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원오선사심요(圓悟禪師心要)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5:13

원오선사심요(圓悟禪師心要)

「원오선사심요」는「벽암록」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원오극근圓悟克勤(1063-1135, 송대 임제종 양기파, 오조법연五祖法演의 제자)선사가 남긴 글을 그의 사후 제자 자문子文이 펴낸 책이다. 그 무렵 사대부들과 제자, 고승들에게 공부하는 이의 마음가짐과 방법들을 일러주는 내용의 편지글로 되어 있으며 임제종에서는 참선판도參禪辨道의 지침서로 여겨져 왔다.

고서기皐書記에게 주는 글

임제종의 정종正宗은 마조馬祖스님과 황벽黃壁스님으로부터 대기大幾를 드날리고 대용大用을 발휘하였다. 그물을 벗어버리고 소굴을 벗어나 호랑이 와 용처럼 달리며 별똥 튀고 번개가 부딪치듯 하여서, 오무렸다 폈다 잡았다 놓았다 하는 이 모두가 본분에 의거하여 면면적적綿面的的하였다.
풍혈風穴스님과 흥화興化스님에 이르러선 종풍을 더욱 높이 드날리고 기봉은 더욱 준엄하였다. 서하西河스님은 사자를 희롱하였고 상화霜華스님은 금강왕(보검)을 떨쳤는데 종문의 문지방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인가를 직접 받지 않고서는 그 규모를 알 수 없으며 부질없이 스스로 껍데기만 더듬는다면 희론만 더할 뿐이다.
대체로 하늘을 치솟는 기개를 가지고 격식 밖의 도리를 받아 지니고, 싸우지 않고도 백성과 군사를 굴복시키며, 살인을 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해도 오히려 본분의 취지와는 비슷하지도 못한데, 하물며 별을 옮기고 북극성을 바꾸며 천륜을 굴리고 지축을 돌리는 경우이겠느냐. 그러므로 삼현삼요三玄三要와 사료간四料簡과 사빈주四賓主와 금강광보검金剛王寶劍 과 땅에 웅크린 사자(地師子)와 한 할이 할의 작용을 하지 못함(一喝石作一喝用)과 고기찾는 장대와 그림자 풀(探竿影草)과 제자를 시험하는 한 번의 할에 객과 주인을 나눔(一喝分賓主)과 조용照用을 일시에 쓰는 많은 까다로운 언구(絡索) 들을 보여주었다.
많은 납자들이 제나름대로 분별하고 설명하였으나 “우리 법왕의 창고 속에는 이러한 칼이 없다”고 한 것을 사뭇 몰랐다 하리라. 희롱해 보이면 보는 자들은 그저 눈만 껌적거릴 뿐이다. 모름지기 저 빼어난 이들은 계합 증오하여 시험과 인정을 받아 때로는 정면으로 때로는 측면으로 제접하며 본분의 수단을 쓰거니, 어찌 일정한 단계와 매체를 빌리랴.
보수寶壽스님이 개당할 때 삼성三聖스님이 어떤 한 스님을 밀어내자 보수스님은 갑자기 후려쳤다. 그러자 삼성스님은 말하기를 “그대가 이와 같이 사람을 대한다면 이 스님만 눈 멀게 할 뿐 아니라, 진주 땅 온 성안 사람들까지 모두 눈 멀게 하고 말리라”고 하였다. 그러자 보수스님은 주장자를 던져 버리고 곧바로 방장실로 되돌아가 버렸다.
흥화스님이 함께 참학하던 스님이 찾아오는 것을 보더니 문득 ‘할’하자 그 스님도 ‘할’하였고 흥화스님이 또 ‘할’하자 그 스님도 다시 ‘할’하나, 흥화스님은 “보아라. 이 눈 먼 놈아!”하고 곧바로 후려치며 법당에서 쫓아내 버렸다. 시자스님이 “그 스님에겐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요?”하고 묻자 홍화스님은 말하였다. “그에게는 권權도 있고 실實도 있었다. 내가 손을 가지고 그의 면전에 옆으로 두 번을 댔으나 결코 그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이처럼 눈 먼 놈을 때리지 않고 어찌하겠느냐.”
살펴보건대 그저 본분의 종풍은 월등히 뛰어나 지략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저들의 눈이 바른 것만을 바랄 뿐이었다. 올바른 종지를 붙들어 걸머쥐고 바른 종안을 갖추려면 모름지기 처음부터 끝까지 골수에 사무쳐 실오라기만큼도 구애됨이 없이 아득히 홀로 벗어나야만 한다. 그런 뒤에야 정확하게 서로 이어서 이 위대한 법의 깃발을 일으키고 이 큰 법의 횃불을 밝힐 수 있다.
마조馬祖, 백장百丈, 수산首山, 양기楊岐 등의 스님을 계승할 뿐 외람되게 다른 곳을 넘보지 말아라.

원선객元禪客에게 주는 글

조주스님은 “불佛이라는 한 글자를 나는 듣기 좋아 하지 않는다” 하였다. 말해보라.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를. 아마도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를 갖춘 사람이었기 때문에 듣기를 좋아하지 않았을런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러한 도리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듣기를 좋아하지 않았을까? 눈 밝은 사람의 경우라면 듣자마자 귀결점을 알리라. 그렇다면 귀결점이 어디에 있느냐? 한 번 꺼내 보아라.
노조魯祖스님은 납자들이 찾아오는 것을 보면 문득 벽을 마주하고 앉았다. 이는 사람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사람을 위하지 않는 것이냐? 그 요점(節文)은 어디에 있겠느냐? 만일 그와 기연을 투합하고 싶다면 어디로 나아가야 하겠느냐?
백장 대지百丈大智스님은 상당 설법을 끝낼 때마다 다시 대중을 불렀다. 대중들이 머리를 돌리면 백장스님은 말하였다. 하고 이에 대해서 약산藥山 스님은 스스로 말하였다. “백장스님은 법당에서 내려올 때의 일을 말해 보라. 그것으로 어떤 사람을 지도하였는가?” 자, 어떻게 알아차려야겠느냐?

