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書狀)

서장대강좌30/무비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 2. 16:44
 

서장 대 강좌 7-4 강

 

 

  p. 128

         17. 진소경 계임에게 답함 (1)

  이것은 또 다른 사람이지요? 대통령도 결정 났겠다 천천히 합시다. 소경이라고 해서 대기시. 구시. 구사라고도 하는데 경이라는 벼슬이 상당히 높은 벼슬입니다.

지금 국장쯤. 국장이면 장관 바로 밑이지요. 국장쯤 될까?

어쨌든 그런 정도의 벼슬입니다. 

  편지를 받아 보니 이 일대사인연에 뜻을 두고자 했으나 근성이 지극히 둔하다고 하니 만약 이와 같다면 마땅히 당신을 위하여 축하하겠습니다.

여기는 우리가 둔하다 영리하다는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지금 사대부가 많이 이 일에 있어서 백 가지를 통달하고 천 가지를 알아서, 바로 뚫어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다만 근성이 너무 영리하며, 견해가 너무 많아서, 종사가 겨우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을 보면 단번에 짐작해 알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너무 영리한 것이 문제다 이겁니다.

  도리어 둔한 사람이 잘못된 지식과 생각이 없어서 문득 一機一境(일기일경)위에 一言一句(일언일구)아래서 바로 깨닫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정말 둔한 사람은 한 마디 척 하면 아무 딴 생각이 없으니까 그대로 팍 계합해 버립니다.

꽃을 척 주면 빙긋이 웃을 줄 압니다.

그것이 一機一境上입니다.

一言一句下범소유상개시허망하면 척 그냥 알아듣는 겁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하면 척 알아듣고요.

그런데 너무 영리한 사람. 그것이 불교에서 “聞法八難(문법팔난)”이라. 법문을 제대로 듣고 깨닫기 어려운 8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8가지 어려움 중에  세지변총(世智辯聰)이라 해서 총명한 것을 둡니다.

머리 잘 굴리는 사람. 머리 잘 굴리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전부 계산이 다 나와 버립니다.

전부 계산이 다 나와 버리기 때문에 진지하게 불법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그런 이야기지요.

 

一言一句(일언일구)아래서 바로 깨닫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문득 달마대사가 나타나서 백 가지 신통을 다 보이더라도 그를 어찌 할 수 없습니다.

달마대사가 아니라 달마대사 할아버지가 온다 하더라도 머리 총명한 사람. 머리 너무 영리한 사람.

머리 잘 굴리는 사람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이겁니다.

다만 그런 도리에 장애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근성이 예리한 사람은 도리어 예리한 근성의 장애를 입어, 능히 문득 꺾지 못하며, 파파하지 못합니다.

가령 총명함과 알음알이 위에서 배워 얻더라도 자기 本分事(본분사) 위에서는 더욱 힘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다음에 좋은 법문이 소개 됩니다.

 

p. 129

  그런 까닭에 남전 화상이 이르기를 “요사이 선사는 매우 많으나 어리석은 사람은 찾아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요. 선사는 많은데 어리석은 사람은 찾기 어렵다 이겁니다. 다 영리하고요.

  장경 화상이 말하기를 이것 참 중요한 법문입니다.

장경스님의 법문이 아주 좋아서 길게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염두에 둘 것은 본래의 부처를 한 물건이라고 하는데 그 본래 부처의 공능.

이렇게 우리가 보고 듣고 할 줄 아는, 임제스님의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임제록에서는 無位眞人(무위진인)이라고 했습니다.

차별 없는 참 사람의 空能(공능).

여기에 대해서 장경화상 이라는 분이 쭉 말씀하시는 것을 대혜스님이 인용을 했습니다.

아주 좋은 법문입니다. 

 

  “지극한 이치는 말을 떠나 있는데, 요즈음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저 일을 억지로 익혀 공덕과 능력으로 삼아서 자성이 원래 티끌 경계가 아니고 미묘하고 위대한 해탈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가지고 있는 보고 느끼는 작용은 오염되지도 않고 장애되지도 아니하며, 이와 같이 밝은 빛은 일찍이 쉬어 없어진 적이 없었다. 우리 본래심.

본래 부처의 공능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랜 옛적부터 지금까지 진실로 변하여 바뀌지 아니함은 태양이 멀고 가까운 곳을 비추어 비록 여러 물건에 미치지만 일체 대상과 화합하지 않는 것과 같다.

