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法語)

왜 게으름을 피우는가 / 설암법흠(雪巖法欽)

通達無我法者 2008. 4. 26. 13:42

 

 

 

때가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 눈을 돌리면 곧 내생인데
어찌하여 몸과 정신이 건강할 때에
철저히 깨치지 못하며 명백하게 밝히지 못하느냐?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명산대찰(名山大刹)의 풍광이 아름다운 곳에서
깨끗한 음식을 먹고 지내는 것이.
만약 이곳에서도 철저히 깨닫지 못하고 명백히 밝혀 내지 못한다면,
이는 그대들이 자포자기한 것이며 스스로가 게으름을 피워 어리석은 자가 된 것이니라.
만약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어째서 사방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묻지 않느냐?
나는 16세에 중이 되고, 18세에 행각을 시작하여 쌍림원(雙林遠) 화상 문하에 있었는데,
만사를 제쳐놓고 공부에만 정신을 쏟았으며 하루 종일 뜰 밖을 나서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無)'자를 화두로 들었는데,
문득 한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살펴보니
그 한 생각은 즉시 얼음과 같이 차고 맑고 고요하여 전혀 동요가 없었다.
그때는 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으며
종소리나 북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9세 때 영은(靈隱)에서 지냈는데 어느 날
처주(處州) 화상이 편지에 이렇게 적어 보냈다.
"법흠(법欽)아,
너의 공부는 죽은 물과 같아서 아무 일도 해내지 못하느니라.
움직이는 것과 고요한 것, 이 두 가지의 모양에 매달려 있구나.
참선이란 모름지기 큰 의심을 내어야 한다.
작은 의심에는 작은 깨침이 있고,
큰 의심에는 큰 깨침이 있는 것이니라."

나는 화상의 말씀을 듣고 곧 화두를 간시궐(乾屎 )로 바꾸고는
이렇게 의심해 보고 저렇게 의심해 보고 또 이렇게도 들어보고 저렇게도 들어보았으나
도리어 혼란에 빠져 잠시도 공부가 순일하지 못했다.
나는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긴 뒤 일곱 명의 도반과 함께 좌선을 했는데
이부자리는 아예 치워 버리고 눕지 않았다.
그때 수 상좌(修上佐)가 있었는데 그는 매일 방석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마치 철로 만든 기둥과 같았다.
걸어다닐 때도 두 눈을 크게 뜨고 두 팔을 축 늘어뜨린 것이
영락없이 철기둥이 걸어가고 있는 것과 같았다.
나는 그에게 이야기를 걸어 보려 하였으나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나는 이렇게 두 해 동안 눕지 않고 지냈는데 피곤이 겹치고 겹쳐 드디어 눕고 말았다.
한번 눕게 되니 내쳐 모두를 다 놓아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두 달을 보낸 뒤 새로 정돈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니 비로소 정신이 새로워졌다.

 

원래 참선 공부는 잠을 자지 않고는 되지 않는다.
이렇게 지내는 중에 하루는 수 상좌를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내가 물었다.
"전에는 수 상좌와 말하고 싶었는데도 항상 피하는 것만 같았는데 왜 그랬습니까?"
"진정한 공부인은 손톱 깎을 겨를도 없는 것인데
어찌 남과 이야기하고 있을 시간이 있겠는가?"
나는 다시 그에게 물었다.

"저는 지금도 산란한 마음을 없애지 못했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너는 아직도 정신이 강철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등골을 똑바로 세우고 있는 힘을 다해 몸뚱이 전체로
한 개의 화두를 만들면 어느 곳에서 산란한 마음이 들어온단 말이냐?"
나는 수 상좌가 일어준 대로 공부를 시작했더니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을 다 잊은 채 맑고 깨끗한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았는데 삼일째 되는 날 오후였다.

삼문(三門) 아래를 걷고 있다가 수 상좌를 만났다.
수 상좌가 문득 물었다.
"거기서 무엇을 하느냐?"
"도를 보고 있습니다."
"너는 무엇을 가지고 도라 하느냐?"
이 물음에 나는 대답을 못했다. 속이 답답했다.
나는 곧바로 선방으로 되돌아와 다시 좌선을 하려고 하는데
다시 수 상좌를 만났다.

수 상좌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눈을 크게 뜨고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하는 생각만 하라."
나는 이 한 마디를 듣고 곧 자리에 돌아와 방석을 깔고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활짝 열리더니 마치 땅이 툭! 꺼진 것과 같아 보였다.
나는 이런 경지를 남에게 보일 수도 없고
또 무슨 말로도 비유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곧 수 상좌를 찾았더니 수 상좌는 내 말을 듣더니
"좋다. 좋다" 하며 손을 끌고 문 밖으로 나갔다.

버드나무가 줄지어 선 뚝 위를 한 바퀴 돌며 천지 사이를 우러러보니,
눈에 보이는 것이며 귀에 들리는 온갖 삼라만상이 이미 싫어하여 버렸던 것들이며,
무명·번뇌 등이 모두 자신의 묘하고 밝은 참성품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리하여 이 경계가 반달이 넘도록 지속되었는데,
아까울새라, 그때에 눈 밝은 선사를 만나지 못하여 애석하게도 그 자리에 그냥 머무르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견처(見處)를 벗어나지 못하면 정견(正見)을 장애한다고 하는 것이니,
매양 잠들 때에는 두 조각이 되었고, 화두를 뚫고 나가는 길은 알 수 있었으나
화두의 길이 끊어져 철벽(鐵壁)과 같은 경계는 알 수 없었다.
비록 경산(徑山 : 설암 선사의 스승) 선사의 문하에서
다년간 법을 청하였으나 한 마디도 이 심중의 의심을 건드리고 집어내는 말씀이 없었고,
경전이나 어록을 들쳐 봐도 이 병을 치유할 한 마디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 의심 덩어리를 넣어둔 채 10년이 지났는데
하루는 법당에 올라가다가 눈을 들어 큰 잣나무를 보는 순간 마음이 활짝 열렸다.
이미 얻었던 경계도, 가슴속에 걸렸던 덩어리도 산산이 흩어지고
마치 어두운 방에 있다가 햇빛으로 나온 것만 같았다.
이로부터 생(生)도 의심하지 않고 사(死)도 의심하지 않으며,
부처도 의심하지 않으며, 조사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緇門警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