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32/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 25. 10:57
 

 

서장 대 강좌 8-2 강

 

 

  인용한 내용들을 여기서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인용문하고 자기의 소견의 문제. 우리 일상사와 공부. 아침에 일어나고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밥 먹고 출근하는 그런 일상사와 공부의 문제를 조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p. 141

   18. 진소경 계임에게 답함 (2)

  편지를 받아 보니, 지난 번 저의 편지를 본 뒤부터 매번 시끄러운 가운데서 피할 수 없는 곳을 만나서 항상 점검하고 있으나, 이것은 출근해서 사무를 보거나 자기 맡은 일을 하면서 사이사이에 계속 ‘내가 이거 화두를 들고 있는가? 어떤가?’ 점검한다는 것입니다.

  공부에 힘을 붙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해보니까 일은 일이고 공부는 공부고, 공부가 제대로 따로 안 되는 겁니다.

다만 그 피할 수 없는 곳이 곧 공부를 해서 마친 자리입니다.

이것이 아주 뜻이 깊고 궁극의 말씀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곳. 지금 사무를 본다. 운전을 한다. 아니면 호미를 들고 밭을 맨다. 철저히 그 일을 할 때, 그것은 모든 것이 끝난 자리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한 것이 일상사거든요.

우리가 지금 아무 다른 생각 없이 집에 무슨 일이 있든지 어떤 일이 있든 지간에, 다른 생각 없이 철저히 강의 잘 듣고 메모 잘 하고 글 잘 따라서 읽고, 이렇게 해서 더 이상의 생각이 없으면 끝입니다.

여기에서 내가 100% 현현해요. 

100% 내가 작용하고 있어요.

나의 100%삶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고 오늘은 기대했던 것 보다 재미가 별로구만.’ 하고 다른 생각하고 있으면 공연히 시간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100% 자기의 삶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하든지 全機生(전기생) 全機死(전기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기생 전기사.

철저히 죽고 철저히 살라.

더 이상 틈을 주지 말라.

어떤 일에든지 더 이상 틈을 주지 말고 철저히 거기에 몰입할 때, 거기에 나의 100% 삶이 표현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되었지 더 이상 뭐가 있습니까?

더 이상 뭐가 있는가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이미 그 사람은 틈이 생긴 것이고, 틈이 생기면 100% 삶이 아닙니다.

전기생 전기사가 아니라고요.

죽을 때 재대로 못 죽어요.

죽을 때 팍 죽고, 살 때 아주 확실하게 살고요.

피할 수 없는 곳이 곧 공부를 해마친 자리입니다.

만약 다시 힘을 써서 점검하면, 거기 괜히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나? 어떤가?’ 그냥 공부하면 될 텐데 왜  ‘내가 지금 공부 잘하고 있나? 못하고 있나?’ 점검하면 또한 도리어 멀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공부에 틈이 생긴 사람입니다.

그냥 몰입해서 하면 되는 겁니다.

더 이상 점검하지 마세요.

점검하면 벌써 틈이 생겨서 놓친다고요.

저의 말을 놓쳐요.

점검하는 것이 공부 잘하는 것 같지요? 천만입니다.

점검할 겨를도 없어야 됩니다.

점검할 생각이 전혀 안 떠오르고 그냥 몰입해버리면, 그 사람은 아주 철저히 공부 잘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좋은 말이 있습니다.

옛날 魏府(위부)의 老華嚴(노화엄)이.

회동선사인데위부 사람이고, 화엄경을 가르치다가 늦게 흥화존장 스님을 참배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화엄의 대가입니다.

그래서 노화엄이라고 합니다.

노화엄이 말하시기를 “불법이 일상 생활하는 곳과 行住坐臥(행주좌와)하는 곳과 차 마시고 법 먹는 곳과 말로 서로 묻는 곳과 작용하는 곳에 있다.”고 했습니다.

밑줄 그으는 소리가 왜 안 납니까?

