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解 題

通達無我法者 2008. 3. 24. 11:02

 

解 題

은정희 역주/일지사/자료입력:도규희

 

 

Ⅰ. 원효의 생애(生涯)

 ① 출생(出生)
신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지 1 백여 년 만에 나타난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불교 사상가이자 사회지도자였던 원효는 신라 20대 진평왕 39년(A.D.617)에 현재의 경북 자인 면에 해당하는, 당시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의 밤나무 밑에서 伋皮公의 손자요 말의 아들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가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며,

그를 낳을 때에는 오색의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그의 兒名은 서당(誓幢)이며, 1915년 경주 동북방인 월성군에서 발견된 斷石破片에서도 그를 誓幢和尙이라 하였으니,

幢 이란 俗語로 털이라는 뜻이며 따라서 誓幢은 ‘새털’이라는 의미라 한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하고 달이 찼을 때 집 근처의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어 창황 중에 남편의 털옷을 그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하여 아기를 낳은 데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② 수학(修學)
「宋高僧傳」에서는 그의 나이 10여세에 벌써 出嫁하여 스승을 따라 학업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남달리 영특하여 나중에 佛法의 오의(奧義)를 깨달음에 있어서는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려 大覺國師 義天이 남긴 詩 에 의하면 원효는 義湘과 함께 고구려 고승으로서 백제 땅 전주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 간 晋德和尙의 講下에서 열반경과 유마경 등을 배웠다고 한다.

삼국유사 낭지래운조(朗智來雲條)에는 원효가 磻高寺에 있을 때 靈鷲山의 朗地 가 그로 하여금 「初章觀文」과 「安身事心論」을 쓰게 하였으므로,

원효가 그 글을 지어 朗地 에게 전달하면서 그 글 끝에 ‘西谷沙彌 首禮 東岳上德高岩前......’이라 하여 자신을 사미라 낮추고 상대방인 낭지를 上德으로 높이고 있으니,

이로 보아 원효가 낭지에게 師事하였거나 단순히 학덕 높은 老和尙으로 존경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삼국유사의 택 惠公傳에는 원효가 혜공에게 問學 한 사실을 보이고 있다.

즉 당대의 神僧 혜공이 그 만년 恒沙寺에 있을 때, 원효가 諸經疏를 찬술하면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는 언제나 혜공에게 가서 질의하였다는 것이다.

이 이상의 기록이 空無한 상태에서 확인할 수는 없으나. 그의 저술에 나타나는 인용문을 통하여 그가 불교학 전반에 걸쳐서뿐만 아니라,

논어나 노자. 장자 등 유가서와 도가서에도 정통하고 있음을 볼 때, 광범위한 분야에 걸친 그의 修學經歷을 짐작할 수 있다.

 ③ 입당유학시도(入唐留學試圖)
34세에 의상과 함께 당의 玄裝(602-664)에게 唯識學을 배우려고 요동에까지 갔다 가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몰려 여러 날 갇혀 있다가 겨우 놓여나와 돌아왔다.

45세에 두 번 째로 역시 의상과 함께 이번에는 海路로 해서 入唐하기 위해 백제 땅이었던 항구로 가는 도중, 비 오는 밤길인지라 어느 땅 막에서 자게 되었다.

아침에 깨어 땅 막 아닌 오래된 무덤임을 알고도 부득이 또 하룻밤을 더 지내다가 귀신의 동티를 만나 心法을 크게 깨치게 되었다.

“곧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니 땅 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효는 더 이상 入唐 留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의상 혼자 배를 타고 당으로 들어가고,

원효는 곧 바로 되돌아와 이후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하였다.

 ④ 撰 著
오늘날 여러 문헌에 의하면, 원효의 저서는 100여종의 240여권(또는 85종의 170여권)으로 알려져 있고,

그 연구범위도 小ㆍ大승, 경ㆍ율ㆍ론 등 거의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있어 그야말로 초인간적인 學解와 저술활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욱이 그의 대표적 서술이라 할 수 있는 「大乘起信論疏」와 「金剛三昧經論」에서 보인 탁월한 이해와 견해는 중국의 석학들마저 찬탄과 경이를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아깝게도 현존하고 있는 것은 19부 22권뿐이다.

