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주(後周) 도비(道丕)스님은 장안(長安) 귀주리(貴胄里) 사람이며 당나라의 종실(宗室)이기도 하다. 7살에 출가하였으며, 19살에 장안이 점령당하고 임금이 낙양(洛陽)으로 피신하는 난리를 만났다. 이에 어머니를 업고 화산(華山)으로 들어가 바위굴에 편안히 모셨다. 그 때 곡식값이 폭등하고 귀하게 되어 먹을 것이 없게 되자 자신은 음식을 먹지 않고 걸식한 것은 어머니에게만 공양하였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밥을 먹었느냐고 물으면 어머니 마음을 상할까 항상 먹었다고 대답하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곽산(霍山)에서 전몰(戰沒)하여 유골이 서리와 이슬에 드러나 있다. 거두어 모시고 와 장사지낼 수 있겠느냐?"
고 하자, 스님은 곧 길을 떠났다. 드디어 곽산에 이르러 수많은 백골(白骨)을 모아서 밤낮으로 경전을 지송(持誦)하면서 이렇게 빌었다.
"옛사람은 정성으로 감동시켜 핏방울로 뼈를 가리어 알아보았다 합니다. 원하옵건대 뭇 뼈 가운데서 움직이는 것이 있어서 아버지의 유해인 줄로 알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일심으로 주의를 기울이면서 눈을 경솔하게 떼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해골 하나가 뼈무더기에서 튀어 나와 한참이나 흔들거렸다. 스님은 팔짝팔짝 뛰는 유골을 안고 돌아와 어머니를 뵈었다. 그날밤 어머니는 부군이 되돌아오는 꿈을 꾸었는데, 다음날 새벽에 유골이 이르른 것이다. 사람들은 이를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결과라 하였다. 그 후 스님은 임금의 요청에 응하여 도를 강론하였는데 상석에 앉는 경우가 많았으며, 조정에서나 일반 대중이 모두 귀의하고 존중하였다.
찬탄하노라.
음식을 끊어 배고픈 어머니께 공양하고
경전을 읽어 아버지의 유골을 찾았으니
대효(大孝)가 죽은 이와 산 이에 함께 하였다 할 수 있으니
지극한 효행은 고금을 초월한 것이라 할 만하다.
아--아, 기특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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