고 선인皐禪人에게 주는 글

고납자皐衲子는 근기와 성품이 매섭고 영리하다. 교해상敎海上에서 책상자를 걸머지고 종장들을 두루 방문하였으며, 지난 날 재상이었던 장무진공張無盡公에게 큰 그릇으로 인정되어 정중한 대접을 받았다. 빼어나게 뛰어난 기상을 자부하고 좀스럽게 자잘한 일 따위는 하려 들지 않았다. 진실하게 서로 만나 한마디 말에 기연이 투합하면 지난날의 속박을 단박에 벗어버렸다. 비록 철저히 깨닫지는 못했으나 요컨대 훤출하여 다른 사람의 억압과 속박을 받지 않는 통쾌한 자였다.
그의 내력을 살펴보았더니 부공傅公(장무진공)의 집에서 그를 선발해 준 것이 애초의 원인이었다. 이윽고 심한 추위를 무릅쓰고 잠깐 함평 땅으로 가려고 나를 찾아왔다. 떠날 것을 알리며 법어를 청하기에 나는 그에게 법어를 내린다.
납자라면 의당 통렬하게 생사 문제로 일을 삼고 지견과 알음알이의 장애를 녹이도록 힘써서, 불조가 전수하고 부촉해 주신 큰 인연을 철저하게 깨쳐야 하리라. 이름 나기를 좋아하지 말고, 뒤로 물러나 실다움을 구해 수행과 이해와 도와 덕이 꽉 차야 한다. 숨으면 숨을수록 숨겨지지가 않아 모든 성인과 천룡이 그를 사람들에게 밀쳐 내리라. 그런데 하물며 세월에 묻혀 단련하고 탁마하여 기다리니, 마치 종소리가 치는 대로 울리듯, 골짜기에 메아리 울리듯, 대장장이의 천만 번 풀무질과 담굼질 속에서 나온 진금이 만세토록 변치 않듯, 만 년이 일념인 경지야 말해 무엇하랴. 그렇게 되면 향상의 본분 소식은 손아귀 속에 있어 바람 부는 대로 풀이 쓰러지듯 하리니, 참으로 여유작작하지 않겠는가.
이 글을 부옹(장무진)에게 보여주어 증명을 삼겠다. 수행에는 오래도록 변치 않음이 중요하다.

원수좌圓首座에게 주는 글

도를 체득한 사람은 선 자리가 고고하고 우뚝하여 어떤 법과도 마주하지 않는다. 티끌 하나 건드리지 않고 움직이니, 어찌 풀하나 까딱 않고 숲 속에 들어가며 물결을 일으키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정도에 그치랴. 그런 가운데 속이 이미 텅 비어 고요하고 밖으로 대상에 응하는 작용이 끊기면 어느덧 저절로 무심을 철저히 깨치게 되니, 비록 만 가지 일이 단박에 닥쳐온다 해도 어찌 거기에 정신이 휘둘리랴. 평상시에는 마치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듯 한가함을 지키다가도 사물에 임하게 되어서는 애초에 재주를 부리지 않는다. 헤아리고 결단함이 바람 들고 번개 구르듯 하다.
옛 스님이 말하기를 “사람이 활 쏘기를 배울 때, 오래오래 해야만 비로소 적중시키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깨닫는 것은 찰나이나 공부를 실천해 가는 데는 모름지기 긴 시간을 요한다. 마치 비둘기 새끼가 태어나서는 붉은 뼈가 허약하지만, 오랫동안 먹이를 주고 길러서 깃털이 다 나면 높고 멀리 날 줄 아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투철하게 깨닫는 요점은 바로 다스림(調伏)에 있는 것이다. 예컨대 모든 티끌 경계가 늘 흘러 들어와 속을 꽉 막으나 체득한 사람에게는 완전히 뚫려 있으니, 모두가 자기의 큰 해탈문이다. 종일토록 무엇을 해도 한 적이 없고, 좋고 싫음이 전혀 없으며 권태도 없다.
모든 중생을 제도하면서도 제도를 한다느니 제도를 받는다느니 하는 생각이 없는데 하물며 염증을 내랴. 성품이 치우치고 메마른 이가 있으면 부족한 점을 보태주어 원만하게 해준다. 또한 방편을 열어 중생을 섭수하여 교화하는 데 있어서, 위 아래로 살펴 응대하며, 높고 낮고 멀고 가까움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한다. 상불경常不輕보살의 행을 실천하고 인욕선인忍辱仙人을 배우며 옛 부처님의 법도를 따라 37품三十七品의 조도법助道法을 성취하며, 4설법四說法을 견고하게 행하면 큰 작용(大用)을 원만하게 깨달으니, 세간과 출세간의 큰 선지식이다.
옛 스님은 말하기를 “촌구석(三家村) 그대로가 저마다 총림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총림이 없는 곳엔 뜻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편리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더욱 편리함에만 집착하게 되니, 반드시 힘써서 끝까지 게으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시끄러움과 고요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곧, 시끄러운 곳에선 두루두루 변화에 응하되 속은 텅 비고 고요하여, 텅 비고 고요한 곳에서는 고요함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가는 곳마다 모두 나의 활발한 생활이다. 오직 속은 비고 밖은 따라 주는 근본이 있는 자라야 이렇게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