그나마도 충분한 연구가 되어 있지 않은 형편이어서 후학들의 배전의 노력이 요구되고 있는 터이다.
그의 저술 목록 중에서 가장 분량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은 唯識系d하 律學部門, 그리고 起信論에 관련된 것들이며 현존하는 것 중 중요한 것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法華經宗要 1권, 大慧度經宗要 1권, 涅槃經宗要 1권, 無量壽經宗要 1권, 金剛三昧經論 3권, 起信論疏 3권, 起信論別疏記 1권, 二?義 1권, 中邊分別論疏 弟 2권, 華嚴經疏 弟 3권, 十門 和諍 論 斷片,

 ⑤ 大衆敎化
원효는 染淨無二, 眞俗一如라는 그의 학문적 이론을 당시의 신라사회에서 대중과 함께 몸소 실행에 옮겼던 드문 실천가였다.

당시 신라사회는 圓光과 慈藏의 교화에 큰 영향을 입었으나, 불교의 수용 면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층과 일반 서민층 사이에는 아직도 괴리가 있었다.

이러한 때에 惠空, 惠宿, 大安 등이 대중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 대중들에게 까지 불교를 일상 생활화시킴으로써 유익한 의지처가 되게 하였다.
원효 역시 이들의 뒤를 이어 당시의 승려들이 대개 성내의 대사원에서 귀족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에 반하여, 지방의 촌락, 가항(街巷)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無碍박을 두드리고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사람이 한 길로 生死를 벗어났도다”

라는 구절로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가무와 잡담 중에 佛法을 널리 알려 서민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가 이처럼 서민 대중의 교화에 나선 것은 입당 포기 후 心法을 깨달 후이며,

요석 공주와의 失戒로 스스로 小姓居士라 자칭하던 때 이후로 보여 진다.

또 그가 스스로 小姓居士라 부른 것은. 실계로 인한 속죄의 한 방법이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대중교화의 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대중 교화의 선구자인 혜공이 등에 삼태기를 지고 가항에서 大醉 歌舞한 것이나, 大安이 특이한 옷차림으로 징판에서 銅鉢(동발)을 치면서 “大安, 大安”을 외친 경우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대중 교화의 행각을 마친 뒤에는 다시 소성거사 아닌 원효 화상으로 돌아가 穴寺에서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神文王[A.D. 686]년 3월 30일 70세)

  Ⅱ. 원효의 사상

그는 불교사상을 연구함에 있어 어느 一宗, 一派에 구애됨이 없이 “萬法이 一佛乘에 총섭 되어야 하는 것은 마치 大海 중에 일체 衆流가 들어가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금강삼매경론)고 하여

대ㆍ소승, 性ㆍ相, 頓ㆍ漸의 상호대립적인 교의를 융회하여 一佛乘에로 귀결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뭇 경전의 부분적인 면을 통합하여 온갖 물줄기를 한 맛의 진리 바다로 돌아가게 하고,

불교의 지극히 공변된 뜻을 열어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爭論들을 和會시킨다”(열반경종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和諍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원효의 이 화쟁 방법 내지 사상은 근원적으로는 석가 이전 인도의 베다사상(Vedism)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인도철학의 碩學 라다크리슈난(Radhakrishnan,S.)에 의하면 인도 원주민을 정복한 아리안(Aryans)의 종교는 처음부터 광범하고, 자기 발전적이고, 관대하여 성장해 감에 따라 그가 만나는 새로운 힘들은 자기 안으로 융화시키고,

보다 낮은 종교를 무시하거나 그 존재를 말살하기 위하여 싸우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것만이 유일하고 참된 종교라는 광신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도인들의 사유경향이 印度佛敎에서 和 의 사상을 있게 것이라 볼 수 있다.

석가는 당시 수많은 사상체계들이 서로 대립, 충돌을 일으키는 形而上學的 문제에 대한 논쟁에 끼어든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한 논리는 진실한 실천적 인식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는 진실하게 살아가는 길과 진실에 대한 실천적 인식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했을 뿐.

베다의 권위를 배척하고 모든 형이상학적 논의를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했다.

거시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형이상학적 주장들은 모두가 상대적이고 일반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불교에 있어서의 和의 의미는 이처럼 실천 원리를 중시하는 석가에서 그 싹이 나타난 셈이고,

이는 대중교화에 끈을 두어 眞俗一如를 주장한 대승 불교 후기에까지 면면히 지속된 정신이라 할 수 있다.

석가 이후 1200여 년 만에 신라통일기에 나타난 원효가 실천을 중시하면서 和諍사상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은 바로 석가 이후 대승에 이르기까지의 和의 정신의 시대적 재현 내지 재창조라 보아야 할 것이다.
원효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 이 화쟁의 방법에 의하여 眞俗不二의 사상을 나타내려 한 대표적인 것으로 「대승기신론 소」「대승기신론 별기」를 들 수 있다.