신령한 빛과 묘한 밝음은 단련함을 빌리지 않는다.

통달하지 못하여 物象(물상)에 집착하는 것은 다만 눈을 눌러 비벼서 망령되게 허공 꽃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이것도 공연히 망상을 일으켜서 본래 없는 하늘에 꽃을 보는 겁니다. 그것을 허공 꽃이라고 그럽니다.

空華(공화). 空華難墜(공화난추)라.

한 생각 잘못 돼버리니까 없는 부처니 중생이니 다 헛말이거든요.

헛말. 허환이 아닙니다. 부처다. 중생이다. 성인이다. 범부다하는 것은 虛相(허상)은 아닙니다.

허상은 그래도 상당히 봐주는 소리입니다.

헛말입니다.

말이 벌써 잘못된 말이다 이 말입니다.

허상은 아예 없습니다.

허상은 상이라도 있어야 허상이라고 하지요.

그것마저 없고, 말이 처음부터 잘못된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아까 그 임제록에서 소개해 드린 그 내용하고 똑 같은 것이지요.

이것이 헛말입니다.

뭐가 있습니까? 부처나 중생이 있다면, 굳이 있다고 한다면 아까 이야기했듯이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눈을 눌러 비벼서 허공에 꽃이 없는데 괜히 꽃이 쑥 떨어지는 것이 보이는 것 같이 그런 현상이다.

  다만 스스로 피로해서 그릇 여러 겁의 긴 세월을 보내지만 만약 능히 돌이켜 비추어 보면 둘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제2 사람. 그러니까 “본래 그 사람이다.”하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실상을 이지러뜨리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실상을 이지러뜨리지 않는다.

” 앞에서 물과 물결 이야기 했듯이 (7-2강)물결은 일상생활이고 물은 실상입니다.

전단향나무로 불상을 조각 해놓으면 불상은 물결이고, 또 우리 일상생활이고, 그 전단향기는 실상입니다.

진리의 세계라고요.

그런데 불상 말고 따로 전단향기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코끼리나 돼지나 동물을 조각 해놔도 똑 같이 전단향기가 납니다.

우리가 貪嗔(탐진). 邪見(사견). 다 탐욕도 부리고, 분노도 하고, 어리석음도 있고 탐진치 삼독 아니라 8만4천 번뇌를 우리가 부린다 하더라도 그 부리는 하나하나의 편편이 전단향나무 조각이니 전단향기가 납니다.

 

  그것이 실상입니다.

실상 그대로라고요.

實相(실상)의 한 片(편)입니다.

동물 조각 해놓으면 우리는 “에~이, 동물”이라고 그러지 전단향으로 보질 못한다니까요.

전단향으로 봐야지 동물로 보는 겁니다.

똥을 말려서 불상을  해놓으면 불상이라고 껌뻑 넘어가는 겁니다.

똥을 말려서 불상을 조각 해놨다면 이것이 될 소리입니까?

전단향으로 동물을 조각 해놔도 그것이 전단향인 줄 알아야 옳다 이겁니다.

우리가 탐욕. 진심. 어리석음. 8만4천 번뇌를 부려도 그 外相(외상)을 보지 말고, 實體(실체)를 보라 이겁니다.

물결을 보지 말고, 물을 보라이겁니다.

전단향나무의 비유. 물결의 비유. 금의 비유. 금도 마찬 가지입니다.

 

금으로 무엇을 조각 해놔도 그냥 금입니다.

불상을 조각 해놨다고 해서 좋은 금이 아니고, 칼을 만들어 놨다 해도 금은 금입니다.

이렇게 알아버리면 끝나는 겁니다.

래서 여기에 “일상생활에서 실상을 이지러뜨리지 않는다.” 이 말이 그 말. 아주 좋은 말이지요.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이 사람밖에 달리 다른 사람 없다.

지금 見聞覺知(견문각지) 하는 이 사람 외에 달리 다른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 아셔야 됩니다.

 

  그대는 스스로 둔한 사람이라고 이르니 시험 삼아 이와 같이 돌이켜 비추어 보십시오.

능히 둔함을 아는 사람은 도리어 둔합니까?

‘내가 둔하다.’라고 이렇게 한번 돌이켜 보세요.

‘아이고 내가 둔한 사람이구나.’ 그 사람은 도리어 둔 한가? 영리한가? 이 말입니다. 둔한 것도 아니고 영리한 것도 아닙니다.

괜히 둔하다. 영리하다 갖다 붙이지 말라 이것이지요. 

