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운와기담 - 성철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4. 11. 21:12
 

 

 

운와기담 - 성철스님


「운와기담」은 송나라 대혜 종고스님의 제자인 효영중온曉瑩仲溫스님이 운와암에 살던 1178년경, 당시 불교계에 돌던 이야기나 선배들의 기연들을 모아 펴낸 책이다.


1. 마음이 순수하고 성질이 급한 스님

불심본재佛心本才선사는 처음 수업원受業院에서 범패를 익혀 세사에 응해 왔다. 한번은 성城에 가서 법기法器를 차려 놓다가 어느 노인을 만났는데 그가 재선사에게 말하였다.

“네 자신이 바로 법기인데 하필이면 딴 데서 그것을 찾느냐?”

재선사는 이 말 끝에 홀연히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 길로 서선사西禪寺의 법석으로 달려가니 방장스님 해인 융海印隆선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평생 잠을 자도 사람 앞에 떨어지지 않고 잠을

깨도 사람 뒤에 떨어지지 않는다.”

재선사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그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가 달도자達道者라는 노스님을 만나 경을 읽다가 “한 터럭 끝의 사자가 백억이나 되는 터럭 끝에 일시에 나타난다”는 구절에서 그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한 터럭 끝의 사자가 어떻게 백억이나 되는 터럭 끝에 일시에 나타납니까?”

“네가 이제사 총림에 들어와 가지고서 어떻게 그러한 이치를 알 수 있겠느냐?”

재선사가 또 다시 물었다.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고 가운데 있지도 않다 하니, 이것은 무슨 이치입니까?”

달도자가 “그것은 네 스스로 보아야 한다”고 하자 재선사는 이를 계기로 문을 드나들 때마다 반드시 문지방 위에 발을 걸터 놓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안에도 밖에도 가운데도 없다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의 마음은 이렇게 순수했다.그 당시 서선사에는 대중이 천 명이 넘었는데 재선사는 신심을 내서 변소 청소를 맡았다.

어느 날 저녁 물 뿌리고 청소하는데 마침 융선사가 야참夜參에 참석하여 결좌하고서 주장자를 집어 던지면서 하는 법문을 듣게 되었다.

깨닫고 보면 한 터럭이 큰 바다를 삼키고온 누리가 하나의 작은 티끌임을 비로소 알게 된다.

이 말에 재선사는 훤히 깨친 바 있었다. 민현에서 예장 황룡산에 이르렀으나 사심死心선사와 기연이 맞지 않아 얼마 뒤 영원靈源선사에게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영원선사의 선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스스로 반성해 보았다.

‘이 일을 내 분명히 보았는데 다만 기연에 임하여 토해 내지를 못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원선사는 그의 독실함을 알고, 확실히 깨쳐야만 비로소 자유자재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얼마 뒤 옆 스님이 「조동광록曹洞廣錄」을 읽는데 이를 훔쳐보다가 “약산藥山선사가 땔감을 짊어지고 돌아오는데 한 스님이 ‘어디에서 오느냐?’고 해서 약선사는 ‘땔감을 해 온다’고 하였다.

그 스님이 또 다시 약산선사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칼을 가리키며 ‘달그락 달그락 소리나는 그것은 무엇이요?’ 라고 묻자 약산선사는 칼을 빼어들고 나무 자르는 시늉을 했다”라는 부분에 이르러 재선사는 기쁜 마음에 옆에 있던 스님을 한 대 갈겨 주고 주렴을 걷어 올리면서 요사채의 문을 박차고 나가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게송을 읊었다.

꽝꽝!

큰 바다 물이 마르고

허공이 깨지는구나

사방 팔방에 가로막는 난간이 없고

삼라만상이 모두 새 나오는구나

재선사는 장계현에서 태어났다. 남악南嶽 상봉사

上封寺 주지로 나갔다가 민현으로 돌아와 동산東山

대승사大乘寺와 복청福淸 영석사靈石寺 주지를

지낸 뒤 고산사鼓山寺로 옮겨와서 입적하였다.

성질이 급했으므로 총림에서는 그에게

‘재전(才煎:지지고 볶는 성격을 가진 본재스님)’

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2. 이를 잡아 태워 죽이며 들려준 법문

풍성豊城의 정손감사(淨遜監寺:감사는 절살림을 맡은 직책)는 여릉廬陵의 도일 유나道一維那와 함께 천남사泉南寺 교충 광敎忠光선사의 법석을 도와 강호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광선사는 바로 대혜스님께서 ‘선장원’이라는 별호를 지어 준 사람이며 손감사는 재주가 깊고

생각이 고상하며 재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날씨가 차가운 세모에 여러 벗들과 화로에 둘러앉았는데 마침 손감사가 이 한 마리를 잡아

화로 불 위에 태우며 장난을 하니, 이를 비웃는 사람이 있었다.

