. (14)
  
  또 존재와 비존재 두 가지는 열반이라 할 수 없다. 왜 그러한가? 존재와 비존재는 마치 밝음과 어둠이 함께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 모순되는 것이어서 한 장소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존재일 때 비존재는 없고 비존재일 때 존재는 없는 것인데 어떻게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한 것을 열반이라 하겠는가?
  [문]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함께 합하지 않은 것이 열반이 아니라면, 이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열반일 것이다.
  
  [답] 만약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열반이라 한다면
   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무엇에 의해 분별되겠는가? (15)
  
  만약 열반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라면, 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은 무엇에 의해 분별되겠는가? 그러므로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분별해서 이것을 열반이라 하는 것이네.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성립한다면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성립할 것이네. (16)
  
  또 그대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을 분별해서 이것을 열반이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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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존재와 비존재가 성립한다면 그런 연후에 존재와 비존재가 성립할 것이다. 존재와 모순되는 것을 비존재라 하고, 비존재와 모순되는 것을 존재라 한다. 이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은 제3구(第三句)에서 부정되었다.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이 없는데 어떻게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열반은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이 아니다.
  
  여래가 멸도(滅度)한 후에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고도 말하지 말라. (17)
  
  여래가 현재에 있을 때도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말라.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고도 말하지 말라. (18)
  
  또 여래가 멸도한 후든 현재에 있을 때든 여래가 존재한다는 것도 인정되지 않고,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인정되지 않고, 여래가 존재하기도 하고 여래가 존재하지 않기도 하다는 것도 인정되지 않고, 여래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는 것도 인정되지 않는다. 인정되지 않으니 ‘열반이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따위를 분별해서는 안 된다. 여래를 떠나서 누가 열반을 얻겠으며,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어떤 법으로 열반을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때 모든 종류로 열반의 상(相)을 구해 보아도 얻을 수 없다.
  
  열반은 세간과 어떤 차이도 없네.
  세간은 열반과 어떤 차이도 없네. (19)
  
  또 5온(蘊)이 상속하고 윤회하기 때문에 세간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5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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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성은 완전히 공하고 취착이 없으며 적멸해 있다. 이 이치는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모든 법은 발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기 때문에 세간은 열반과 차이가 없고, 열반은 세간과 차이가 없다.
  
  열반의 한계와 세간의 한계
  이 두 한계는 아주 적은 차이도 없네. (20)
  
  또 세간과 열반의 한계를 완벽하게 궁구해 보아도, 한계가 생기는 일이 없고 평등해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아주 적은[毫釐] 차이도 없다.
  
  멸도한 후에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따위, ‘유한하다’ 하는 따위, ‘상주한다’ 하는 따위
  견해들은 열반과 미래세와 과거세에 의거한 것이네. (21)
  
  또 여래가 멸도(滅度)한 후에 ‘여래가 존재한다’,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가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도 하다’, ‘여래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여래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세간은 유한하다’, ‘세간은 무한하다’, ‘세간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 ‘세간은 유한한 것도 아니고 유한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세간은 상주한다’, ‘세간은 무상하다’, ‘세간은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하다’, ‘세간은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다’ 하는 이 세 부류의 열두 견해 중에서, 여래가 멸도한 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따위의 네 견해는 열반에 의거해서 생기는 것이고, ‘세간은 유한하다’, ‘무한하다’ 하는 따위의 네 견해는 미래세에 의거해서 생기는 것이고, ‘세간은 상주한다’, ‘무상하다’ 따위의 네 견해는 과거세에 의거해서 생기는 것이다. 여래가 멸도한 후에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따위를 얻을 수 없듯이 열반도 그러하다. 세간은 과거세[前際]로부터 ‘상주한다’, ‘무상하다’ 하는 따위와, 세간은 미래세[後際]가 ‘유한하다’, ‘무한하다’ 하는 따위를 얻을 수 없듯이 열반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세간과 열반 따위는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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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법들이 공한데 무엇이 유한한 것이고, 무엇이 무한한 것이며,
  무엇이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며, 무엇이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은 것인가? (22)
  
  무엇이 같은 것이고 무엇이 다른 것이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이고, 무엇이 무상한 것이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하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닌 것인가? (23)
  