밑줄 그을만하고 마는... 하하하

불법이 일상 생활하는 곳과 행주좌와하는 곳과 차 마시고 법 먹는 곳과 말로 서로 묻는 곳과 작용하는 곳에 있다.

여기에 하는 곳에 있다.

라고 이렇게 표현은 했는데 이것이 조금 표현이 덜 됐습니다.

“묻고 작용하는 그 것이다.” 묻고 작용하는 그 곳에 있다 가 아니고,

일상생활 하는 그것이다.

행주좌와 하는 그것이다.

법 먹는 그것이다.

말로 서로 묻고 작용하는 그것이다.

이렇게 하세요.

이것이 더 직접적입니다.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이면, ‘이것이 불법인가?’ ‘이것이 내가 마음을 100% 다 쓰는 일인가?’ 이렇게 마음을 틈을 주면 도리어 옳지 않게 됩니다. 정히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곳을 만나서, 우리가 화장실가고 식사하고 누워 자고, 손님 오면 접대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지요.

피할 수 없는 것 이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은 승속을 막론하고, 선방에 있으나 시중에서 장사를 하나 이 일은 똑 같습니다.

기본적인 이 일은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표현한다고 한 것이 도가 뭐냐?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그 일 아니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피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는 그 일 아니하는 사람 있으면 한 번 나와 보라고요.

없습니다.

부처고 조사고간에 없습니다.

어느 부처 어느 조사도 그 일은 다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이 바로 도”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곳을 만나서, 절대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점검한다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공부 이 정도면 오늘 도 끝났습니다.

  조사가 이르기를 “분별심을 내지 않으면, 이것도 역시 그냥 하면 하지, ‘서장, 이것이 불법을 제대로 표현한 것인가? 어떤가?’ 이런 사이에 뭔가 분별심이 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분별심을 내지 않으면,비어지고 밝아 저절로 비친다.”고 했습니다.

 

虛明自照(허명자조)한다.

신심명에 있는 말인데 참 좋지요?

허명자조 한다.

환하게 그냥 있는 대로 그대로 보는 겁니다.

안경에 색칠한 선글라스가 아니라 투명한 안경으로모든 사물과 사건을 그대로 보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붉은색은 붉게 보고, 푸른색은 푸르게 보는 것이지요.

그것이 허명자조입니다.

모든 이치를 달리 보지 않고 이치대로 꿰뚫어 보는 것이지요.

내 욕심이 개재되니까 이것을 어떻게 비꼬아 가지고, 틀어가지고, 분재하는 사람들처럼 그냥 잘 자라게 놔두면 좋을 텐데 나무를 공연히 캐다가 막 그냥 철사로 얽어서 한 5~6년쯤 지나면 그 얽어놓은 대로, 비꼬아진 대로 굳어지거든요. 불교를 접하면서 가장 정상적으로 살도록,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뭐 이상하게 뭘 한 번 해볼까하는 그런 마음으로 불교에 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실지로 그래요.

그러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비꼬아지는 것입니다.

방거사가 나왔네요.

또 방거사가 말하기를 “일상사가 특별한 것이 없어서 오직 내 스스로 짝하여 어울리도다! 일상사가 그대로 도라는 말이지요.

일체에 가지고 버림이 없고, 곳곳에 어긋나지 않는다.

우리는 왜 그렇게 가질 것이 많고 버릴 것이 많은지, 일일이 만나는 족족 ‘저 놈은 미운 놈.’ 고개 돌리고, ‘저 사람은 반가운 사람.’ ‘이것은 나한테 이로운 것.’ ‘이것은 나한테 해로운 것.’ 끊임없이 저울로 달고 취사선택 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저울로 달고 취사선택 하는 것이 중생놀음입니다.

중생의 살림살이입니다.

그냥 그대로 좀 봐 주면 좋은데...

 

일체에 가지고 버림이 없고, 곳곳에 어긋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누가 이름 하였는가? 옳다 그르다하는 것을 누가 이름 했는가? 언덕과 산이 한 점 티끌에 끊어졌도다!