 

  만약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보지 않고 다만 둔함을 지켜서 다시 번뇌를 낸다면 이는 허깨비와 망상 위에 거듭 허깨비와 망상을 더하는 것이며, 허공 꽃 위에 다시 허공 꽃을 더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 덧붙이면 머리위에다 다시 머리를 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괴상망측한 사람이지요.

머리가 두 개가 있다면, 머리가 이 층으로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주 괴상망측한 사람이지요.

이야기할 것 다 해놨지 않습니까?

자세히 뜯어보십시오.

정말 아주 확연하게 드러내놓은 내용입니다.

 

  다음에는 묵조선을 비판한 내용이 있습니다.

둔하고 영리함의 이야기를 하면서 묵조선을 비판한 내용이 있고, 132쪽에 밑에서 세 째 줄. 앞에서 잔뜩 비판을 해 놓고는 제가 구업을 아끼지 않고 힘써 이런 폐단을 구제하니,

대혜스님은  있는 것 다 끌어 붓는 겁니다.

불교가 잘못되는데 대해서 그냥 참고 볼 수가 없는 이것이 보살의 자비입니다.

있는 것 다 끌어 붓는 겁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하고, 이것이 보살의 자비라니까요.

그것 알아야 돼요.

“도인이 아무리 묵조선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열을 내고 비판할 것 뭐 있느냐? 점잖지 못하게,” 그것은 저기 선비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뒷집에 점잖은 어른이나 하는 짓입니다.

  禪師(선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선사는 점잖다 어떻다하는 그런 기준에서 벌써 벗어났기 때문에 正法(정법)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하는 겁니다.

여기도 보면, 제가 구업을 아끼지 않고 무슨 口業(구업) 짓는다.

어쩐다. 이것이 일반 불교에서는 구업 지으면 안 되지요.

정 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해야지요.

지금 이것은 선불교라고요. 

최고급 불교입니다.

그래서 대혜스님도 그래요.

제가 구업을 아끼지 않고 힘써 이런 폐단을 구제하니, 이제 그릇됨을 아는 사람이 차츰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정법으로 얼른, “정법구현”  “정법구현” 간혹 그런 소리를 하는데, 정말 정법 필요합니다.

 

  범소유상개시허망이라고 하면서 뭐 그냥 구체적인 모습으로서 불상을 우리가 상징적으로 해놓고, 아침저녁으로 예불하고 기도하는 것은 좋아요.

얼토당토 않는 바위에 관세음보살이 파도를 타고 여기까지 와서 누워계신다는 식으로 사기 치는 것이 비일비재하니까요.

이것 좀 어떻게 우리가 바로잡아야 됩니다.

정말 답답해서 죽겠습니다.

TV에서도 그런 광고 다 해주고, 방영 다 해줍니다.

야~ 참 문제입니다. 문제요.

그것은 무당보다도 더 못하지요.

자꾸 그런 것을 여러 사람한테 선전을 하니까 ‘아 저것이 불교인가 보다.’ 아무리 봐도 관세음보살 100분의1도 안 닮았는데 그것을 억지로 그림을 갖다 붙입니다.

 

범소유상개시허망은 어디 갔습니까?

우리가 법당에다 불상을 해서 모시는 것은 좋습니다.

이해가 된다고요.

그렇게 해놓고 우리가 거기서 마음을 가다듬고 또 초심자들에게 또는 초보자들에게, 방편을 쓰는 데는 그 보다 더 좋은 방편이 없습니다. 見物生心(견물생심)이니까요.

相見衆生(상견중생)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모양을 봐야 마음이 나는 중생입니다.

그러나 지금쯤은, 3000년이 지난 이 시대에는 뭔가 좀 이제 알만치 아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제대로 좀 깨우쳐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 장사가 얼마나 잘 되는지 몰라요.

이것이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이 있는 것입니다.

 

  좀 정말 제대로 된 불교를 이해하시는 분들은 정법선양 운동을 열심히 해야 됩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정법선양 운동을 참으로 열심히 해야 됩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그래서 이 스님도, 그 당시 불교에 관심 있는 것 까지는 좋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심 있는데 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엉뚱한데 빠져 있어서 문제입니다.

대혜스님도 그것입니다.

엉뚱한데 빠져 있으니까 통탄을 금치 못합니다.