  모든 법(法)들은 인식할 수 없고, 모든 희론들이 적멸하네.
  어떤 사람에게도 어떤 장소에서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없네. (24)
  
  또 모든 때 모든 종류의 모든 법은 뭇 연(緣)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공해서 자성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 중에서 무엇이 유한한 것이고 누가 유한한 것을 행하며, 무엇이 무한한 것이며, 무엇이 유한한 것이기도 하고 무한한 것이기도 하며, 무엇이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고 누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은 것을 행하는가? 무엇이 상주하는 것이고 누가 상주하는 것을 행하며, 무엇이 무상한 것이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하며, 무엇이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고 누가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닌 것을 행하는가? 몸과 ‘나[神]’가 같다는 것은 무엇이고, 몸과 ‘나’가 다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예순둘의 그릇된 견해들은 완전한 공함 속에서는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인식이 다 지식(止息)하고, 희론이 다 적멸한다. 희론이 적멸하기 때문에 법들의 실상(實相)에 통달해서 안은(安隱)한 도(道)를 얻는다.
  「인연을 관찰하는 장」에서부터 지금까지 법들을 구별해서 궁구해 보아도, 존재하는 것[有]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 것[無]도 없고,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도 한 것[有無]도 없고,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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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非有非無]도 없다. 이것을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라고 한다. 또한 진여ㆍ법성ㆍ실제(實際)ㆍ열반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어떤 때에도 어떤 곳에서도 사람을 위해 열반의 확정된 상(相)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러므로 (게송에서는) “모든 인식이 다 지식(止息)하고 희론이 다 적멸하네”라고 말한 것이다.
  
  
26.12연기를 관찰하는 장[觀十二因緣品] 9偈
  [문] 그대는 대승의 법에 의거해서 제일의(第一義)의 도를 말해 왔다. 나는 이제 성문(聲聞)의 법에 의거해서 제일의의 도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 싶다.
  
  [답] 중생은 무지[癡]에 덮여 있어서 후생(後生)을 위해 3행(行)을 일으키네.
   이 행(行)을 일으키기에 행에 따라서 6취(趣)에 떨어지네. (1)
  
  모든 행(行)을 인연으로 해서 식(識)은 6도(道)의 몸을 받네.
  식의 집착이 있어서 명색(名色)이 증장(增長)하네. (2)
  
  명색이 증장하기에 그것을 인연으로 해서 6입(入)이 생기네.
  근[情]과 경[塵]과 식이 화합해서 6촉(觸)이 생기네. (3)
  
  6촉을 인연으로 해서 3수(受)가 생기네.
  3수를 인연으로 해서 갈애(渴愛)가 생기네. (4)
  
  갈애를 인연으로 해서 4취(取)가 생기고, 4취를 인연으로 해서 유(有)가 생기네.
  취착하는 자가 취착하지 않는다면, 해탈하기에 유가 없을 것이네. (5)
  
[173 / 187] 쪽
  유(有)로부터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으로부터 늙음과 죽음[老死]이 있네.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근심ㆍ비애ㆍ고뇌가 있네. (6)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은 다 태어남[生]으로부터 있는 것이네.
  이런 인연들 때문에 거대한 고(苦)의 집적이 집기(集起)하네. (7)
  
  이것을 태어나고 죽는 행(行)들의 근본이라고 말하네.
  지혜가 없는 자[無明者]가 만드는 것이지 지혜가 있는 자[智者]가 만드는 것이 아니네. (8)
  
  이것이 소멸하기에 이것이 발생하지 않네.
  오직 고(苦)만의 집적이 바르게 소멸하네. (9)
  
  범부는 무명(無明)에 눈이 멀었기 때문에 신업(身業)과 구업(口業)과 의업(意業)으로 후생(後生)의 몸을 위해 6취(趣)16)의 모든 행(行)을 일으킨다. 일으키는 바의 행에 따라서 상과 중과 하가 있다. 식(識)17)은 6취에 들어가 행(行)에 따라서 몸을 받는다. 식의 집착을 인연으로 해서 명색(名色)이 집기(集起)한다. 명색이 집기하기에 6입(入)18)이 발생한다. 6입을 인연으로 해서 6촉(觸)19)이 발생한다. 6촉을 인연으로 해서 3수(受)20)가 발생한다. 3수를 인연으로 해서 갈애(渴愛)21)가 발생한다. 갈애를 인연으로 해서 4취(取)22)
  