“단사자端獅子스님은 새벽을 알리는 닭을 위해서도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는데, 사형은 이를 태워 죽여놓고 어찌 법문으로 제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손감사가 입을 벌리자 곧 송이 이뤄졌다.

이여! 나의 말을 귀담아 듣고

앞으로 잘 기억하기 바라노라.

네가 이의 몸으로 떨어짐은

고기와 핏덩이를 탐했던 까닭이라.

천당에 가서 태어나지 못하고

내 속옷에 와서 살면서

새끼를 기르니 그 이름은 ‘서케’라

그 서캐 무수하구나.

나의 몸 또한 견고하지 못하니

너 어찌 영원히 견고하랴

알지어다! 몽환 같은 이 내 몸은

번갯불 같고 아침 이슬 같음을

내 이제 방편을 열어

너에게 몸 바꿀 곳을 가르쳐 주노니

이 화로에서

결코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말라.

이번 업소신이 다하면

왔던 길을 다시는 걷지 말아라.

결국 너를 어느 곳으로 가라 할까

맹렬한 불더미 속에서 한 소리 퍽 튀기며

진진찰찰에 다시 돌아오지 말지어다!

이에 많은 벗들이 깜짝 놀라 단사자의 글보다 훨씬

훌륭하다고 감탄하였다. 얼마 후 손선사는 고향으로

돌아가 역사안力士岸의 초과사超果寺에서

입적하였다.

3. 무덤에 붙인 게송

건염建炎 3년(1129) 정월 초하루, 원오圓悟선사는 운거사雲居寺에서 은사 왕범지王梵志가 지은 게송을 소개하고 덧붙였다.


성 밖에는 흙만두(묘지의 비유)가 있고

성 안에는 팥고물이 있네

사람마다 한 개씩 먹이노니

맛이 없다고 싫어하지 마오.

황노직(黃魯直:黃庭堅)이 여기에 한 마디 붙였다.

자기도 흙만두가 되는데

누구에게 그것을 먹이려는가.

이를 계기로 소동파는 뒷부분 두 구절을 고쳤다.

먼저 술을 뿌려서

맛이 나도록 하여라.

그러나 왕범지가 지은 원래의 송에 깊은 의미가 있다.

다만 표현의 차이 때문에 소동파가 뒷 구절을

고쳤지만 시의 여흥은 끝내 다하지 못하였다.

이제 사운四韻을 만들어 세상을 경책하고 나

자신도 경책하고자 한다.

성 밖에도 흙만두

성 안에는 팥고물

많은 사람이 통곡으로 이별할 때

흙 속으로 들어가

차례 차례 만두 고물이 되어

무궁히 이별하는구나.

이로 세안을 일깨우노니

눈뜨고 졸지 말게나!

원오선사는 손수 이 글을 적어 한 서기에게 보냈는데

그가 바로 만년사萬年寺 주지 촌승村僧이라는

사람이다.

4. 산중의 행주좌와에 붙인 게송

소주蘇州 변辯 선사는 처음 궁융사穹隆寺 원圓

선사에게 공부하여 깨친 바 있었는데,

서울에 들어와 천령사天寧寺 원오선사의 휘하에서

더욱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 한번은 대해선사가

선자화상船子華亭이 협산夾山스님을 지도한

화두를 송하였다.

강어구에서 노 한 대로 알음알이 없애 주니

이후로 협산의 기개 하늘을 찔렀네

새치 낚시 바늘을 떠나서는 소식 없더니

홀로 바다에 철선을 띄웠노라.

변선사가 그 운에 따라 송하였다.

합당한 착어로 선자화상 응수했으나

땅을 파서 하늘을 찾는 격

설령 노 끝에서 확철대오 한다 해도

낡고 물 새는 화정의 배란다.

변선사의 인품은 거칠고 호방하여 총림에서는

그를 ‘변추(덜렁이 변선사)’라 하였다.

한번은 사위의四威儀에 대해 게송을 지었다.

산길을 걸음

숲 사이를 뚫고 새들은 어지럽게 나는데

종종 산승의 살생하려는 마음 더해지니

원숭이는 놀라 깊은 구덩이에 빠졌네.

산속에 머뭄

밀실에 단정히 앉았으나 생각은 끝없이

가련하다. 궁한 귀신이여, 출가자의 집에서

소금을 찾고 보니 식초가 없구나.

산속에 앉음

두 발 포개 가부좌 하노라니 맷돌 같구나

짚신이 몇 천 켤레나 닳았던가

그래도 온몸이 모두가 허물일세.

산속에 누움

그루터기 베고 누워 환히 깨치니

금강의 바른 눈알이 튀어나왔구나

우주에 이 소식을 아는 이 없어.

그 후에 세상에 나왔으나 한 차례도 개당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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