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31/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 21. 09:48
 

 

 

서장 대 강좌 8-1 강 

 

 

 비가 오는데 아무리 적게 내리는 가랑비라도 그릇이 반듯하게 놓여 있으면, 그 그릇에 결국 물이 고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폭우가 쏟아져도 그릇이 엎어져 있거나 기우러져 있으면 물이 한 방울도 고이지 않습니다.

지금 8회째인데,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 그릇들은 아주 변함없이 반듯하게 잘 놓여져 있어서, 저의 강의가 비록 큰 소득은 없고 가랑비 같은 소득이라 하더라도, ‘지금쯤은 아마 가득히 차지 않았겠나?’ 스스로 이런 기쁨을 가져봅니다.

변함없이 이렇게 공부에 열의를 보여주신데 대해서, 늘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난 시간에 17. 진소경 계임에게 답함(1) 이야기가 조금 남았지요?  

대혜스님도 看話禪(간화선)을 주창 하시면서, 불교 일반에 대해서 다 짚고, 또 파헤칠 것은 다 파헤치고, 해석할 것은 다 해석하고, 그것도 당신이 깨달으신 최고의 지견으로 불교 여러 면을 우리들에게 이해시키고 있습니다.

그냥 보통 상식적인 불교가 아니고, 정말 禪의 경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은 『마음의 움직임과 고요함의 문제』제가 이렇게 제목을 달아 봤습니다.  

대혜스님께서 서장에서 극구 배척하고, 또 비방하고 어떤 경우는 좀 쌍스러운 표현으로 입에 거품을 물고까지 부정하고 비방하고 배척하는 공부의 길.

다시 말해서 默照禪(묵조선).

묵묵히 앉아있는 것만으로서 공부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부류들을 사정없이 비판합니다. 

 

우리 마음이 도대체 어떻게 되어있는 것인가? 

마음의 실상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렇게 공부를 지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깨달으신 분은 결국은 바른 이치를 알았다는 것이지, 무슨 기상천외한 어떤 초 상식적인 세계를 봤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아니한 것은 우리가 따라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깔려 있습니다. 

 

 

p. 136 

 

그릇된 무리는 사대부로 하여금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면,  

“마음을 거두어 고요히 앉아서 日常事(일상사)를 관여하지 말고 쉬어가고 쉬어가라.”고 합니다.

이렇게 가르친다는 것이지요.  

마음을 거두어서 고요히 앉아서 일상사를 관여하지 말고 쉬어가고 쉬어가라.

이것이 8~900년 전에 가르치신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우리 전통 선불교에서는 간화선 지침서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스님들이 강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지금도 부지기수 입니다. 

 

  마음을 거두어 고요히 앉아서 일상사를 관여하지 말고 쉬어가고 쉬어간다.

그냥 푹 쉬는 겁니다.

쉰다고 그것이 쉬어지면, 그 길도 살 길이 될 런지 모르지만, 그것이 쉬어지는 길이 아닙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원래 됨됨이가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거든요. 

 

 

  어찌 이것이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쉬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비우며,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벌써 마음이 두 조각이 난 것이 아닙니까?

마음은 하나인데 거기서 주관과 객관을 일부러 나누는 것이 되는 겁니다.

철학에서 우리가 직자 와 대자. 나를 “나”라고 하는 것과 “나” 와, 그렇게 나누는 이론이 있는데, 그것도 불교에서 보면 틀린 이론이거든요.

여기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쉰다.

럼 마음이라고 하는 놈 따로 있고,  

마음을 쉬게 하는 놈 따로 있다는 겁니다.  

대혜스님 지적은 이것이 처음부터 출발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비운다?

우리가 “마음을 비운다.” “비운다.” 그러지요?

그리고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쓴다.

그 마음을 제대로 쓰면 그냥 하나일 뿐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쓰는 마음 하나뿐 이라고요. 

 

 

  만약 이와 같이 수행할 것 같으면 어찌 外道二乘(외도이승)의 고요한 단견 경계에 떨어지지 않으며, 그러니까 외도이승들.