  
16) 6도(道)라고도 한다. 미혹한 중생이 업에 따라 나아가는 천신ㆍ인간ㆍ축생ㆍ아귀ㆍ아수라ㆍ지옥 등이다.
17)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
18) 6입처(入處) 또는 6처(處)라고도 한다. 안처(眼處)ㆍ이처(耳處)ㆍ비처(鼻處)ㆍ설처(舌處)ㆍ신처(身處)ㆍ의처(意處)등 이다.
19) 안촉(眼觸)ㆍ이촉(耳觸)ㆍ비촉(鼻觸)ㆍ설촉(舌觸)ㆍ신촉(身觸)ㆍ의촉(意觸).
20) 고수(苦受)ㆍ낙구(樂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21) 애욕(愛欲)에 탐착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욕애(欲愛)ㆍ유애(有愛)ㆍ무유애(無有愛)를 말한다.
22)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
[174 / 187] 쪽
  발생한다. 4취를 취착할 때 신업과 구업과 의업으로 죄나 복이 일어나서, 후의 3유(有)23)를 상속하게 한다. 3유로부터 태어남[生]이 있다. 태어남으로부터 늙음과 죽음[老死]이 있다.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근심ㆍ비애ㆍ고뇌의 여러 가지 환난(患難)들이 생겨서 거대한 고(苦)의 집적이 집기(集起)한다. 그러므로 범부는 지혜가 없어서 태어나고 죽는 행(行)들의 근본을 일으킨다. 지혜가 있는 자[智者]는 (그것들을) 일으키지 않는다. 여실하게 보기에 무명이 소멸한다. 무명이 소멸하기에 행들이 소멸한다. 원인이 소멸하기에 결과도 소멸한다. 이와 같이 12연기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는 지혜를 수습(修習)하기에, 이것이 소멸한다. 이것이 소멸하기에 나아가 태어남, 늙음과 죽음, 근심, 비애, 거대한 고(苦)의 집적이 모두 여실하게 바르게 소멸한다. ‘바르게 소멸하네’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다. 이 12연기가 발생하고 소멸하는 이치는 아비달마 경전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27. 그릇된 견해를 관찰하는 장[觀邪見品] 31偈
  [문] 이제까지 대승의 법으로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는 것을 들었다. 이제 성문의 법으로 그릇된 견해를 타파하는 것을 듣고 싶다.
  
  [답] 내가 과거세에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세간이 상주하는가 하는 따위의 견해들은 모두 과거세에 의거한 것이네. (1)
  
   내가 미래세에 존재하겠는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세간이) 유한한가 하는 따위의 견해들은 모두 미래세에 의거한 것이네. (2)
  
  
23)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
[175 / 187] 쪽
  내가 과거세에 존재했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는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았는가, 이것들은 ‘상주한다’ (‘무상하다’) 따위의 견해들인데 과거세에 의거하는 것이다. 내가 미래세에 존재하겠는가, 존재하지 않겠는가,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겠는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겠는가, 이것들은 ‘유한하다’, ‘무한하다’ 따위의 견해들인데 미래세에 의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은 그릇된 견해이다.
  무슨 이유로 그릇된 견해라 하는가? 이것에 대해 이제 설명하겠다.
  
  과거세에 내가 존재했다는 것은 얻을 수 없네.
  과거세의 나는 금세의 나가 되지 않네. (3)
  
  만약 내가 바로 그 사람이지만 몸이 다르다고 말한다면
  몸을 떠나서 어디에 별도로 ‘나’가 있겠는가? (4)
  
  몸을 떠나서 ‘나’가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성립했네.
  만약 몸이 곧 ‘나’라고 말한다면 그대에게는 도무지 ‘나’가 있지 않은 것이네. (5)
  
  그러나 몸은 ‘나’가 아니네. 몸은 생멸하기 때문이네.
  어떻게 취착이 취착하는 자이겠는가?24)(6)
  
  만약 몸을 떠나서 ‘나’가 있다면 이것은 옳지 않네.
  취착이 없이 ‘나’가 있다는 것인데 실제로는 얻을 수 없네. (7)
  