이것은 번역을 옳고 그름을 누가 이름 했는가?

이것 보다는 밑에 원문 볼까요?

원문 봅시다. 중간 단락.

  祖師云分別不生(조사운분별불생)하면 虛明自照(허명자조)라하며 又龐居士(우방거사)가 말하기를 日用事無別(일용사무별)이라

일용사가 별것이 없다.

唯吾自偶諧(유오자우해)로다 오직 내 스스로 짝해서 그대로 살아간다.

頭頭非取捨(두두비취사)요 낱낱이 취하고 버릴 것이 없고,

處處勿張乖(처처물장괴)니라 곳곳에서 맞거나 어긋나는 것이 없다.

朱紫(주자)를 誰爲號(수위호)오 이 말이거든요.

는 좀 낮은 벼슬. 는 좀 높은 벼슬입니다.

허리띠 색깔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장관. 차관

이렇게 알면 됩니다.

장관이니 차관이니 그것을 누가 이름 했는가?

그냥 임명장을, 장관임명장 줬으니까 장관이고, 차관임명장 줬으니까 차관입니다.

그 사람이 장관의 씨가 따로 있나요?

차관의 씨가 따로 있나요?

본래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고요.

 

丘山(구산)이 絶點埃(절점애)입니다.

큰 산 작은 산. 작은 산 큰 산이 絶點埃라.

전부 먼지 하나하나가 쌓여서 크게 쌓이면 큰 산 되고, 작게 쌓이면 작은 언덕이 되는 것이지요.

다 먼지입니다.

근본은 먼지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잘못 보기 시작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길을 가다가 비석을 잘못보고 도둑놈인줄 알고, 지나가는 사람 강탈하는 도둑놈인줄 알고는 냅다 도망가는 겁니다.

도망가다가 어두운 길이니까 자빠지고 넘어지고 피투성이 상처투성이가 되어서 다리도 부러지고 팔도 부러집니다.

만약에 환하게 밝은 길이면 지나가다가 비석이 있으면 누구 비석인가 가서 보자하고, 가서 잠깐 쉬기도 하고 읽어도 보고 누군가 알아도 보고 ‘아, 이 사람 우리하고 종씨네’ 이렇게도 이야기가 나올 수가 있고 얼마나 그것이 좋습니까?

그런데 어두우니까 그 좋은 비석. 거기서 쉬어 가야할 그 비석의 자리가 도둑놈이 서 있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도망가다가 상처투성이 피투성이가 되는구나.

 

  우리의 삶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물과 사건을 제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꿰뚫어 보지 못하고 잘못 보는 관계로, 잘못 보는 관계로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리 상으로 遍計所執性(변계소집성)이다.

依他起性(의타기성)이다.

이런 어려운 말을 씁니다만,

뱀도 그렇잖아요?

짚으로 밧줄을 꼬았는데 한 동가리가 긴 것이 길에 있거든요.

어두운 데서 보니까 큰 뱀인 줄 알고, 알고 냅다 도망가는 겁니다.

그것은 뱀도 아니고 밧줄도 아니고 그냥 짚입니다.

근본은 짚이라고요.

 

丘山(구산)이 絶點埃(절점애)입니다.

큰 산 작은 산이 전부 한 점의 먼지가 쌓이고 쌓여서 그렇게 된 것이고, 짚 하나하나가 쌓여서 밧줄이 되고요.

그 밧줄을 우리가 잘못 보면 뱀으로 보고요. 그

래서 벌어지는 상황들이 이렇게 어려운 상황들로 됐다 이 말입니다.

神通並妙用(신통병묘용)이여 運水及搬柴(운수급반시)라

아~ 기가 막힌 말입니다.

이말, 이거 10자만 외우세요.

神通並妙用이여, 신통묘용이 무엇인가?

수도꼭지 틀고 가스 불 켜는 것이다.