공부 잘못하고 있는, 여기 이승이라는 말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外道라는 말은 이해합니다.

二乘이라는 것은 성문 연각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것은 附佛法外道(부불법외도). 불법 안에 붙어 있는 외도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활발발하게 마음의 속성을 알아서, 마음의 속성대로 살아갈 줄 아는 삶을 선불교에서는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을 그냥 억지로 가두고서 꼼짝 못하게 고요하게 만드는 것으로서 공부의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 앞에서도 있었지만 아주 복잡한 세상사에 얽혀 살던 사람들은 잠깐 마음이 고요해지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지요. 편안합니다.

세상사 다 잊어버린 것 같고, 다 해결 된 것 같고 그래서 편안합니다.

그것이 맛은 좋지요.

그 순간 맛은 좋지만 그것이 공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잠깐 돌로 풀을 짓누르는 것과 같아서 어떤 문제가 생기면 금방 발동해서 요동치게 되어 있는 것인데, 그것을 공부라고 하면 앞도 뒤도 맞지 않는 공부가 아니냐는 이야기지요.  

 

 

  이것은 크게 불교에 깊은 이해가 없더라도, 또 참선에 대한 경험이 설사 좀 부족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 다 마음가지고 살잖아요.

그럼 자기마음 가지고 지금 수십 년 살았는데 마음의 속성을 어느 정도는 안다고요.

어느 정도는 알아요.

그렇기 때문에 크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의 四德(4덕)! 여기서 마음의 네 가지 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자기 마음의 밝고 오묘한 수용. 明妙受用(명묘수용). 

  2. 究竟安樂(구경안락). 마음 그 자체로서 이것이 아주 완전한 안락입니다. 

구경안락 이라는 말은 완전한 안락입니다.

마음을 어떻게 하고서 안락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가 지금 보고 듣고 하는 이 사실.

그대로 안락입니다.

완전한 안락입니다.  

  3. 如實淸淨(여실청정). 여실청정 이라는 말은 그대로 확실한 사실과 같은 청정.  

  4. 解脫變化(해탈변화). 해탈변화가 뭡니까?

아주 활발발한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것이 해탈입니다.

어디에도 걸리지 않으면서 마음껏 작용 하는 것이 해탈변화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6조 혜능스님이, 우리나라도 옛날 어떤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유사했지만, 忠孝(충효)가 절대적인 가치관 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충과 효입니다.

그것만이 전부인양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런 思考(사고)에 의해서 조상의 전통과 그 마을과 그 묘와 그 제사.

이런 것을 고집하면서 철저히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것이 종교도 이만저만한 종교가 아닙니다.

거기에 대한 믿음은요.  

 

 

  옛날 육조스님 당시 때야 오죽 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이 마음은 한 순간도 그냥 있지 아니 합니다.

그러니 그냥 있지 아니한 것이 우리마음의 속성이고, 그냥 있지 아니한 이 마음 이대로 모든 것의 근본이고 주인이다.  

 

그러니 應無所住(응무소주).

반드시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써라. 머물지 않게 되어 있으니까요.

충효에 머물러 있을 일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 어떤 가치에 마음을 쓰는 것도 얼마든지 기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그만 자기의 가치관이 깨져버린 겁니다.

완전히 송두리째 깨져버린 겁니다.

깨짐과 동시에 진정한 자기가 거기서 살아난  것입니다.

눈을 환하게 뜨게 됐고 해탈 자유입니다.

여기에 해탈변화라고 그랬지요?

자유를 변화라고 표현 했는데 그 어떤 기준과 어떤 틀과 어떤 규제에도 매이지 아니 하고, 다 풀어져 버린 겁니다.

충효라고 하는 그런 가치관. 그런 규정. 그런 규제가 다 무너져 버린 겁니다.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그것이 해탈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마음껏 변화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좀 미안한 말씀이지만, 천년만년 같이 살자고 약속했지만 그것이 어디 그렇게 되나요?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또, 달리 변화를 해봤자 별수도 없으니까 그럴 바에는 그냥 더불어 일생을 해로하는 것이지요.

