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기 전의 수행은 비록 수행하기를 잊지 않고 익히고 닦았지만 곳곳에 의심을 일으켜 자유롭지 못함이 마치 어떤 물건이 가슴속에 걸려 있는 것 같아서 불안한 모습이 항상 앞에 나타난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공부가 성숙하게 되면 몸과 마음 그리고 인식의 대상이 되는 객관 세계가 편안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편안해졌더라도 의심의 근본 뿌리가 끊어지지 못한 것은 마치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 같아서 생사의 경계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깨치기 전의 닦음은 진정한 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비록 대치하는 방편이 있더라도 생각마다 의혹이 없어 더럽히거나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을 지내면 저절로 천진하고 묘한 성품에 합당하여 그대로 걸림없이 고요하고 분명해서, 생각마다 온갖 대상이나 경계에 관계하면서도 마음마다 모든 번뇌를 아주 끊어서 자기 성품(自性)을 떠나지 않고, 선정과 지혜를 고루 평등히 가져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고 앞에서 말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아무런 차별이 없다.
상(相)을 따르는 수행 방법의 선정과 지혜가 비록 점차로 닦는 열등한 근기의 수행이지만,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 보면 쇠로써 금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이런 도리를 안다면 어찌 두 가지 수행 방법의 선정과 지혜에 앞뒤의 차례가 있다고 두 가지로 보는 의심이 있겠는가.
바라건대, 수행자는 이 말을 깊이 잘 되새겨 다시는 의심을 일으켜 스스로 물러서지 않도록 하라. 대장부의 뜻을 갖추어 최상의 깨달음을 구하려 한다면 다음의 말을 명심하라.
결코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말의 참 뜻을 바로 알아, 모든 것을 자기에게 돌리고 근본에 합당하면, 스승 없이 얻은 참 지혜가 저절로 드러나고, 천지의 이치를 명확하게 알아, 지혜의 몸을 성취하되 다른 사람에 의하여 깨달은 것이 아닐 것이다.
이 오묘한 뜻이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긴 하지만 일찍이 지혜의 씨를 심은 대승(大乘)의 근기가 아니면 한 생각에 바른 믿음을 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비방하며 무간지옥의 업을 짓는 이가 많다. 그러나 믿고 받들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한 번 귀를 스치는 잠깐 동안의 인연을 맺으면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유심결(唯心訣)'에 이르기를 "듣기만 하고 믿지 않더라도 부처가 될 종자의 인연을 맺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인간과 천상의 복보다 뛰어나다"라고 했다.
그렇게 해도 성불할 바른 인연을 잃지 않는데 하물며 들어서 믿고, 배워서 성취하여 잊지 않고 수호하는 사람의 공덕이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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