번역 아주 근사하게 했네요.

수도꼭지 틀고 가스 불 켜는 그것이 신통묘용입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들도 다 합니다.

수도꼭지 틀고 가스 불 켜는 것은 어린아이들도 다 한다고요.

그것이 신통입니다.

그것이 신통묘용이라고요.

리모콘 착 누르면 영화가 착 펼쳐지지요?

탁 눌러버리면 또 탁 꺼지지요?

얼마나 신통묘용입니까?

수도꼭지 틀고 가스 불 켤 줄 아는 그 사실이 신통묘용입니다.

기상천외한 옛날에 유리겔라 같이 그렇게 사기 치는 그런 이상한 것을 생각하고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적지 않습니다.

 

  一切法(일체법)이 皆是佛法(개시불법)이라고 금강경에서 그랬잖아요?

일체법은 뭡니까?

일체법의 제일 큰 항목은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 제일 큰 항목입니다.

우리 살림살이 그것밖에 더 있나요?

남 모함 하는 것. 자기 허물은 은폐하는 것.

이런 것이일체법입니다.

제일 큰 항목입니다.

우리 살림살이 그것이라고요.

그런데 뭐라고요?

皆是佛法이다 그랬어요.

그것이 도다 그랬어요.

 

諸法無行經(제법무행경)이라고 영명연수선사가 인용한 受菩薩戒法序(수보살계법서)라고 하는 거기에 보면

야~ 탐 진 치 삼독이 즉시 도니라 이런 차원 높은 소리를 했습니다.

어떤 선사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금강경을 좀 더 부연 설명한 것입니다.

 

一切法이 皆是佛法이라고하는 것을 좀 더 부연하면,

탐 진 치 삼독이 다 불법이니라.

그렇게 주해를 달 수 있는 입니다.

금강경의 원문을 갖다놓고 제법무행경을 갖다가 주해를 달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해가 좀 되는 겁니다.

일체법이라는 제일 큰 항목들이 그것입니다.

물론 자질구레한 항목들도 많지만, 탐 진 치 삼독과 8만4천 번뇌가 일체법입니다.

그런 탐 진 치 삼독의 번뇌로 더불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실.

우리가 번뇌를 없앤다.

없앤다하고 그것을 잠재워야 된다.

떠나야 된다.

떠난 사람 누구 있으면 한번 나와 보세요.

그것이 우리 살림살이라고요.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저~기 차원 낮은 아주 저급한 불교에서는 그것을 떠나야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전이 많습니다.

여러분들 그 동안 불교공부 하면서 그런 것을 없애야 된다고.

어떻게 하더라도 탐 진 치 삼독을 버려야 된다고, 8만4천 번뇌를 제거해야 된다는 소리 많이 들었지요?

아주 저급한 유치원 불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간화선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면 안 됩니다.

금강경만 해도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요.

一切法이 皆是佛法이라고 했잖아요?

일체법이 뭡니까?

탐 진 치 삼독이 제일 큰 불법입니다. 

그리고 諸法無行經에서도 탐 진 치 삼독이 즉시 도다.

그것이 그대로 불도라고 그랬습니다.

아~ 참 대단 하지요?

이제 마음 놓고 사세요.

  정말입니다.

마음 놓고 사세요.

정말 이런 이치가 마음에 계합이 되어서 마음 놓고 사는 사람은 크게 탐 진 치 삼독 부리지도 않습니다.

혹 한 번씩 조금씩 부리지요.

그러다가 보면 어느 사이엔가 탐 진 치 삼독이 다 사라집니다.

그것을 노리고 하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절대 그것을 목표로 해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더 왕성해도 상관없습니다.

줄어들어도 상관없고요.

줄어들고 왕성하고에 초점을 맞추고 하는 소리가 절대 아닙니다.

하다보면 줄어든다 이겁니다.

가벼워집니다.

아주 가뿐해집니다.

뭘 그렇게 욕심 부릴 것이 있겠습니까?