변화를 해봤자 별수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최선입니다.

현재로서는 최선이니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꼭 거기에 시종일관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그 어떤 관념에 의해서 사는 것은 아니거든요.

우리 마음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누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부처님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의 4덕! 자기 마음의 밝고 오묘한 수용. 구경안락. 여실청정. 해탈변화.

참 근사하잖아요?  

이러한 묘함을 어찌 드러내겠습니까?

마음을 짓누르고, 짓누르고 한곳에다 붙들어 매고, 붙들어 매고. 그것이 화두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수식관이 되었든 비파사나가 되었든, 그렇게 마음을 붙들어 매고서야 마음의 훌륭한 이 네 가지 덕을 어떻게 드러낼 수겠습니까? 

 

 

  모름지기 본인이 스스로 보며 스스로 깨달으면, 저절로 옛 사람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능히 옛 사람의 말을 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옛 사람이 뭐라고 했든 간에 그것은 다 그 사람에게 필요한 方便語(방편어)입니다.

약 처방과 같은 겁니다.  

세 살 먹은 아이가 감기에 걸렸으면, 아이에게 맞는 감기약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해당이 안 됩니다. 

고인의 말이라고 하는 것은 다 그렇거든요.

경전이나 부처님말씀이나 조사스님말씀이나 역시 그렇습니다. 

 

 

  여기에 비유를 듭니다.

이것은 마음에 잘 새겨놔야 됩니다.  

만약 청정한 구슬을 진창 가운데 두어서 백 천 년을 지나더라도 또한 능히 오염시킬 수 없으니, 본체가 스스로 청정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우리 마음이 본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든지 진창 가운데로 굴릴 수가 있습니다.

저 높은 상전의 머리 위에도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청정한 구슬. 아주 갚진 다이아몬드.

아주 귀한 사람의 목에도 걸릴 수가 있고 손에도 걸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창 가운데도 들어 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이라고요. 

 

 

  이 마음도 또한 그러해서 능히 혼미할 때에는 티끌세상의 번거로움에 미혹되지만, 혼미할 때에는 세상 더불어서 온갖 탐. 진. 치. 희로애락에 뒤범벅이 되지만, 이 마음의 당체는 본래 미혹된 적이 없으니  

 

 

  여기도 좋은 비유를 들었네요.  

이른바 연꽃이 물에 젖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더러운 물일수록 연꽃이 더 아름답게 핍니다.

그렇지만, 그 더러운 물에 연꽃이 절대 젖지 않습니다.  

그래서 연꽃. 그것이 불교의 사상을 제대로 다 표현하고 있잖습니까?

제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보였다.

拈華(염화). 당신의 깨달음의 진면목을 연꽃 한 송이를 들어보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무비스님이 염화시중을 갖다가 연꽃을 들어 보여 가지고, 연꽃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를 설명하면서 불교의 진수가 거기에 달렸다.”

이렇게 해석해도 엉터리라고 비난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런 것에 제가 관심 둘 바는 아니니까요.

그렇게만 이해해도 괜찮은 겁니다.  

 

 

  만약 이 마음이 本來成佛(본래성불)이며 究竟自在(구경자재)하여 여실히 안락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으면,

갖가지 묘용이 또한 밖에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본래 스스로 구족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렸지만, 기존의 것. 이미 있는 것. 본래 우리자신들이, 조건이 어떻든, 남녀노소 유식 무식 동서남북 흑인 백인 황인 할 것 없이 누구에게도 共(공)히, 이미 가지고 있는 기존의 부처로서의 덕. 부처로서의 생명. 무한한 생명. 무한한 덕.

이것을 本來佛(본래불)이라고 합니다.  

본래불이라 해도 좋고 본래 인이라 해도 좋고요.

