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간록(林間錄)

20. 곡천스님의 기이한 행

通達無我法者 2008. 3. 12. 20:39

 

 

 

 담주(潭州) 도오산(道吾山)에 큰 못이 하나 있었는데, 성미가 고약한 용이 살고 있었다.  

못 위에 작은 나뭇잎만 떨어져도 의례 우뢰가 치고 며칠 동안 비가 내리니,

그 곳을 지나는 길손들은 감히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였다.

 

   자명(慈明)스님이 곡천 대도(谷泉大道 : 宋代人, 임제종)스님과 함께 그 곳을 지나는 길에 곡천스님이 자명스님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함께 목욕이나 하고 가지!” 라고 하니,

자명스님은 그의 손을 탁 뿌리치고 쏜살같이 지나쳐 버렸다.  

곡천스님이 옷을 벗고 연못 속으로 뛰어들어가자마자 뇌성벽력이 으르렁거리고 비린내나는 바람에 빗줄기가 쏟아지면서 숲이 진동하여 나무뿌리가 뽑혔다.  

 

자명스님은 놀라 풀섶에 쭈그리고 앉아 곡천스님이 죽었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잠시 후 비바람이 멈추고 날씨가 개자 물 속에서 갑자기 목을 쑤욱 내밀고서,

“후--”하고 웃고 나오며 자명스님을 불렀다.

   또 한번은 축융봉(祝融峯) 정상에 앉아 밤을 지세게 되었는데 큰 구렁이가 나타나 주위를 서리서리 에워싸니 곡천스님이 옷과 허리띠를 풀어 구렁이 허리를 묶자 한밤중이 되어 구렁이는 보이지 않았다.   동이 트자 지팡이를 짚고 온 산을 찾아 다녀보니,

허리띠가 마른 소나무 가지 위에 감겨 있었다.   

 

이는 소나무의 화신이 요괴로 둔갑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후동사(後洞寺)에서 나한 석불상을 짊어지고 남대사(南臺寺)로 옮겨 놓았는데 그 석불상의 무게는 무려 수백 근이나 되었다.  

 

대중들은 모두 놀랐으나 아무도 그 석불을 누가 가져온 것인지 몰랐으며,

후동사의 대중들도 어떻게 하여 그 곳으로 옮겨졌는지를 모르고 지금까지도 그 석불을 ‘날아온 나한부처님[飛來羅漢佛]’이라 전하고 있다.

 

   또 한번은 형산현(衡山縣)을 지나는 길에 백정이 칼로 고기를 자르는 모습을 보고,

그의 옆에 서서 애처로운 얼굴을 지어 보이며 손가락으로 고기를 가리킨 후 또 다시 자기의 입을 가리키니,

백정이 스님에게 “너는 벙어리냐?” 라고 묻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백정이 몹시 불쌍하게 생각하여 크게 고기를 잘라 바루 속에 넣어주자 생각지도 않은 횡재에 연신 고맙다 말을 하니,

저자 사람들은 모두들 웃었지만 스님은 태연스레 떠나갔다고 한다.

 

   스님은 뒷날 남악(南嶽) 파초암(芭蕉庵)에서 머물다가 억울한 죄로 승복을 벗기우고 속인 옷을 입은 채 침주(郴州)의 감옥에서 노역을 하였다.   

스님은 무더운 날씨에 성 쌓는 노역으로 흙짐을 짊어진 채 네거리를 지나다가 땅바닥에 짐을 부려놓고 앉으니, 구경꾼이 에워쌌다.  

스님은 즉석에서 게를 하였다.

 

   오늘은 유월 육일

   곡천은 죄를 톡톡히 받았으니

   이제 천당으로 가지 않고

   지옥으로 들어가리라.

 

   今朝六月六    谷泉受罪足

   不是上天堂    便是入地獄

 

   게송을 마치자 미소를 지은 채 입적하니, 그윽한 향기가 자욱하였다.  

이에 침주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스님을 공양하고 있다.

   스님은 분양 무덕(汾陽無德)스님을 친견한 분이다.  

남산 청원(南山淸源)스님이 나에게 말하였다.

 

   “내 십여 년 동안 황룡 혜남(黃龍慧南) 스님을 시봉하면서 곡천스님과 자명스님을 만난 일들을 매우 자세하게 들은 적이 있다.   

일찍이 황룡스님께서 한숨을 내쉬며 한탄하기를

‘내, 평생 동안 곡천과 문열(文悅)스님의 경지도 알 수 없었는데 어떻게 자명스님을 알랴?’

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