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성철스님] 자기를 바로 봅시다.

通達無我法者 2008. 3. 19. 11:33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중생이 본디부처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가 극락세계, 황금세계, 절대세계입니다.

진리의 눈만 뜨면 내가 바로 진금체眞金體이고, 내가 사는 곳 전체가 진금체이며 극락세계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은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자유」에서


내가 언제나 말하는 것입니다만 누구든지 아무리 크게 깨치고 아무리 도를 성취했다고 해도 그 깨친 경계가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 하여야만 실제로 바로 깨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정일여도 안되고, 몽중일여도 안 된 그런 깨침은 깨친 것도 아니고 실제 생사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참선은 실제로 참선해야 하고 깨침은 실제로 깨쳐야 합니다.

그래야 생사에 자재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단지 생각으로만 깨쳤다고 하는 것은 생사에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깨침이 아니라 불교의 병이요, 외도입니다.

참선의 근본 요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공부는 실제로 오매일여가 되어 영겁불망이 되도록 목숨을 던져 놓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을 아끼지 않고, 목숨도 돌보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고 하니까 어떤 스님은 “스님, 저는 화두를 배운 지 십 년이 지났습니다만 공부가 안 됩니다.”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공부를 해도 안 된다는 것은 결국 공부를 안 했다는 말입니다.

마치 서울에 꼭 가고 싶으면 자꾸 걸어가야 끝내는 서울에 도착하게 되듯이, 십년 , 이십년을 걸어가도 서울이 안 보인다는 말은 서울로 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영원한 자유」에서

무릇 이설異說가운데 일례는 돈오점수다.

선문의 돈오점수의 원조元祖는 하택荷澤이며 규봉圭峰이 계승하고 보조普照가 역설한 바이다.

그러나 돈오점수의 대종大宗인 보조도 돈오점수를 상술한 그의 「절요節要」벽두에서 하택은 지해종사知解宗師니 조계의 적자嫡子가 아니라고 단언하였다.

이는 보조의 독단이 아니요 육조가 수기하고 총림이 공인한 바이다.

따라서 돈오점수 사상을 신봉하는 자는 전부 지해종도이다.
본디 지해는 정법을 장애하는 최대의 금기이므로 선문의 정안조사正眼祖師들은 이를 통렬히 배척하였다.

그러므로 선문에서 지해종도라 하면 이는 납승의 생명을 상실 한 것이니 돈오점수 사상은 이렇게 가공한 결과를 초래한다.
「선문정로」서문에서

이 때 대중들 가운데서 한 스님이 일어서며 말했다.
“스님의 너무도 넓고 박학다식한 법문에 저희 무지몽매한 중생들이 불 같은 의심을 금할 수 없어서 몇 가지 여쭈어 보아야겠습니다.”
“몇 가지 물어 보겠으면, 천천히, 날씨도 시원할 때, 그때 며칠이고 이야기해 보자.

이리 더운데, 대중이 모두 네 이야기 때문에, 그래 네 이야기 들으며 기다리고 있으란 말이냐, 쌍놈아.”
“그러면 스님은 어떤 분인지, 이것 하나만은 꼭 여쭙고 싶습니다.”
“어떤 분이냐고! 내가 성철이지. 해인사 방장 성철, 나이는 칠십이고...(웃음)
해인사 대적광전 상단법문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다.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 대중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조계종정 취임법문에서

집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부모님입니다.

내 집안에 계시는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거리마다 부처님이 계시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잘 받드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발 밑에 기는 벌레가 부처님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벌레들을 잘 보살피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머리 위에 나는 새가 부처님입니다.

날아다니는 생명들을 잘 보호하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넓고 넓은 우주, 한없는 천지의 모든 것이 다 부처님입니다.

수없이 많은 이 부처님께 정성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참 불공입니다.
이리 가도 부처님 저리 가도 부처님, 부처님을 아무리 피하려고 하여도 피할 수가 없으니 불공의 대상은 무궁무진하여 미래겁이 다하도록 불공을 하여도 끝이 없습니다.

이렇듯 한량없는 부처님을 모시고 언제나 불공을 하며 살 수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들께 한없는 공양구를 올리고 불공하는 것보다 곳곳에 계시는 부처님을 잘 모시고 섬기는 것이 억천만배 비유할 수 없이 더 복이 많다고 석가세존은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불보살의 큰 서원이며 불교의 근본입니다.
우리 모두 이렇듯 거룩한 법을 가르쳐 주신 석가세존께 깊이 감사하며 언제나 불공으로 생활합시다.
종정법어 1983년 5월

부처는 중생의 원수요 중생은 부처의 원수니
원수와 원수가 서로 보복함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다.
아수라阿修羅는 기뻐하고 보살은 벌벌 떠니
한낮에 밤길을 가고 밝은 곳에서 어둡게 잔다.
흰 머리와 검은 머리여 노자와 묵작이요
유구有句와 무구無句여 공자와 도척이로다.
오월에 서리가 내림이여 바늘 끝에 몸을 감추고
삼동에 꽃이 핌이여 빙판에 말을 달린다.
작게 나와서 크게 만남은 묻지 않거니와
상 주고 벌 주는 한 마디는 어떤 것인가?

한참 묵묵한 뒤에 말씀하셨다.

장마 개이지 아니 하니 허물이 남쪽에 있구나.
「본지풍광」에서

산호 베개 위 흐르는 두 줄기 눈물이여
한 줄기는 그대를 그리워함이요
한 줄기는 그대를 원망함으로다

이슬비 꽃에 뿌리니 천방울 눈물이요
엷은 연기 대 숲을 덮으니 한바탕 근심이로다.

숲 사이에서 단풍잎 태워 술을 테우고
바위의 푸른 이끼 걷고 시를 새긴다

서리 내린 하늘 달 덜어진 한밤중에
무쇠소를 거꾸로 하고 저가를 지나가네

흰 해오라기 밭에 내리니 천 송이 눈이요
누런 꾀꼬리 나무에 오르니 한 가지 꽃이로다

「본지풍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