그것이야 불이라고 하면 자꾸 또 한 걸음. 거리감이 생기니 본래 인. 사람이다. 그렇게 표현하는데, 그것입니다.

이것 하나 이해하자고 불교공부 하는 겁이다.

절대 어디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새로운 것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해 지려면 장사를 잘 하세요.

절에 와서 기도한다고 부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대장경에는 기도라는 말이 없습니다.

기도불교는 중간에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불교입니다.  

우리가 지금 왜 간화선인가?

正法(정법)으로 나가자 이겁니다.

“불교를 正法으로 나가자.”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간화선인가?

불교에는 워낙 엉터리가 많고 거품이 많고 비불교적인 요소.

우리 필요에 의해서 만든 불교니까 그것은 부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만든 불교거든요. 

 

 

  만들면서 부처님한테 허가 받아서 만들었으면 몰라요.

전혀 허가도 받지 않고 만든 불교가 너무 많으니까 이 간화선 운동이 근래에 많이 일어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물론 복잡한 사회 속에서 정말 내 자신을 찾자하는, 그리고 고요함으로 돌아가자는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그것 보다는 어쩌면 불교의 정법으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더 있지 않은가?

 

시대가 혼란하니까 불교마저 너무 혼란해 졌으니까 이것 좀 정신 차리고 제대로 된 불교로 돌아가자는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저의 나름대로 합니다.

그래서 이 대목이 본래 자기에게 있는 것.

갖가지 묘용이 또한 밖에서 오지 않는다.

어떤 뛰어난 지혜와 복덕과 자비와 신통묘용도 밖에서 오지 않는다.

이미 우리들 자신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것입니다.

기존의 부처로서의 덕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제대로 알고, 한 순간 부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한 순간 부자가 되자는 것! 

 

 

  육조스님도 깨닫고 나서 첫 마디가 그랬잖아요.  

何期自性(하기자성)이 本自具足(본자구족).

내 마음속에 이미 본래 모든 것이 다 갖추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 어찌 알았으랴.

내 자신 속에 이미 다 갖추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내가 그동안 어떻게 알았으랴. 당신도 저 밖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어디 가서 빌면 한 보따리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눈을 뜨고 보니까 내 자신 속에 이미 갖추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내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何期라는 말이 그런 뜻입니다.

나는 평소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사실을 오늘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다 구족되어 있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제대로 깨달으신 분은요.

한결 같습니다.

말씀이 똑 같아요.

틀리면 그것은 아니지요.  

 

 

  부처님께서 성도 하시고 보니까 자기 자신이 너무 위대하고 존귀한 겁니다.

나 혼자만 이런가?

나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서 그 이쁜 자식도 버리고 마누라도 버리고, 그 왕자의 지위. 얼마나 고귀한 자리입니까?

그것마저 헌신짝처럼 버리고, 왕자로서의 고귀한 금지옥엽 귀하게 자란 몸이 누구도 할 수 없는 6년의 피 나는 고행을 하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나는 부처가 되었다 이 겁니다.

‘저 사람들은 어떨까?’ 하고 지혜의 눈으로 모든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니, 이것이 보통일이 아닙니다.

자기가 성취한 지혜와 덕상과 온갖 자비와 신통묘용이 모든 사람이 똑 같이 가지고 있는 겁니다.

추호의 차이도 없어요.

억만 분의 1의 차이도 없이 똑 같이 가지고 있는 겁니다. 

 

 

  참 억울할 겁니다.

자기는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것인데, 알고 보니까 전혀 털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 그냥 자빠져 있는 무지렁이 같은 인간도 똑 같이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보면 참 억울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그래서 부처님이 최초로 奇哉奇哉(기재기재)라 야~!신기하고 신기하다.

이렇게 찬탄을 했지 않습니까?

첫 마디가 그것이었습니다.

화엄경 여래 출현 품에서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결국 부처님도 화엄경에서 그렇게 표현했고 법화경에서도 그렇고, 대승경전 모두가 다 똑 같습니다.