  금세의 ‘나’는 취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바로 그 취착인 것도 아니며
  취착이 없는 것도 취착이 없지 않는 것도 아니네. 이것은 확정된 이치이네. (8)
  
  
24) ‘어떻게 취착을 취착하는 자로 삼겠는가?’라는 뜻이다.
[176 / 187] 쪽
  내가 과거세에 존재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선세의 ‘나’는 금세의 ‘나’가 아니다. 상주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상주한다고 한다면 무한한 과실이 있다. 왜 그러한가? 가령 사람이 복을 닦은 인연 때문에 천신이 됐다가 이후에 다시 사람이 된 경우에, 만약 선세의 ‘나’가 금세의 ‘나’라면, 천신이 그대로 사람일 것이다. 또 사람이 죄업(罪業)의 인연 때문에 전다라(旃陀羅)가 됐다가 이후에 다시 바라문(婆羅門)이 된 경우에, 만약 선세의 ‘나’가 금세의 ‘나’라면 전다라가 그대로 바라문일 것이다. 비유하자면 제바달(提婆達)이라 하는 사위국(舍衛國)의 바라문이 왕사성(王舍城)에 갔어도 제바달이라고 부르지 왕사성에 갔다고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선세에는 천신인데 후세에는 사람이라면 천신이 그대로 사람일 것이고, (만약 선세에는 전다라인데 후세에는 바라문이라면) 전다라가 그대로 바라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천신이 그대로 사람인 것이 아니고, 전다라가 그대로 바라문인 것이 아니다. 이 상주의 과실들이 있기 때문이다.
  선세의 ‘나’가 금세의 ‘나’가 아니라고 말하자, 이렇게 반박한다.
  “가령 사람이 옷을 빨때는 빨래하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풀 벨 때는 풀 베는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빨래하는 사람이 풀 베는 사람과 다르진 않지만 빨래하는 사람이 그대로 풀 베는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렇듯이 ‘나’가 천신의 몸을 받았을 때는 천신이라고 부르고, ‘나’가 사람의 몸을 받았을 때는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나’는 다르지 않지만 몸은 다르다.”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그대로라면, 천신이 사람이 된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빨래하는 사람은 풀 베는 사람과 다른가, 다르지 않은가? 만약 다르지 않다면, 빨래하는 사람이 그대로 풀 베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듯이 선세의 천신은 그대로 사람일 것이며 전다라는 그대로 바라문일 것이니, ‘나’에게도 또한 상주의 과실이 있다. 만약 다르다면, 빨래하는 사람이 풀 베는 사람이 되지 못하듯이, 천신은 사람이 되지 못하니 ‘나’ 또한 무상해서 ‘나’의 특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로라고 말할 수 없다.
  [문] ‘나’는 그대로이다. 단지 취착에 의해서 ‘이것은 천신이다’, ‘이것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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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고 분별할 따름이다. 취착이란 5온의 몸을 말한다. 업의 인연 때문에 ‘이것은 천신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전다라이다’, ‘이것은 바라문이다’라고 분별하는 것이지 ‘나’는 실제로 천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과실이 없다.
  [답]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몸이 천신이 되고 사람이 되고 전다라가 되고 바라문이 되는 것이어서, ‘나’가 아니라면 몸을 떠나 별도로 ‘나’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제 죄나 복을 지어 생사 윤회하는 것은 모두 몸이지 ‘나’가 아니다. 죄의 인연 때문에 3악도(惡道)25)에 떨어지고, 복의 인연 때문에 3선도(善道)26)에 태어난다. 만약 괴로움ㆍ즐거움ㆍ미움ㆍ기쁨ㆍ두려움 따위가 모두 몸이지 ‘나’가 아니라면 ‘나’를 어디에 쓰겠는가? 마치 속인의 죄를 다스리는데 출가인을 참여시키지 않는 것과 같다. 5온의 인연이 상속해서 죄나 복이 상실되지 않기 때문에 해탈이 있는 것이다. 만약 모두 몸이고 ‘나’가 아니라면, ‘나’를 어디에 쓰겠는가?
  [문] 죄나 복 등은 ‘나’에 의지한다. ‘나’에는 인식 작용[所知]이 있지만 몸에는 인식 작용이 없기 때문에, 인식하는 자는 ‘나’이어서 업(業)을 일으키는 인연이다. 죄나 복은 지어진 것[作法]이기에 짓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짓는 자는 ‘나’이고 몸은 ‘나’가 사용하는 것이고 ‘나’가 거주하는 곳이다. 비유하자면 집 주인이 풀ㆍ나무ㆍ진흙ㆍ매흙[墍:벽에 바르는 흙] 등을 써서 집을 고칠 때 스스로 몸을 위해 쓰임에 따라서 집을 고치기에 좋은 데도 있고 좋지 않은 데도 있다. ‘나’도 이와 같아서, 선이나 악을 짓는 것에 따라서 아름답거나 추한 몸을 받으니 6도(道)의 생사가 모두 ‘나’가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죄나 복의 몸은 모두 ‘나’에 속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집은 주인에게만 속하는 것이지 타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답] 이 비유는 적절하지 않다. 왜 그러한가? 집 주인은 형체가 있고 감촉이 있어서 힘이 있기에 능히 집을 고칠 수 있지만, 그대가 말하는 ‘나’는 형체가 없고 감촉이 없어서 짓는 힘이 없다. 자기에게 짓는 힘이 없기에 다른 것에
  