그쯤 된. 소견이 그쯤 된 사람은 그렇게 욕심 부릴 일이 없습니다.

 

  “평상심이 도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평상심이 뭡니까?

좋은 것 있으면 갖고 싶은 것이 우리 평상심 아닙니까?

평상에 늘 그러잖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의 그릇이 된 사람이 딱 오면 아주 애착을 합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저 놈을 잘 가르쳐서 도를 깨닫도록 해야지.’ 이 얼마나 큰 욕심입니까?

우리가 백화점 진열장 앞을 지나 가다가 마음에 든 옷이 착 걸려있다면 몇 번 보는 듯 했는데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물건 앞에 서 있습니다. 자기도 언제 들어갔는지 몰라요.

그것이 인간사입니다.

그것이 절대 잘못 된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부처는 그럴 줄 알아야 됩니다.

좋은 것이 있으면 그냥 홀딱 반해서 정신 다 잃고, 그것이 더 심하면 돈도 없이 들고 뛰는 겁니다. 허허허허허허~~~

아니면 카드를 가지고 그냥 막 긁는 겁니다.

  그것 인간사 아닙니까?

우리가 각자 좋아하고 취미가 달라서 그래요.

도인들은 법기가 오면 그걸 그냥 자기 사람 만들고, 어떻게 하더라도 저놈을 도를 깨우쳐서 법을 오래오래 전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 안달합니다. 

밤잠 못잡니다. 그것 사람 만들려고...

 

백화점 진열대 보고 자기도 모르게 들어가서 돈도 없는데 그 물건을 덥석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하는 것과 똑같지 뭡니까? 그

것이 뭐가 다릅니까?

  저는 그전에 蘭(난)을 좋아해서 그때 서울에 잠깐 있을 때입니다.

종로 서점엔가 거기 가서 난 책을 봤어요.

한난만 쭉 해놓은 책이 있습니다.

그때는 사진 기술이 별로일 때인데도 그래도 일본에서 들어온 책이어서 상당히 표현이 잘 되었더라고요.

그때 돈이 없어서 못 샀는데 그 날 저녁에 잠이 안 오는 겁니다.

야~, 그런 일이 다 있었습니다.

그 이튿날 어떻게, 어떻게 구해서 가서 당장 샀지요.

그렇게 된다니까요.

그 대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각자 좋아하는 데로의 일입니다.

인간의 모습은 그것입니다.

우리가 깨어놓고 다 이야기 합시다.

다 그런 것입니다.

거기서 거기라고요.

그러니까 탐 진 치 삼독이 즉시 도다.

 

  又先聖(우선성)이 云(운) 但有心分別計較(단유심분별계교)하면 다만 마음을 두어서 분별하고 계교할 것 같으면,

自心顯量者實皆是夢(자심현량자실개시몽)이라 내 마음에 나타난 것.

顯量이라고 합니다.

내 마음에 나타난 것이 다 꿈이다 이겁니다.

분별 계교할 것 같으면 거기에 개입 시켜서 이래저래 마음 쓰면, 이것을 이럴까? 저럴까?

切記取(절기취)어다 간절히 기억해서 취할지어다.

기억하고 기억할지어다.

 

  p.143

  피할 수 없을 때에 마음을 헤아리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 이것이우리 일상생활 에서이지요.

헤아리지 말아야 합니다.

냥 하라는 말입니다.

식사 하면 바로 식사하고, 잠자면 딱 잠들고,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먹고 자고 하는 일이...

 

마음을 헤아리지 않을 때에 일체가 나타나 이루어질 것입니다.

철저히 죽고 철저히 살고 철저히 자고 철저히 먹고, 그냥 먹으면 먹는 일에 그냥 몰두하고, 자면 자는 일에 그냥 몰두하고, 직장에서 자기 맡은 일 하면 맡은 일에 몰두하고...

  또한 영리함을 아는 것도 쓰지 말며, 둔함을 아는 것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아, 이거 공부에 둔한가? 영리한가?’