선사들의 깨달음 속에는 더욱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리는 부자 되려고 하면 그냥 장사하세요.

괜히 부처님한테 와서 달라고 조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간화선 이야기하는데 이런 소리 거침없이 해야 됩니다.

간화선 이야기하는 마당에서 한 소리를 가지고 다른데 저~기가서 그렇게 하면 그것은 또 좀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허허허허허허허허~~~ 

그렇습니다.

여기 대혜스님의 말씀에 이렇게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놨습니다.

마음의 4덕을 이야기하고, 그 앞에는 마음의 動靜(동정)의 문제.

우리마음이 본래 갖추고 있는 완전무결한 부처로서의 덕. 능력. 생명.  

 

 

  우리가 흔히 표현하듯이 無量光(무량광) 無量壽(무량수)라고 하는 것.

결국은 우리들 자신의 지극히 위대함을 아미타불이라는 그 이름을 통해서 드러냈지 않습니까? 정말 근사하지요? 

경계에 쫓아가 버리면 무량광 무량수의 의미를 모르게 되는 것이고, 저기 무량수전에나 가서 자꾸 찾으려고 하고, 그 아미타불이라는 그 본래의 의미를 제대로 찾으면 무릎을 탁 치면서 “그래 무량광이지, 참으로 무량수야.”이렇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지요.  

 

 

p. 137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 금강경이 나오네요.

금강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無有定法(무유정법).

무엇이든지 고정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했다.

그 다음에 그 위대한 부처님께서설법을 하신다.

이것도 어떤 고정된 것이 딱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릴 때 여러분들 많이 보셨지요?

분필이 글씨 쓰는 것이지요?

잠 많이 자는 학생에게는 잠 깨우는 도구지 그것이 글씨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선생님들은 몽당분필만 잔뜩 모아놓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사람을 잘 맞추기도 합니다.

자는 사람만 꼭 잘 맞춥니다.

그 사람한테는 잠 깨우는 도구지 글씨 쓰는 것이 아니라고요.

무유정법입니다.  

 

 

  시골에서 꿈을 안고 대학교에 진학해서 정말 꿈에 그리던 상아탑.

그 대학에서 공부하겠다고 얼마나 꿈에 부풀어서 공부합니까?

그런 꿈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 책상이고 걸상이지만, 학교에 불을 지르는데 불쏘시개로도 좋아요.

데모할 때 바리케이드로도 아주 좋아요.

그런 사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유정법 이라고요. 

 

 

“정한 법이 있지 않는 것을 이름 하여 최상의 깨달음 이라고 하고, 정한 법이 없이 여래는 가히 설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 설법한다고 해서 그 설법의 내용이라고 할까?

온갖 것이 다 어떤 고정된 것이 없는 겁니다.

그 때 그때. 그 상황, 그 상황. 그 중생들의 그 병,

그 병에 맞추어서 설했을 뿐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네 가지로 분류를 하는데, 

처음에 世界悉檀(세계실단)그래요.

세계실단이란 세계법문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럼 뭐냐? 세속이야기 하는 겁니다.

스님들도 법문하는데 세속이야기 잘 하는 스님들이 있지요.

세속 사람들보다 세상이야기 더 잘 하는 스님들이 있어요.

아주 솔깃합니다.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이야기를요.

법문 끝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런데 귀에 일단 솔깃한 겁니다. 

 

 

  爲人悉檀(위인실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위인설법 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하는 설법입니다.

그 사람이 무슨 병을 앓고 있는가?

그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하는 설법이 상당이 많습니다.

부처님 법문 속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법문 많습니다.

그리고 사람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그 사람이 탐욕이 많은지 분노가 많은지 어리석음이 많은지 거기에 따라서 설법해 주는 것을 위인설법 이라고 그럽니다. 

 

 

  對治悉檀(대치실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對治는 그야말로 번뇌의 병을 고치는 겁니다.

아까 위인을 대치처럼 비슷하게 설명을 했는데, 爲人은 그야말로 사람을 위하는 것. 대치는 병을 고치는 입장입니다.