  
25) 축생ㆍ아귀ㆍ지옥.
26) 인간ㆍ아수라ㆍ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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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 짓도록 시키지도 못한다. 만약 세간에 형체가 없고 감촉이 없으면서도 능히 지을 수 있는 것이 한 법이라도 있다면, 인식 작용[知]이 짓는 자에게 있다는 것을 믿고서 받아들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나’가 짓는 자라면 스스로 괴로운 일[苦事]을 짓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나’가) 기억하는 자라면 즐거운 일을 탐내는 것을 잊고 말 것이다. 만약 ‘나’가 괴로움[苦]을 짓는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 어찌할 수 없이[强] 생기는 것이라면, 여타의 모든 것도 다 스스로 생기는 것이지 ‘나’가 지은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보는 자가 ‘나’라면 눈이 능히 색을 볼 수 있으니 눈이 ‘나’이어야 할 것이다. 만약 눈이 보는데 ‘나’가 아니라면, 보는 자가 ‘나’라는 앞에서 말한 것과 어긋나게 된다. 만약 보는 자가 ‘나’라면,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등 다른 경계를 지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보는 자라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마치 풀 베는 사람이 낫을 써서 풀을 베는 것과 같이 ‘나’도 이와 같이 손 등을 써서 능히 짓는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 경우는 낫을 떠나서 별도로 풀 베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지만 몸과 마음과 감관을 떠나서 별도로 짓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짓는 자가 비록 눈[眼]ㆍ코[鼻] 등으로 지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짓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석녀의 자식이라 해도 능히 짓는 것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감관[根]들은 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오른쪽 눈이 사물을 보아도 왼쪽 눈이 그것을 인식하므로 별도로 보는 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지금 오른 손이 익힌 일을 (후에) 왼 손이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별도로 짓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별도로 짓는 자가 존재한다면 왼 손이 익힌 일을 오른 손도 할 수 있어야 할 터이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짓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 ‘나’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과일을 먹는 것을 보면 입에서 침이 나오는데, 이것이 ‘나’의 상(相)이다”고 말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이것은 기억[念]의 힘이지 ‘나’의 힘이 아니다. 또 이것은 ‘나’를 타파하는 이유가 된다.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침이 나오는 것을 부끄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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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는데도 침이 저절로 흘러나와 제어가 되지 않으니,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전도의 과오가 있게 된다. 선세에는 아버지이던 자가 금세에는 아들이 될 때 아버지와 아들은 ‘나’는 하나인데 몸은 다르다고 하는 것이 된다. 마치 한 집에서 다른 한 집으로 가는 것과 같다. (선세에) 아버지였기에 (금세에도) 아버지이다. 다른 집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나’가 존재한다면 이 두 사람은 동일한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큰 과실이 있는 것이다.
  만약 무아(無我)인 5온의 상속(相續)에도 이 과실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5온은 비록 상속하지만 어떤 때는 작용이 있고 어떤 때는 작용이 없다. 비유하면 계(戒)를 지키는 자는 포도즙은 마셔도 되지만 포도주는 마셔서 안 되는데, 만약 변질되어 포도산[苦酒]이 되면 다시 마셔도 되는 것과 같다. 5온의 상속도 이와 같아서 작용이 있을 때가 있고 작용이 없을 때가 있다. 만약 시종 동일한 ‘나’가 존재한다면 이와 같은 과실이 있겠지만, 5온의 상속에는 이와 같은 과실이 없다. 단지 5온이 화합한 것일 뿐이기에 임시로 ‘나’라고 이름붙인 것이니 확정된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하면 대들보와 서까래가 화합해서 집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대들보와 서까래를 떠나서 별도로 집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5온이 화합해서 집이 존재하는 것이기에 5온 없이 별도로 ‘나’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단지 임시로 이름붙인 것[假名]일 뿐이지 확정된 실체[定實]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앞에서 “취착을 떠나서 별도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 취착에 의해서 취착하는 자를 분별해서 ‘이것이 천신이다’, ‘이것이 사람이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모두 옳지 않다. 취착만이 존재할 뿐이지 별도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취착을 떠나서 별도로 ‘나’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옳지 않다. 만약 취착을 떠나서 ‘나’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나’의 상(相)을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상이 없는데도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취착을 떠나서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다.)
  만약 몸을 떠나서 ‘나’가 존재하지 않고 몸이 바로 ‘나’라고 말한다면 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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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몸에는 생멸의 상(相)이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또 어떻게 취착이 곧 취착하는 자이겠는가? 만약 취착을 떠나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5온을 취착하지 않고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한다면 5온을 떠나서 별도로 취착하는 자가 존재할 것이니, 눈[眼] 등의 감관[根]에 의해서 지각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지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취착을 떠난 것도 아니고, 취착 그대로인 것도 아니며, 취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취착이 없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것은 확정된 이치이다. 그러므로 과거세에 ‘나’가 존재했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과거세의 ‘나’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옳지 않네.
  과거세의 ‘나’가 금세의 ‘나’와 다르다는 것도 옳지 않네. (9)
  