‘왜 이렇게 나는 둔한가?’

이런 생각도 하지 말라. 그 생각하는 사이에 공부 좀 더 하세요.

자기 점검한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그냥 하는 겁니다.

자기 생긴 대로 그냥 열심히 하는 것이지, ‘내 아이큐가 얼마나 되는가? 가서 한 번 알아볼까?’ ‘내 공부를 이렇게 하면 되는가? 어떤가?’그런 시간에 공부 더 하시라고요.

  모두 그 영리하고 둔한 일에 관계가 없으며, 그 고요하고 어지러운 일에 관계가 없습니다.

정히 피할 수 없을 때를 만나서 갑자기 識心(식심)을 잃으면

몰두하면 이 말입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손뼉을 치고 크게 웃게 될 것입니다.

박장대소를 하게 되는데 그 박장대소는 깨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디에든지 몰두할 때, 몰두할 때 그것이 깨달음과 가까워지는 것이지, 대혜스님이 보기에 그래요.

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냥 빠져 들어가면 될 텐데, 좀 들어가다가 그만 괜히 거기서 사량 분별을 하는 겁니다.

사량 분별을 하고 이것저것을 자꾸 저울질 하고,헤아리고, 거기에서 공부가 늦어지고 공부가 딴 길로 가더라는 말입니다.

  이 일에 한 털끝만치라도 공부하여 증득함을 추구하면 사람이 손으로 허공을 움키고 만지는 것과 같아서

허공을 아무리 만져보세요.

허공을 만져지는가요?

이럴 때 한번 손들어서 만져보세요.

공부하여 증득하는 것을 추구하면 허공을 손으로 만지는 것과 같다 이겁니다.

럼 어떻게요? 다만 더욱 수고로울 뿐이다.

피로하기만 하지요.

안 만져지면 자꾸 만지려고 하니까 피로만 할 뿐이지요.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라니까요.

본래 갖추고 있는 것이지 공부하여 증득함을 추구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아주 최 상승 법문입니다.

왜 간화선인가?

간화선을 어떻게 잘 하라고, 물론 그런 말도 여기 보면 있습니다.

화두 잘 들라고 하는 그런 말도 있지만, 화두 들고 말고 하는 그런 차원 넘어서 이것은 최 극단적인 이야기입니다.

깨달으려고 하면 괜히 피로할 뿐이다 이겁니다.

  응접할 때에는 다만 응접하고, 靜坐(정좌)가 필요하면 다만 정좌하되 앉을 때에는 앉는 것(唟)에 집착하여 구경을 삼지 말아야 합니다.

앉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을 해서, 제가 수십 번 이야기하지만 그것도 결과부좌 하면 더 근사한가 싶어서 되지도 않는 결과부좌 하다가 관절염만 앓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체질에는 반가부좌가 맞으니까 꼭 반가부좌만 하지 결과부좌는 하지 마세요.

그것은 인도사람 체질에 결과부좌가 맞는 겁니다.

참선 좀 배웠다고 결과부좌 틀고 앉으면 공부 잘 되느냐? 그러면

  선요에 고봉스님 같은 이는 3년 동안 선방에 들어가서 한 번도 앉은 적이 없습니다.

화장실 가고 식사 하는 동안 잠깐 앉았습니다.

그 외에는 3년 동안 한 번도 앉은 적이 없다고요.

계속 돌아다녀요.

그러면 그 사람은 공부 하나도 못해야 될 것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그 사람이 공부 제일 잘한 사람입니다.

앉는 것 하고 관계없는데 앉는 것만 그렇게 고집한다니까요.

그것에 그렇게 어떤 가치부여를 할 것이 아니라, ‘아, 앉는 것도 때로는 행 주 좌 와 이런 여러 가지 모습 중에 한 방편이다.’ 그렇게 알면 되는 겁니다.

우리 몸뚱이를 어떻게든 둬야하니까요.