제가 구업을 아끼지 않고 힘써 이런 폐단을 힘써 구제했다

고 그럽니다. ‘차라리 내가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구제해야 된다.’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원컨대 당신은 다만 의정이 타파되지 못한 곳을 향하여 참구하되 行住坐臥(행주좌와) 시에 항상 놓아 버리지 마십시오.

하면서 狗子無佛性(구자무불성)화두를 들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p. 134

  여기도 아주 좋은 법문이 있어서 도저히 이것을 생략을 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옛날에 주세영이라는 사람이 일찍이 편지로 雲庵眞淨(운암진정) 화상에게 말하기를 “佛法(불법)이 지극히 오묘하니, 일상에 어떻게 마음을 쓰며 어떻게 몸소 참구[體究]해야 합니까?

바라건대 자비로 지시하여 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니까 진정 화상이 말하기를 여기서부터 입니다.

불법은 지극히 오묘하여 둘이 없다.

不二法門(불이법문) 아시지요?

다만 오묘한 데에 이르면 둘이 없다.

오늘 저녁 계속 말씀드린 물과 물결이 둘이 아니다.

금과 금불상이 둘이 아니다.

전단향기와 전단나무로 조각한 조각상이 둘이 아니다.

무슨 조각을 해놨던지 상관없다.

우리의 치열하게 지지고 볶고 살아가는 일상생활과 도가 둘이 아니다.

오늘 저녁 계속 얘기한 것이 그겁니다.

  불법은 지극히 오묘하여 둘이 없다.

다만 오묘한 데에 이르지 않으면 서로 長短(장단)이 있겠지만, 오묘한 데라는 것이 바로 그 둘이 아닌 도리.

둘이 아닌 것을 이해하는 그 도리입니다.

본래 둘이 아니지요.

그런데 둘로 보는 것이지요.

진실로 오묘한 데에 이르면 마음을 깨달은 사람이다.

마음의 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겁니다.

마음이 착한 것만 마음입니까?

악한 것도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육조스님이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하라.

선악에 떨어지지 말라 겁니다. 

 

  如實(여실)히 스스로의 마음이 구경으로서 마음이 최고다 겁니다.

제일 으뜸이다.

본래 부처다. 여실히 자재다. 여실히 안락하며, 여실히 해탈이다.

그대로 이 마음이 부처이고, 마음이 구경이고, 마음이 자재이고, 마음이 안락이고, 마음이 해탈이다. 그대로 청정이다.

여실히 청정함을 알아서 일상에 오직 자기 마음을 쓰며, 자기 마음의 변화를 잡아서 쓸지언정, 옳고 그름을 묻지 말라.

옳고 그름을 묻지 말라고 했잖아요.

선이다. 악이다도 묻지 말라.

그런 차원이 아니라니까요.

지금 일반불교는요?

그 선과 악을 나누고, 어떤 진실과 방편을 나누고, 진심과 망심을 나누고, 이런 차원입니다.

 

  마음을 분별하여 생각하면 일찍이 옳지 않다.

마음을 분별하지 않으면 낱낱이 천진이며, 그러니까 흘러가는 물도 물이요.

물결치는 물도 물이요.

고요한 물도 물이요.

금으로 무엇을 조각해 놨던지 전부 금입니다.

낱낱이 밝고 오묘하다.

낱낱이 연꽃에 물이 묻지 않는 것과 같아서 마음이 청정하여 저것[是非]을 초월한다.

자기 마음을 미혹한 까닭에 중생이 되고, 자기 마음을 깨달은 까닭에 부처가 되니,

사실은 “부처라고 부른다”하는 것이 좋겠지요.

되기는 무엇이 됩니까?

그냥 그 사람을 부르는 식이지요.

한 사람을 두고 이렇게 부르고 저렇게 부르는 겁니다. 

 

  중생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중생이다.

많이 들어온 소리지요?

물이 곧 물결이요,

물결이 곧 물이다.

미혹함과 깨달음 때문에 이것과 저것이 있다.

부처와 중생이 있다.

지금 도를 배우는 사람이 많이 자기 마음을 믿지 아니한다.

자기 마음을 깨닫지 않고, 자기 마음의 밝고 오묘한 수용을 터득하지 못한다.

자기 마음의 안락한 해탈을 터득하지 못하고, 마음 밖에 망령되게 禪道(선도)가 있다고 하여 참선이 있다고 해서 망령되이 기특함을 세운다.

망령되게 가지고 버리는 부처를 가지고 중생을 버리는 마음을 내니, 비록 수행하더라도 外道二乘(외도이승)의 고요한 斷見(단견)에 떨어지게 된다.

