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산암잡록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5:09

산암잡록

「산암잡록」은 송말 원초의 혼란기를 살았던 서중무온恕中無慍(1309~1386)스님이 제방을 돌면서 들었던 절 집안 이야기나 당시 불교계에 널려 있던 문제점들을 평론 형식으로 써 내려간 이야기 모음집이다.

1.흩어져 가는 선방 요사채 분위기

태정泰定(1324~1327) 초에 선정원에서 가흥嘉興 본각사本覺寺 영석지靈石芝스님을 기용하여 정자사淨慈寺 주지로 임명하였는데, 스님은 당시 여든 네 살이었으며 모든 이에게 고불古佛조주스님과 같은 추앙을 받았다.
나는 경산사에서 정자사까지 모셔다 드리고 전례에 따라 그곳에 방부들일 수 있었다. 당시 그곳엔 오백 명에 가까운 대중이 있었으며 태온台溫의 향장鄕長 충경초忠景初가 수좌로 있었는데, 나이와 덕망이 높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당시 나는 학인 신분인 터라 우연히 행랑에서 책 장수를 만나 장자莊子 한 권을 샀다. 요사채 위로실로 가져와 그 책을 읽으면서 참선 공부에 지장이 될까봐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마침 충수좌가 외출하였다가 들어와 매우 불쾌한 뜻을 표하며 나를 꾸짖었다.
“그대 대중 속에 처음 들어왔으면서 참선은 하지 않고 도리어 잡학에 힘쓰는가. 게다가 선원의 위로실이란 손님을 맞이하고 불법을 논하는 곳인데 이곳에서 외서外書를 읽어서야 되겠는가.”
이십여 년이 지난 뒤 다시 정자사를 찾아가 보니 요사채 위로실에 나이 어린 승려와 노승이 뒤섞여 거문고를 켜거나 바둑을 두거나 아니면 먹물을 핥으며 산수화를 그릴 뿐, 외서조차 뒤적거리며 읽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하물며 참선 공부하는 자를 찾아볼 수 있겠는가.
아! 충수좌의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날 묘희妙喜스님께서 양서암洋嶼庵대중방에 걸어 놓았던 글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뒤에 충수좌는 무주務州 화장사華藏寺주지가 되었다.

2.세상에 나도는 엉터리 어록들

요즘 새상에는 머리 깎은 외도가 한 무리 있는데, 그들은 불조께서 남긴 말씀을 모아 실속없는 책으로 만들고는 이를 ‘어록’이라 하여 신도들의 시주로 간행하고 있다. 그들은 원래 깨달은 바도 없었는데다 불조 화두의 근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현학적인 말을 택해서 해석을 붙이니, 아는 사람이 보면 두려운 마음에 흐르는 땀을 금할 길 없을 것이다.
소천강炤千江은 사명四明 사람이며 원직지圓直指는 천태 사람이고 혁휴암奕休庵은 양주 사람이다. 이 세 사람은 온갖 번뇌에 얽힌 범부에 불과하며 정견正見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도 마음대로 ‘어록’을 발간하였다. 휘暉 장주는 은현 사람으로 소천강에 귀의하여 금강경을 조목마다 분석하고 제멋대로 송을 붙여 간행 배포하였다.
내가 동곡사桐谷寺에 있을 무렵 휘장주가 찾아왔기에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 경에다 제목을 붙였으며 무엇으로 종지를 삼았느냐?”
그러나 그는 전혀 아는 바 없었다. 하물며 그가 미혹한 중생을 위하여 무상정변지각無上正邊知覺을 표출해 내려고 했겠는가. 이들은 모두 정인正因에 근본하지 않고 삿된 도에 힘써 세상에 재난을 주었으며 자신의 명성만을 좋아하여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고 유혹하니 참으로 한심하고 슬픈 일이다. 오늘날 큰 법상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마땅히 이들을 쫓아내고 바로잡아야 하는데도, 오히려 그들을 따라 칭찬하고 어떤 이는 서문과 발문까지 써 주고 있으니, 그들이 불문에 끼친 죄는 매우 큰 것이다.

3.속인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다가

주지란 모든 보살이 지혜로 머무는 경계에 머물러(住)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륜을 잘 지키는 자이니, 백장스님이 소위 불자주지佛子住持라고 이름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요즘 들어 주지가 되어서 명리를 좇는 이들은 그들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한지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는 간혹 속인들과 사귀어 먹고 마시는 일에 빠져 지내는 이도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태주台州 홍복사洪福寺의 심석산琛石山스님은 절 주변에 사는 속인 방공권方公權과 사귀면서 서로 술자리를 돌려가며 날마다 먹고 마시기만 했다. 석산스님이 그 절의 감사(監事:창고 일)을 맡게 되었는데, 방공권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그를 모함하여 못하게 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고 방공권을 독살하려고 방장스님의 시봉에게 뇌물을 주어 그의 차 속에 독약을 넣었다. 그러나 공권이 자기 찻잔을 돌려 석산스님에게 먼저 드리자 석산스님이 그 차를 마시고 독살되었다. 방공권은 석산스님을 독살시킨 일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어느 날 콩새 우는 소리를 들어 보니 영락없이 “방감이 날 죽여(方監殺我)” 하는 것이었다. 이에 근심과 두려움이 심해져 병이 되고 햇볕 보기를 겁내다가 짚을 씹으며 죽어 갔다. 이것은 석산스님이 자기의 직분을 지키지 못하고 속인과 사귀며 그들의 말을 들어준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으며, 마침내 자신의 생명을 가볍게 잃었으니 뒷 사람들이 이를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골 사람들이 단마조鍛磨鳥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콩새는 늦봄이 되어서야 운다. 세속에서는 그 울음소리를 장감단마杖監鍛磨(짱 찌안 뚜완 뭐)라고 하는데, 이 중은 방감살아方監殺我(팡 찌안 싸워)로 착각한 것이었다.