세워 놓든지 눕혀 놓든지 걸어 다니게 하든지 앉혀 놓든지 뭔가 해야 하니까요. 그 중에 앉는 것이 제일 쉬우니까 그래서 앉는다는 얘기가 나왔지, 여기서 지적 했듯이 앉는 것을 究竟(구경)을 삼으면 큰일 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릇된 스승 무리들이 많이 黙照禪(묵조선)을 究竟法(구경법)으로 삼아서 후진들을 의심하고 그릇되게 하므로, 후진들을 크게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원수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힘써 꾸짖어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말법의 폐단을 구제하고자 합니다.

대혜스님께서 이런 묵조선과 간화선의 관계에 대해서 하신 말이지만, 이것은요. 우리가 우리 현실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불자로서 불법이 정말 얼마나 많이 펼쳐져야 하고, 또 얼마나 정법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불교가 전해져야 하는가 하는 이런 우리들의 문제를 이끌어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제가 원수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출가한 사람이, 그리고 도 닦는다는 사람이, 남하고 원수 맺으면 되겠습니까?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혜스님 같은 도인도 원수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겁니다. 그리고 사정없이 입에 거품을 물고 비난하고 욕하고, 내가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것은 바로 잡아야 되겠다.

이렇게까지 원력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뭐라고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말법의 폐단을 구제하고자 한다. 랬습니다.

교화의 정신입니다.

정법구현을 위해서, 정법선양을 위해서 이런 강력한 정신을 가지고 있고, 그것의 표현입니다.

  불보살이 중생을 구제하는 데는 얼마나 절박한 심정을 하는가?

바다에서 배가 난파가 되었다면 같이 타고 가던 사람들이 다 물에 빠져 죽었어요.

자기도 지금 겨우겨우 바다에 떠다니고 있는데 옆에 보니까 송장이 하나 떴어요.

송장을 보니까 자기 친구입니다.

렇지만 그 송장이라도 올라타고 저 육지를 향해서 헤엄쳐 나가야 됩니다.

그래야 사니까요.

그것이 우리의 상식적으로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평소에 송장을 보면 저만치 도망가는 사람들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상식입니다.

그런 송장에 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송장을 올라타고 헤엄쳐서 육지에 가서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이와 같은 절박한 마음으로 중생제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전법활동을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경전에 나와 있습니다.

  사형을 언도 받은 죄수가 이제 감옥을 벗어나야 살지, 안 그러면 내일 모레면 곧 죽을 겁니다.

옛날에 감옥에는 화장실이 도망갈 수 있습니다.

똥통 속으로 들어가서 한참동안 똥통 속으로 잠수해서 헤엄쳐서 저쪽 공기통으로 나가고 도망을 가서라도 살아야 하는 그런 절박한 마음.

이러한 마음으로 중생제도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전법하고 포교한다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대혜스님은 자기하고 잘 아는 사람들과 원수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얘기가 그 얘기하고 같은 겁니다.

원수 맺는 것을 두려워하지 아니 하고 정법선양을 하겠다고 그럽니다.

正法宣揚(정법선양).

  이 시대에 불교가 어떻게 보면 자꾸 위축되어가고, 또 그것은 우리 불자들이 정법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삿된 법. 유사불교. 가짜불교. 거품불교. 이런 데에 너무 많이 정신을 빼앗기고, 모르니까요.

 

그것이 불교인양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 우리가 처해 사는데, 이것을 좀 제대로 아는 분들이, 공부하신 분들이, 또 서장 강의를 들으신 분들이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정말 똥통 속으로 저만치 헤엄쳐서 빠져나가서라도 이 생명하나 건져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전법활동하고 포교활동을 해야 됩니다.

  반드시 정법으로 해야 됩니다.

사법 가지고 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송장을 타고서라도 헤엄쳐 나가서 살아야 되겠다는 이런 단단한 각오를 가지고 정법을 전해야 됩니다.

경전에 그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불보살의 정법선양에 대한 마음은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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