「대승기신론」은 산스크리트 원본이 없는 탓으로 印度撰述인가 中國撰述인가가 논란되어 오기도 하지만,

대승불교시대의 후기에 나타난 불교사상서 중 가장 뛰어난 논서로 알려져 있다. 「대승기신론」은 인도에서 그 당시 대립되고 있던 양대 불교 사상,

즉 中觀派 와 유 伽(唯識)派의 사상을 지양ㆍ화합시켜 眞과 俗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迷汚한 현실생활(俗 ) 가운데서 깨달음의 세계로 끊임없이 추구하고 수행함에 의하여 완성된 인격(眞)을 이루어 갈 수 있으며,

한편 깨달음(眞)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아직 迷汚한 단계(俗)에 있는 중생을 이끌어 갈 의무가 있는 것임을 주장함으로써 진속일여의 사상을 잘 나타낸 논서이다.
원효는 이 「대승기신론」을 만나자마자 바로 자신의 구도적 학문과 삶의 자세와 너무도 일치함에 크게 감명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는 「대승기신론」에 대하여 무려 7種의 연구서를 냈고,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 소」「대승기신론 별기」는 일찍부터 중국의 불교학계에서까지 높이 평가되어 마지않았던 것이다.


「대승기신론」(이하 기신론이라 칭함)에 대한 연구로는 일찍부터 慧遠, 元曉, 法藏의 주석서를 三大疏 로 지칭하고 있으나 혜원의 것은 僞撰이라는 說과 함께 質 로나 量 으로 보아 원효의 것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법장의 것은 원효의 것을 그 分料와 語句解釋에 있어 거의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 원효의 「기신론 소」「기신론 별기」야말로 최고의 기신론 연구서라 할 수 있다.


원효의 기신론관을 논하기 전에 먼저 기신론 본문의 구조와 내용을 소개하기로 하자.
기신론은 因緣分, 立義分, 修行信心分, 勸修利益分 등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연분에서는 이 논을 짓게 된 이유를 말하였고, 立義分에서는 이 논의 대의, 즉 一心, 二門, 三大를 제시하였다. 解釋分은 앞서의 立義分에서 제시한 一心, 二門을 구체적으로 논술한 것으로 기신론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 부분은 다시 顯示正義, 對治邪執, 分別發趣相의 셋으로 나누어진다.

우선 正義를 드러냄에 있어서 一心(衆生心)을 心眞如門 과 心生滅門 의 둘로 크게 구분하였다.

심진여문에서는 如實空, 如實不空 등을 말하여 마음의 청정한 면을 묘사하였으며,

심생멸문에서는 阿黎耶識의 覺과 不覺의 二義와 薰習 등을 말하여 마음의 염정연기를 밝혔다.

다음으로 邪執을 對治함에 있어, 人ㆍ法 二執의 對治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發心 修行하여 道에 나아감을 분별하는 상에서는 앞서의 해석분 중의 발취도상이 不定聚衆生중의 勝人을 위한 설명임에 비하여 여기서는 부정취중생 중의 劣人을 위하여 四信, 五行 및 他力念佛을 설한다.

마지막 권수이익분에서는 이 논을 믿고 닦으면 막대한 이익이 있으리라는 것을 말하였다.

이상의 것을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이제 원효의 기신론관에서 특징적인 것 몇 가지를 들고자 한다.
첫째, 원효는 그의 「기신론 소」「기신론 별기」에서 기신론의 성격을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의 止揚ㆍ總合이라고 판석한다.

즉 「기신론」은 마음의 청정한 면만을 주로 찬탄하고 강조해 온 중관사상과 마음의 염오한 면을 주로 밝혀 온 유가사상을 잘 조화시켜 진속불이의 뜻을 밝힌 것이라 본 것이다.

이는 「기신론」이 一心을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의 둘로 크게 나눈 후,

심진여문에서는 마음의 청정한 면을 묘사하고 심생멸문에서는 마음의 염정연기를 밝히고 있는 데서 매우 타당한 견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원효의 이러한 해석은 「기신론」출현의 시기에 인도 불교사상계에서 중관파와 유가파가 서로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던 역사적 사실에도 부응하는 것이다.

 

원효를 거의 그대로 답습한 법장은 이 점에 있어서는 견해를 달리하여 「기신론」을 如來藏緣起宗 이라 판석하였다.

원래 여래장 사상은 중국 화엄종의 선구인 地論宗 南道派 들에 의하여 성하게 연구되어 왔던 것으로,

화엄종의 제 3조인 법장설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여 「기신론」을 여래장연기종설로만 알고 있고,

심지어는 법장설에서 일보 나아가 여래장 연기종파가 역사상 실재했다고까지 주장하는 학자(勝又 敎)있다.