4.주지 자리 맡고 나자마자 변한 사람

혁휴암은 양주 사람이다. 젊은 시절 회전淮甸, 연경, 오대산 등지를 돌아다니다가 흉년을 만나 상선을 얻어 타고 명주明州에 왔다가 천동사 객승이 되었다. 낡고 헤어진 승복을 입고 하루 한 끼를 먹으면서 밤을 세워 정진하니, 옛 스님의 의젓한 풍채가 있었다.
봉화奉化 상설두사上雪竇寺에 주지 자리가 비어 대중들이 글을 올려 주지가 되어 달라고 청하니, 혁휴암은 흔쾌히 수락하고 삿갓 하나만 들고 그곳으로 갔다.
방장실에 앉아 돈과 양곡을 관장한 지 일 년이 못되어 예전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낡은 승복은 가벼운 털옷으로 바뀌었고, 지난날 하던 한 끼 공양은 날마다 진수성찬이었다. 그리고 좌우 사람들이 자그마한 계율이라도 어기면 성을 내며 스스로 일어나 몽둥이로 때리고 그가 땅에 엎어지면 다시 직성이 풀릴 때까지 실컷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게다가 사원의 보물을 모조리 긁어다가 민가를 사들여 암자로 꾸며서 그곳에 살면서 날마다 재산 불리는 일만 일삼았다. 그러다가 승려들과 가옥 관계로 관청에 소송이 제기되어 부정이 드러나게 되었고 결국 옥중에서 죽고 말았다.
요즘 불문에서 선을 가장하여 명예를 바라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욕을 끼치는 자들이 어찌 혁휴암 한 사람에 그치겠는가.
시전詩傳에 처음엔 잘하지 않는 자가 없지만 마무리를 잘하는 사람은 적다고 하였으니 새겨들을 일이다.

5.남편과 맞지 않아 발심 수행을 하다

홍무洪武 5년(1372) 내가 상우上虞 지방을 돌아다니다 개호蓋湖 적경정사積慶精舍에서 여름을 났는데 어느날 아침 백관시百官市에 사는 유안인兪安仁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내 앞에 무릎을 꿇고서 하소연하였다.
“저는 남편과 맞지 않아 발심하여 정토 수행을 닦아온지 칠팔 년이 되었습니다. 요즘 일이 년 사이에 마음을 맑게 하고서 고요히 앉아 있노라면 공중에서 가냘픈 음악 소리와 황새 울음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기에 내 스스로 훌륭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사람은 그것이 마의 경계(磨境)라고 하니 스님께서 결정지어 주십시오.”
내가 말하였다.
“이는 그대가 경에서 ‘백 가지 보배의 가로수에 바람이 부니 그 소리는 마치 백천 가지 음악과 같고, 많은 새소리가 일시에 일어나는 것 같다’는 문장을 보고 그 말을 독실하게 믿어서 그 생각이 팔식八識에 뿌리 깊이 내려 제거할 길이 없기 때문에 고요한 선정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이다. 만일 뒤에 이런 경지를 또 다시 보게 되면 그것이 훌륭한 경지라거나 마의 경계라는 생각을 하지 말고, 당장 그 자리에서 끊어 버리면 비로소 마음이 정토이며 본성이 미타로서 온통 그대로 다 볼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십만억리 머나먼 국토 바깥에 있겠는가.”
유안인은 이 말에 의심이 싹 풀렸다.

6.일생동안 참선하여

해회사海會寺 옹翁스님은 임해臨海 사람으로 서른 살에 집을 버리고 불도에 들어와 경산사 호암虎岩스님 문하에서 삭발하고 승복을 입었다. 처음 전단나무 숲에 갔다가 승당으로 돌아오는데 누군가 그를 두고 중물이 덜 들었다고 뒷전에서 수군대자 스님은 분발하여 그 이튿날 바로 천목사天目寺 중봉中峰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 침식을 잃고 힘을 다해 참구하였으며 밤이 이슥하여 잠이 몰려와 물리치기 어려우면 어두운 바닥에 염주를 뿌려 놓고 몇 번이고 발로 더듬어 찾기를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정진하여도 깨친 바 없었다. 당시 동주東州스님은 호구사虎丘寺에, 고림古林스님은 개선사開先寺에, 동서東嶼스님은 풍교사楓僑寺에 주지로 계셨는데, 스님은 소주蘇州로 찾아가 세 노스님의 문하를 두루 출입하여 점차 깨달음의 경지에 다가갔다. 그 뒤 용화사龍華寺 주지가 되어 고림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아흔세 살에 육왕사育王寺에 가서 횡천橫川스님의 부도를 지켰다. 그러던 어느 날 평지에서 넘어져 왼쪽 발목을 삐어 걷지 못하게 되자, 늘 평상에 앉아 달 밝은 밤이면 낭랑히 옛 분들의 게송을 읊었는데, 제자 환渙스님이 물었다.
“일생 동안 참선하다가 이제 와서는 그것을 쓰지 못하고 도리어 게송을 읊어 마음을 달래십니까?”
“듣지도 못하였느냐? 대혜大蕙스님이 병환으로 신음할 때 곁에 있던 사람들이 ‘일생 동안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더니만 이처럼 되셨습니까’ 하자 스님께서는 ‘어리석은 자의 신음은 이렇지 않더냐?’ 하신 말씀을.”
환스님은 절을 올렸다. 스님이 입적하여 다비를 하자 남다른 향취가 사람의 코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