대치설법 이라고 그럽니다. 

 

 

세계실단. 위인실단. 대치실단.

이것은 다 방편입니다. 

 

 

第一義悉檀(제일의실단).

제일의 법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여기 선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를 일깨워주는 것.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

고정된 것은 사실은 없지요.  

 

 

  만약 본체를 확정하여 실제로 이런 일이 있다고 하면 또한 도리어 옳지 않습니다.

무엇이 분명히 있다.

우리가 늘 이야기하지만 존재의 바른 이해.

모든 존재의 바른 이해는 “중도로 봐야 그것을 바로 본다.”그랬습니다.  

그것을 中道正見(중도정견)이라고 그럽니다. 

 

중도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것을 있다고 봐서도 안 되고, 책상을 꼭 공부하는 것으로만 봐서도 안 되고, 때로는 바리케이드로도 쓸 수 있다고 보니까 데모할 때 바리케이드로도 쓰는 겁니다.

불 지르는 데도 쓰고요.

분필을 꼭 글씨 쓰는 데만 쓴다고 보질 않고, 잠 깨우는 도구로도 쓴다고 보니까 잠 깨우는 도구로도 쓰는 겁니다.

그것이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한 겁니다.

그렇게 양면으로 이해하고 양면으로 수용할 줄 아는 견해를 중도정견이라고 그럽니다.

모든 것이 다, 일체가 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다고 하면 또한 도리어 옳지 않습니다.

일이 부득이 미혹함과 깨달음, 가짐과 버림 때문에 도리를 약간 說破(설파)했으나, 이는 오묘한 데 이르지 못한 사람을 위한 방편의 말일 뿐입니다. 

우리 자심의 네 가지 덕이 있었는데, 그 덕의 진정한 내용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도 역시 이렇게 봐야 됩니다.

꼭 고정불변하게 있다고만 보는 것은 바른 소견이 아니지요. 

 

 

  사실 본체는 또한 약간도 없습니다.

청컨대 당신은 다만 이렇듯 마음을 써서 일상생활 가운데 生死(생사)와 佛道(불도)에 집착해 있다고도 하지 말며,

생사와 불도를 버려 없는 데로 돌아가지 마십시오. 

생사. 생사도 마찬가지. 불도도 마찬가지.

이것을 있다고도 못하고, 없다고도 못하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이런 말을 이제는 알아들으시지요?

그런데 세속적인 논리로서는 말도 아닌 겁니다.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지...

이것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동양에는 그런 논리가 아닌데, 서양의 학문이 들어오면서 흑백 논리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상식도 거의 그런 식으로 젖어 들어서 그렇지, 우리 동양 사고에는 사실은 본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이것이 다 이해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우리나라가 그만 서양의 思潮(사조)에 물이 들어서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다.

흑백 논리에 그만 사고가 전부 그렇게 젖어 들어버린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쳐야할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남자로서 남자 일도 할 수 있고, 때로는 여자 일도 할 수 있어야지요.

요즘 많이 그렇게 되어 가잖아요.

좀 철이 들었는가?

남자도 여자노릇 많이 하고, 여자도 전부 나와서 남자들이 하던 일 다 합니다. 그전같이 여자들이 직장에, 사회에 나오지 않고 집에만 있으면, 남자들이 일거리가 너무 많을 겁니다.

여자들이 일거리 다 뺏은 겁니다.  

그러니까 남자들이 일자리가 부족한 것이지요.

지금은 이런 소리가 우습게 들리지요? 

 

 

  그러나 지금부터 한 3~40년 전만 하더라도 여자들이 밖에 나와서 사회활동 아니 했으니까 전부 남자들의 일이라고요.

그런데 꼭 남자들만 하게 돼 있나요?

여자가 해도 괜찮은 겁니다.

집일을 여자만 해야 되나요?

남자가 해도 괜찮은 겁니다.