그러나 漢字를 모르는 인도의 불교학자나 歐美의 학자들은 여래장 연기종이라는 이름조차 모르며(高崎直道),

또 일부 일본 학자 중에는 중국화엄가들의 「기신론」이해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도 하다.(柏木弘雄)


勝又 등 일본 학자들의 여래장 연기종설은 재론 할 가치도 없거니와 〔기신론 소〕와 〔기신론 별기〕에서 우리의 미망한 마음,

즉 무명이 본래의 청정한 즉 진여를 훈습하여 불각심이 처음으로 일어난 無明業相, 이 무명업상 즉 극미한 動念에 의하여 所緣境相을 볼 수 있게 되는 轉相, 그리고 이 전상에 의하여 경계를 나타내는 現相 등 세 가지 미세한 마음,

곧 三細識이 아라야식位에 해당된다고 주장하였다.

원효의 이 三細ㆍ아라야식설은 〔기신론〕본문에 직접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주의깊게 정독한다면 〔기신론〕 자체의 논술에서 충분히 입증할 수 있는 것으로 (抽稿 :원효의 三細ㆍ아라야식설의 창안 참조) 이는 법장에 의하여 그대로 답습되었고 그 뒤 일본학자들이 이에 대하여 찬ㆍ반의 두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는 터이다.


원효는 「기신론」의 기본구조인 一心二門에서 먼저 二門 중 心眞如門을 중관학파의 주장으로,

心生滅門을 유가학파의 주장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 二門이 一心으로 귀결하는 데서 「기신론」의 성격을 중관ㆍ유식의 지양ㆍ조화 내지 眞 ㆍ俗을 別體로 보려는 고집을 꺾는 것이라 단정한 것 같다.

다음, 「기신론」에 심생멸문내에서 자성청정한 여래장의 불생멸심이 생멸심과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非一非異) 아라야식이 존재하게 되며,

따라서 이 아라야식에는 覺義 와 不覺義의 二義가 있게 된다고 한 것에서 원효는 아라야식의 二義性을 앞서 일심이문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원효가 이러한 二義의 和合識으로서의 아라야식에 三細라는 미세한 마음들을 배대한 것은 唯識家 에서의 아라야식이 막연한 潛在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에 비하여

「기신론」의 아라야식은 세 가지의 미세한 마음으로 구체화되었음을 밝혀 놓은 것이다.

또 유식가의 아라야식은 異熟識으로서 輪廻의 주체일 뿐, 깨달음의 淨法을 낼 수 없는 생멸식일 뿐이지만, 「기신론」의 아라야식은 和合識으로서 그 중의 不覺 즉 생멸분인 業相, 轉相, 現相이 除滅되면 바로 그 자리가 불생멸분 즉 자성청정심이 되어 각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원효가 삼세라고 하는 還滅의 구체적 단계를 제시한 것은 心源 즉 깨달음의 경지로 환멸해 가는 수행면에 잇어 보다 실천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이 三細ㆍ아라야식설은 중관ㆍ유식학파의 양대 주장의 조화라는 「기신론」의 성격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셋째, 원효는 아라야식의 覺義에 의하여 자성청정한 覺의 상태로 환멸한 후의 本覺의 성격 즉 智淨相과 不思議業相에 대하여 自利와 利他의 두 가지 면으로 배대시킴으로써 심원에 도달한 각자는 깨달은 상태(自利)에 안주하지 말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적극 노력해야함(利他)을 역설한다.

 

이것은 俗 가운데서 眞으로 향해 가는 길(上求菩提)을 명시했던 앞서의 三細ㆍ아라야식설에 비하여 이제 眞 으로부터 俗으로 돌아와 중생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함을 의미하는 것이니 바로 下化衆生이다.

그의 이러한 自利ㆍ利他의 兼修 즉 眞俗不二의 사상은 그의 力著이며, 「기신론」의 이론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 저 〔金剛三昧經論〕의 全篇에서도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不住涅槃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원효가 「기신론 소」와 「기신론 별기」에서 강조하고자 한 것은,

眞俗一如, 不住涅槃의 사상이었으니, 이는 出世間的 自利만이 불교의 진의가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깨달음의 세계를 이룩해야 한다(利他)는 대승불교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

또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彌勒淨土說과 〔十念論〕등을 통하여 일반 대중들이 보다 쉽게 깨달음의 세계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려 하였고,

종국에는 집필의 붓을 꺾고 下化衆生을 위한 실천의 길로 뛰어들었다.

이에서 이론 면에서나 실천면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정신을 누구보다 강력하게 구현한 한국의 뛰어난 구도자 원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