이른바 수행을 함에 단견과 상견에 떨어질까 염려스럽다.

이것이 영가 증도가에 있는 얘기지요? 

 

  단견을 가진 사람은 자기 마음의 본래 오묘하고 밝은 성품을 없애고 한결같이 마음 밖의 공에 집착하여 고요한데 걸린다.

공만 자꾸 내세우는 겁니다.空만.

그것이 단견에 떨어진 사람입니다.

아예 딱 ‘없다’ 고 생각하는 것을 斷(단)이라고 합니다.

斷見(단견)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

마음의 본래 오묘하고 밝은 성품을 없애버리면 안 되지요?

그~ 향기. 전단나무 향기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 향기를 우리가 인정해야지요.

금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고요한데 걸린다.常見(상견)을 가진 사람은 반대지요.

일체의 법이 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모든 유위법에 집착하여 구경을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유위법에” 그러니까 지금 일상생활을 살아오면서 어떤 가치관을 설정해 놓고 살아온 그것을 그대로 바꾸지도 못하고,

거기서 한 걸음의 전진도 없이 그냥 거기에 계속 매달려 있는 겁니다.영원하리라고 머릿속에다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계산을 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이미 이것은 나를 지탱해주고 나를 붙잡아주고, 이것 때문에 내가 살아가고 이것은 영원한 것이고 이것뿐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목을 매고 사는 겁니다.

절대 계산하고 그러지는 아니 합니다.

 

  이것은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이고 저 유위법.

금방 허망해서 없어질 것을 가지고 영원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불자들이 하는 소리지요.

본래 그런 의식도 없습니다.

무의식적으로 그냥 그렇게 매달려서 목을 매고 사는 겁니다.

이것도 문제가 있다 이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우리가 목을 맨다고 영원히 있어지면 좋지요.

목을 안 맬 사람이 아무도 없지요.

그런데 그것이 아니잖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왜 모르냐고요.

객관적으로 보면 뻔히 보입니다.

수가 뻔히 보입니다.

딱 한 사람만 보면 열 두 사람이 나옵니다.

다 될 줄 압니다.

참 희한한 도리지요.

제가 불교는 알아도 그것은 모르겠대요.

소위 꿍꿍이속이야 있겠지만 예컨대 그렇게 우리가 유위법에 집착하여 구경을 삼는다.

최후로 삼는다.

이것뿐이라고 삼는 것이 우리가 전부 보고 듣고 하는 현상에 목을 매고 사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전부 공하다고 없다고 하는 것도. 지극한 空能(공능)을 무시하는 이것도 안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일상생활에 의지하고 살아오는 이것이 영원한 것이고, 이것만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크게 잘못된 것이지요.

그래서 중도라는 말이 나옵니다.

두 가지 입장을 다 이해하고 다 수용 하는 것.

다 수용할 줄 아는 그 안목을 中道正見(중도정견)이라고 합니다.

중도가 뭐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있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볼 줄 아는 것을 “중도적으로 본다.”

양쪽을 다 수용 하는 것.

단견에 떨어지면 아주 허무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없다고 하는 것.

상견에 떨어지면 아주 추한 현실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허무주의자도 아니고, 현실주의자도 아닌 양면을 자유자재로 수용 하면서 적재적소에 적절하게 걸리지 않고 활용할 줄 아는 그런 삶을 불교는 권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눈이 조금 열려야 그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요.

 

       - 7강 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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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善(선)도 아니고 惡(악)도 아닌 상태를 無記(무기)라고 교리적으론 이야기를 합니다.

질문의 내용은 무기라는 낱말 보다는 斷見(단견)이라는 아무 것도 없는 공적한 데. 무기라고 표현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공적한 데 떨어져 있는 경우에 전문 수행자는 어떻게 벗어나느냐?

한 사람도 공적에 떨어진 사람도 없습니다.

떨어진 사람도 없는데 벗어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봅니다.

제발 좀 공적한 데, 공부 열심히 하고 정진 열심히 해서 공적한 데라도 떨어지는 사람이 일단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건져내는 것은 그 다음 문제입니다.

그것을 염려 할 것이 없습니다.

  배가 넘어지기도 전에 먼저 물로 뛰어들 생각은 아니해야지요.

배가 넘어져서 허우적거릴 때, 그때 손을 뻗어야 건지는 맛도 나고 건져주면 고맙다는 소리도 듣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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