본래 그렇게 알고 살았어야 하는데, 우리는 잘못된 사조 때문에, 그렇게 편협하고 치우친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불교는 치우치고 편협 된 사고를 깨뜨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중도라고 하는 것이지요.  

불도다. 생사다 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있다고도 하지 말고, 없다고도 하지 말라 이것이지요. 그러면서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하니, 조주가 답하기를 “없다.”고 한 이것을 볼지언정 절대로 여기에 하는 방법 네 가지를 소개를 했는데, 화두의 네 가지 주의 점. 

 

 

  1. 생각으로 헤아리지 말며, 진짜 없어서 없다고 하는가?

아니면 무엇 때문에 없다고 하는가?

이렇게 생각으로 헤아리지 말라 이것이지요.  

 

 

  2. 언어 위에서 살 계획을 세우지 말며, 이것은 그 말을 그만 살림살이로 삼는 것.

그런 예도 많으니까요.

거기에, 화두에 파묻히다 보면 그렇게 되는 수가 있습니다.  

 

 

  3. 입을 여는 곳을 향하여 承當(승당)하려 하지 말며,

이것은 무슨 말인고 하니 “없다.”고 하는 거기에 뭔가 깨달으려고 하지 말라. 承當이라고 것은 깨달음을 말합니다. 

 

 

  4. 부싯돌 치는 불과 번쩍이는 번갯불을 향하여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주장자를 내리친다든지 할을 한다든지 하는 그런 상황에서 알려고, ‘그것이 뭔가?’ 하고 그 순간에 눈을 뜨려고 하는 그런 의도적인 생각.

자연스럽게 한 방망이 얻어맞고 눈을 뜨면 좋은데, 거기에서 의도적으로 내가 거기서 뭔가 눈을 뜨려고 하고, 마음을 열려고 하는 생각이 있으면 이것은 벌써 10만 8천리로 미끄러져 버린 것입니다.

거기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마음을 개입시켜서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화두 10종병이라는 것도 있고, 또 화두의 8가지 병을 열거한 데도 있습니다.

여기는 네 가지 주의 점만 소개를 했습니다.  

 

 

  대혜스님은 아주, 극축법문 그래요.

더 이상 나아 갈데없는 최고수준의 법문을 하시면서, 또 사이사이에 그것이 제대로 납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화두를 들라.” 그것도 “無자 화두를 들라.”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소견은 최고의 소견을 유지 하면서 “화두를 들라.” 간단하게 표현하면 최고의 안목을 갖고 있으면서 화두를 들고, 화두를 들면서도 모든 존재의 문제. 일체 것에 대해서 최고의 안목.

최고의 안목을 갖고 늘 보라는 것이 대혜스님의 지도 방법이지요.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고 한 것을 다만 이와 같이 참구할 것이지, 또한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기다리거나 또 쉬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만약 마음을 가지고 깨닫기를 기다리고 쉬기를 기다린다면, 점점 교섭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  

 

 

  “깨달으려고 화두 드는 것 아닙니까?”

이런 질문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맞아요.

깨닫기 위해서 참선하고, 깨닫기 위해서 우리 서장강의 하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서장강의 들을 때는 제 말만 잘 새겨듣지 ‘깨달아야 할 텐데’ ‘깨달아야 할 텐데’ 이러면 깨달음도 어디로 가 버리고, 서장강의도 어디로 가 버리고, 이것도 저것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돼버립니다.

오로지 강의에 빠져 버려야 됩니다.

그럼 깨달음은 잊어버리게 된다고요.

그래야 공부가 제대로 됩니다.

화두 드는 것도 깨닫기 위해서 화두 들지만, 화두들 동안은 깨달음이고 뭐고 중생이고 부처고 다 없어져야 됩니다. 

없고 오로지 話頭一念(화두일념)만 딱 되어야 그것이 정상적으로 공부가 됩니다. 

 

 

  의도적으로 깨달음을 기다리거나 또 쉬기를 기다리지 말라. 

이런 주의를 내리신 것입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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