  만약 다르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없어도 지금의 것이 존재할 것이네.
  ‘나’가 과거세에 머물러 있고 금세에 ‘나’가 스스로 태어나는 것이네. (10)
  
  그렇다면 단멸이니 업과 과보를 상실하는 것이네.
  그 자가 지었는데 이 자가 받는 이와 같은 과실들이 있네. (11)
  
  선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금세에 존재한다는 것에도 과실이 있네.
  ‘나’가 지어진 것이고 원인이 없는 것이네. (12)
  
  과거세의 ‘나’가 금세의 ‘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네. 왜 그러한가? 과거세의 ‘나’는 금세의 ‘나’와 다르지 않다. 만약 금세의 ‘나’가 과거세의 ‘나’와 다르다면, 그 세(世)27)의 ‘나’가 없이 금세의 ‘나’가 존재할 것이다. 또 과거세의 ‘나’는 그 세(世)에 머물러 있고 이 세(世)의 몸은 스스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단멸의 극단에 떨어져서 모든 업과 과보를 상실하게
  
  
27) 과거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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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다. 또 그 자가 죄를 지었는데 이 자가 과보를 받게 된다. 이와 같은 무한한 과실들이 있다. 또 이 ‘나’가 선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금세에 존재하게 되는데 이것도 과실이 있다. ‘나’는 지어진 것이고 원인이 없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세의 ‘나’는 금세의 ‘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와 같이 과거세에 나는 존재했다,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다는 견해들은 모두 옳지 않네. (13)
  
  또 그와 같이 궁구해 보니, 과거세에 대한 그릇된 견해들, 즉 ‘존재했다’,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았다’ 하는 그릇된 견해들은 앞에서 그 이유를 말한 과실이 있기 때문에 모두 옳지 않다.
  
  나는 미래세에 존재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들은 모두 과거세의 경우와 같네. (14)
  
  나는 ‘미래세에 존재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이와 같은 4구(句)28)는 과거세의 경우와 과실이 같으니, 그 속에 들어 있는 대로 설명해야 한다.
  만약 천신이 그대로 사람이라면 상주의 극단에 떨어지네.
  천신은 태어나지 않을 것이네. 상주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네. (15)
  
  또 만약 천신이 그대로 사람이라면 이것은 상주하는 것이 된다. 천신이 사람
  
  
28) 존재할 것이다,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의 4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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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람이라 하겠는가? 상주하는 것은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주한다는 것도 옳지 않다.
  
