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어서화(東語西話)

8. 복과 재앙의 근원은 무엇인가 ?

通達無我法者 2008. 2. 27. 16:35
8. 복과 재앙의 근원은 무엇인가 ?


산을 옮기는 것도 가능하며, 방위를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 번 정해진 업(業)은 피할 수가 없다.
보연(報緣)의 업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선과 악이다.
선하면 복으로 보답하고, 악하면 화로 보답한다.
복과 재앙이 동일하진 않지만,
모두 보연에 속하므로 모두 ‘업’이라고 이름한다.

업으로 정해진 이치는 길가는 사람이 만나는 경계와 같다.
30 리에 다리[橋]하나, 50 리에 점포 하나를 기준으로 하고
다다른 이수(里數)에 의해서 다리와 점포를 설치한다.
이것은 성현이라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선악의 생각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도 아니고 땅으로부터 솟아난 것도 아니다.
한결같이 미망(迷妄)의 정(情) 때문에 제 스스로 결박을 했을 뿐이다.
3세(三世)와 오랜 세월을 통해 인연 때문에 만나는 복과 화는
마치 30리를 가서 다리를 만나고 50 리를 가서 점포를 만나는 것처럼
털끝만큼 착오가 있을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어진 사람이 요절하고, 포악한 사람은 도리어 장수하고,
거역하는 자는 길하고, 의로운 자는 흉한 것만을 볼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옛날에 지었던 것을 지금에 받고,
지금에 지은 것은 후세에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를 두려워하여 업을 짓지 않을지언정,
오는 과보를 받지 않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
그러므로 성인이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탓하지도 않았던 것은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한다.
실제로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가령 그것을 알았다면 복이라 해서 기뻐할 것이 없으며,
재앙이라 해도 슬퍼할 것이 없다.
기쁨을 잊었는데 무엇 때문에 허망하게 한 생각이라도 내어
그 복에 반연하려 하겠는가?
또 슬픔도 잊었기 때문에 억지로 속임수나 계책을 늘어놓아
재앙을 피하려고 해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피하지 않는다.
더러는 구차하게 구하여 얻기도 하고,
구차하게 피하여 면한 자들도 있긴 하다.
그러나 이도 한 번 정해진 업으로서 당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
우연히 구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구차하게 하는 짓이 쓸모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복을 좇고 재앙을 피하려는 생각은 저절로 없어진다.

사념[念]의 자체가 공(空)해지면 간직한 마음자리도 공해져서 도에 회합한다.
불조성현의 해탈한 방법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일부러 조작하는 것이 없다면, 이(理)는 저절로 빼어나게 되고
사(事)는 자연히 수승해진다.
이(理)가 빼어나고 사(事)가 수승해지면, 온 법계(法界)안의 한 띠끌이라도
나의 장엄한 세계에 있지 않는 것이 없다.
이것을 뚜렷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과 증오가 그의 알음알이를 결박하고,
좋은 것은 갖고 싫은 것은 버리려는 망상이 어지럽혀진다.
그리하여 모든 괴로움의 인연과 함께 미래로 들어가 혹독한 고초를 받는다.
그러나 정해진 분수의 업이 한결같이 자기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끝내 깨닫지 못한다면, 정말이지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토지가 비옥하면 심어진 곡식이 반드시 풍성해지고,
샘이 깊으면 물이 마르지 않는다.
또한 저축한 것이 많으면 살림살이가 풍족해지고,
인(因)이 원만하면 그에 따르는 과(果)도 반드시 원만해진다.
이는 천하 고금의 변함없는 진리이다.

성인은 오랜 세월동안 공덕을 쌓고 온갖 수행을 닦아
한량없는 신명(身命)을 다해 헤아리기조차 어려운 법재(法財)를 모았다.
모든 복이 빈틈없이 구족하였고,
만 가지 덕은 원만하여
세간이나 출세간에서 훤출하여 빠지거나 부족한 것이 없다.
그 베푸는 것이 마치 봄이 돌아온 것 같고,
달이 천이나 되는 강에 나타나듯이 자취없이 온다.
대체로 축적된 인(因)이 원만하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과(果)도 원만해진다.

나는 일찌기 가람(伽藍)을 건립하고 탑묘(塔廟)를 세우는 자를
자세히 관찰한 적이 있다.
혹시라도 4방에도 찾아오는 사람이 많지 않거나 그 형세가 미약할 경우에는
많은 재물로써 사람을 모으고,
방편으로써 구하며, 교묘한 계책을 꾸몄다.
심지어는 세력을 동원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모두가
보리(菩提)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다.
가람을 건립해도 깨달음과 상응하지 못할 경우는
불법에는 아무런 이익도 없고,
공덕도 없으며, 남을 이롭게 하는 선행(善行)도 없다.
이것은 허망한 업을 따라서 수순한다는 견해에 바탕이 될 뿐,
보살행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보살이 원만한 깨달음을 수행을 할 때, 가람이나 탑묘를 건립하는데
잘 구비가 안되거나 부족한 경우를 만나면,
근본인(因)이 부족한 것을 반성하고 정근(精勤)을 가다듬어 고행을 닦는다.
이렇게 해서 반드시 깨달음이 수승한 행이 만족하기를 기다린다.
시주단월들이 지녔던 재물을 헌납하면서도
그것을 받아주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면
시주하는 사람 쪽으로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이 이뤄지고,
스님에게는 원만한 깨달음이 이뤄진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가람과 탑묘를 건립하는 방법이 빈틈이 없고 완벽하지 못할 경우,
 지혜로운 재주를 동원할지언정 세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원래 되지 않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재물로써 취하는 경우야 어찌 이치에 어긋나겠습니까?"

내가 이에 대답하였다.

"도인(道人)이 가람과 탑묘를 건립할 경우는
 자신이 도를 먼저 수행한 뒤에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고 합니다.
 중생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반드시 나의 원만한 깨달음의 위치에서
 균등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중생들은 탐심이 쌓여서 모든 괴로움을 다 받습니다.
 재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탐심은 더욱 심해서
 중생들을 더더욱 괴롭게 만듭니다.
 자신의 재산을 헌납하면서도 받아주지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과
 그를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