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암잡록(山艤雜錄)

44. 적조(寂照)스님의 문장

通達無我法者 2008. 3. 5. 21:54
 

 

 

44. 적조(寂照)스님의 문장


스승 적조(寂照)스님은 젊었을 때 허곡(虛谷)스님과 함께 소주(蘇州) 승천사(承天寺)의 각암 진(覺菴眞)스님에게서 공부하였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온 후에야 깨침을 얻게 되어 동정호(洞庭湖)를 생각하면서 부(賦) 한 수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었다. 그 시는 실제로는 향상사(向上事)를 드러낸 것으로서 특별히 남다른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맑은 연기 푸르고

파도는 망망한데

동정호는 아득하여 하늘과 하나되었네

위로는 일흔두 송이 푸른 연꽃 피어 있고

아래엔 삼만육천이랑 은빛 물결

그 가운데에 한 사람

원앙새 수놓인 황금옷 입고

천리마 수레에다 명월주 귀걸이라

그대로 우주 조화와 함께 날으노라

옛일을 생각하니, 하늘바람 나를 실어 그 집 위에 올려놓고

황금줄기에 내린 8월의 맑은 이슬 나에게 마시게 하고

곤륜산의 영롱한 오색 구슬 나에게 요기하라네

내 골수 바뀌어지고

내 간장도 말끔히 씻기워

깨끗한 마음자리 항시 청량쿠나

사방 팔방 이 우주가 적기도 하려니와

만고세월 3광(三光:日月星辰)도 시들시들 늙는구나

오랫동안 볼 수 없으니 속절없이 슬픈 이 내 마음

오랫동안 볼 수 없으니 속절없이 슬픈 이 내 마음

烟蒼蒼 濤茫茫

洞庭遙遙天一

上有七十二朶之靑芙蓉

下有三萬六千頃之白銀漿

中有人兮 體服金鴛鴦

游龍車 明月璫

直與造化參翶翔

憶昔天風吹我登其堂

飮我以金莖八月之瀣沆

食我以崑丘五色之琳琅

換爾精髓

滌爾肝腸

灑然心地常淸凉

非獨可以眇四極輕八荒

抑且可以老萬古淍三光

久不見兮空慨慷

久不見兮空慨慷


또한 유학자를 위해 “십현영매시도(十賢詠梅詩圖)”에 붙인 글 [題] 은 다음과 같다.


시경의 소남편, 서경의 열명편을

옛날 공자께서 정리하셨을 때는

모두가 열매만을 말하였을 뿐

꽃은 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양나라 하손에서

당송의 십군자까지는

소남을 읽고 열명편을 외우고

공자의 학문을 익혔는데도

그들의 시가며 문장에 표현된 바는

모두가 꽃만 이야기하였을 뿐

열매는 말하지 않았다.

아!

세상의 도가 옛날 같지 않고

인심이 더욱 야박하고 거짓된 것은

근본을 두텁게 하지 않는 까닭으로

모든 게 으레 이와 같으니,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감회에 젖어든다.

詩之召南  書之說命

孔子昔所刪定也

皆言其實  而不及其花

由梁何遜  至唐宋十君子者

讀召南  誦說命  習孔子之業者也

形之詠歌述諸章句

皆言其花  而不及其實

噫  世道不古  人心益薄且僞

其不敦本也  例皆如是

余觀是圖  竊有惑焉


조송설(趙松雪), 우소암(虞菴) 등도 이 글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다.

”원수(元叟:적조스님)스님은 식견과 경지가 매우 높아서 붓가는 대로 말을 내뱉아도 자연히 고금에 뛰어난 문장이 되니, 우리가 애를 써 말해 보아도 스님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적조스님은 임제의 정통 종지를 전해받은 분이다. 그가 장난삼아 문장을 가지고 놀며 선문의 뜻을 엮어내는 일은 그저 심심풀이일 뿐이었는데도 큰 선비들이 그를 이처럼 존경하였다. 무문찬(無文粲)스님은 ”요즘 총림에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자들이 궁할 때는 선승의 면모를 잃지 않다가 사정이 피고 나면 “진짜 선지식'이 되버린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통절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