  만약 천신이 사람과 다르다면 이것은 무상한 것이 되네.
  만약 천신이 사람과 다르다면 이것은 상속이 없는 것이네. (16)
  
  또 만약 천신이 사람과 다르다면 무상한 것이 된다. 무상하다면 단멸 등의 과실이 있게 된다. 앞에서 말한 과실과 같다. 만약 천신이 사람과 다르다면 상속이 없는 것이다. 만약 상속이 있다면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반은 천신이고 반은 사람이라 한다면 상주함과 무상함이라는
  두 극단에 떨어지게 되네. 이것은 옳지 않네. (17)
  
  또 만약 중생이 몸의 반은 천신이고 몸의 반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상주함과 무상함이 있게 된다. 반인 천신은 상주하는 것이고 반인 사람은 무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한 몸에 두 상(相)이 있다는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상주하는 것과 상주하지 않는 것 이 둘이 동시에 성립한다면
  그렇다면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성립할 것이네. (18)
  
  또 만약 상주하는 것과 상주하지 않는 것 둘이 동시에 성립한다면 연후에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성립할 것이다.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29)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지금 실제로는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29) 상주함과 무상함이 동시에 있는 것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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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은 것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
  또 이제 생사에 시작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만약 어떤 법에 오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하고 가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생사에는 시작이 없을 것이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은 없네. (19)
  
  만약 어떤 법에 어디에서 오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하고 어디로 가는 것이 확정되어 존재한다면, 생사에는 시작이 없을 것이다. 이 법을 지혜로써 구해 보아도 어디서 오는 것을 얻을 수 없고 어디로 가는 것을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생사에는 시작이 없다. 이것은 옳지 않다.
  
  이제 상주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상주하지 않는 것,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존재하겠는가? (20)
  
  또 만약 그렇다면, 지혜로써 구해 보아도 상주하는 것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상주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상주하는 것에 의존해서 상주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둘 모두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상주하면서 무상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존재하겠는가?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 것에 의존해서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 않지도 않은 것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과거세에 의거해서 ‘세간은 상주한다’ 등의 4구(句)30)는 얻을 수 없다.
  ‘유한하다’, ‘무한하다’ 등의 4구31)는 미래세에 의거하는 것인데 이것은 얻을
  
  
30) 상주한다, 상주하지 않는다, 상주하면서 상주하지 않는다, 상주하지도 않고 상주하지도 않는다의 4구이다.
31) 유한하다, 무한하다, 유한하면서 무한하다,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의 4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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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없다. 이제 설명하겠다. 왜 그러한가?
  
  만약 세간이 유한하다면 어떻게 후세가 존재하겠는가?
  만약 세간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후세가 존재하겠는가? (21)
  
  만약 세간이 유한하다면 후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실제로 후세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옳지 않다. 만약 세간이 무한하다면 또한 후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후세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세간이 무한하다는 것도 옳지 않다.
  또 이 두 극단은 얻을 수 없다. 왜 그러한가?
  
  5온[陰]의 상속은 등불의 불꽃과 같네.
  그러니 세간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네. (22)
  
  5온(蘊)에서 다시 5온이 발생한다. 이 5온은 순차적으로 상속한다. 마치 뭇 연(緣)이 화합해서 등불의 불꽃이 있을 때 만약 뭇 연(緣)이 소멸하지 않으면 등불이 소멸하지 않고 뭇 연이 소멸하면 등불이 소멸하듯이. 그러므로 세간이 유한하다거나 무한하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하고 이 5온에 의존해서
  다시 후의 5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간은 유한할 것이네. (23)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하지 않고 또 이 5온에 의존해서
  후의 5온의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간은 무한할 것이네. (24)
  또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하고 이 5온에 의존해서 다시 후의 5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세간은 유한할 것이다.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했을 때 다시 다른 5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때를 한계[邊]라고 한다. 한계는 최후의 몸[末後身]을 말한다. 만약 전의 5온이 괴멸하지 않고서 이 5온에 의존해서 후의 5온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세간은 무한할 것이니, 이것을 상주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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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세간은 무한하다는 것은 옳지 않다. 세간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국토 세간과 중생 세간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중생 세간이다.
  또 『사백관론(四百觀論)』32)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참된 가르침, 말하는 자, 듣는 자를 얻기가 어려우니
  그러니 생사는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네.
  
  참된 가르침을 얻을 수 없기에 생사 윤회는 유한하지 않다. 어떤 시기에 참된 가르침을 들을 수 있어 道를 얻기 때문에 무한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제 다시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것을 타파하겠다.
  
  만약 세간의 반은 유한하고 세간의 반은 무한하다면
  이것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것인데, 옳지 않네. (25)
  
  만약 세간의 반은 유한하고 반은 무한하다면 이것은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한 법에 두 상(相)이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왜 그러한가?
  
  그 5온을 취착하는 자가 어떻게 한 부분은 파괴되고
  한 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이것은 옳지 않네. (26)
  취착도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한 부분은 파괴되고
  한 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이것도 옳지 않네. (27)
  
  5온(蘊)을 취착하는 자가 어떻게 한 부분은 파괴되고 한 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한 가지의 것이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할 수는
  
  
32) 성천(聖天)의 『四百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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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다. 취착도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한 부분은 파괴되고 한 부분은 파괴되지 않겠는가? 상주하는 것이기도 하고 무상한 것이기도 하다는 두 상(相)의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간이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이제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는 견해를 타파하겠다.
  
  만약 유한한 것과 무한한 것 이 둘이 성립할 수 있다면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다는 것도 성립할 것이네. (28)
  
  유한한 것과 반대되기에 무한한 것이 존재한다. 마치 긴 것과 반대되기에 짧은 것이 존재하듯이. 있는 것[有]이나 없는 것[無]과 상반되기에,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한 것이 존재한다. 있는 것이기도 하고 없는 것이기도 한 것과 상반되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존재한다. 만약 유한한 것이기도 하고 무한한 것이기도 한 것이 확정되어 성립한다면,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닌 것이 존재할 것이다. 왜 그러한가? 서로 의존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이미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는 제3구(第三句)를 타파했으니 어떻게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 존재하겠는가? 서로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구해 보아도, 미래세에 의지해서 세간은 유한하다 등의 네 견해들 모두 얻을 수 없다.
  
  모든 법들이 공한 것인데, 세간은 상주한다 등의 견해들,
  어느 곳에서 어느 때에 누가 이 견해들을 일으키겠는가? (29)
  
  또 위에서는 성문의 법으로써 견해들을 타파했다. 지금은 이 대승의 법에서는 모든 법들이 본래부터 완전히 공한 것[空性]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공성[空性法]에는 사람도 있지 않고 법도 있지 않으니 그릇된 견해든 바른 견해든 내서는 안 된다. ‘어느 곳[處]’이란 대지[土地]를 말한다. ‘어느 때[時]’란 년ㆍ월ㆍ일을 말한다. ‘누가’란 사람을 말한다. ‘이[是]’란 견해들 자체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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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 만약 ‘상주한다’, ‘무상하다’ 등이 확정된 견해라면 이 견해들을 내는 사람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나’를 타파했으니 이 견해들을 내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색이 지금 눈 앞에 보이는 처소도 타파되거늘 하물며 시간과 장소이랴? 만약 견해들이 존재한다면 확정된 실체[定實]가 존재할 것이고, 만약 확정된 것이라면 타파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까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타파해 왔으므로 견해들에는 확정된 자체[定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떻게 그런 견해들을 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게송에서 “어느 곳에서 어느 때에 누가 이 견해들을 내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위대한 성인 구담(瞿曇)께서는 연민을 품고서 이 진리를 말씀해 주셔서
  모든 견해들을 다 끊게 하셨으니, 나는 이제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리네. (30)
  
  모든 견해들이란 간략히 말하면 5견(見)33)이고 자세히 말하면 62견(見)이다. 이 견해들을 끊게 하기 위해 진리[法]를 말씀하셨다. 위대한 성인 구담[瞿曇]은 지혜가 무량하고 무한하며 불가사의한 분이시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조아려 절을 드린다.
  
33) 유신견(有身見)ㆍ변견(邊見)ㆍ사견(邪見)ㆍ견취견(見取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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