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어(法語)

두타제일(頭陀第一) 마하가섭(摩訶迦葉)

通達無我法者 2008. 5. 9. 14:18
석굴암 내부의 마하가섭 상

 
영축산상에서 여러 제자들이 부처님 말씀을 들으려고 숨소리마저 죽이고 앉아 있자 부처님은 아무 말 없이 꽃을 들어 보인다. 그때 좌중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제자가 조용히 미소를 보낸다. 그가 바로 마하가섭 존자이다. 그는 부처님이 꽃을 들어보인 마음을 읽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말 없이 미소지은 것이다. 바로 이심전심이라 일컫는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는 이 두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잉태되어 생명을 발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선의 커다란 동맥으로서 이 염화시중의 미소는 거듭거듭 선의 길을 가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말없이 건내져 오늘날 또 한 점 미소를 이 시대의 눈밝은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무문관(無門關)』 제6측 '세존염화(世尊拈花)'에서는 그 이심전심의 미소 뒤에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법을 부촉하는 모습을 이렇게 그려내고 있다

'나는 이제 진리에 대한 바른 안목과 열반으로 향하는 미묘한 마음, 형상을 벗어난 실상과 지극히 미묘한 진리의 문,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경전의 테두리를 넘어선 가르침(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

부처님이 선(禪)을 마하가섭에게 전했다는 이 일화는 사실 여부를 떠나서 가섭 자신의 이론을 초월한 직관적 깨달음의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부처님과 그 사이의 긴밀한 일체감을 잘 암시해 주고 있다.


걸림없는 두타 행자


마하가섭은 마가다국 왕사성 마하사타라 마을의 핍팔라(pippala :畢鉢羅)라는 나무 아래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어릴적 이름이 핍팔라야나(pippalayana)라 했으며, 그가 속한 종족이 마하가샤파(Makasyapa)였으므로 훗날 마하카샤파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음역이 마하가섭(摩訶迦葉)이다. 핍팔라 나무는 칠엽수(七葉樹)로 그 부근에 굴이 있어 핍팔라 굴이라했는데, 이곳이 제1차 경전 편찬 장소로 유명한 칠엽굴(七葉窟)이다. 그의 아버지는 왕사성의 제일의 부호인 느야그로다(Nyagrodha) 브라만으로서, 그 집안의 경제력은 중인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였다.

마하가섭은 바라문계 여자와 결혼하여 12년 동안 행복한 생활을 지낸데다가 부친이 사망하자 가업을 넘겨받아 일가의 가장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세속적 생활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부처님 교단으로 아내와 함께 출가한다. 그는 영특한 기질을 타고 났음인지 부처님 곁에서 수행한 지 불과 8일만에 아라한의 지위에 다다르게 된다. 그후 가섭은 자신의 가사를 부처님께 바치고 대신 부처님이 입던 분소의(糞掃衣)로 갈아 입고 두타행의 길을 간다.

두타(頭陀)란 산스크리트 두타(dhuta)에서 나온 말로 번뇌를 털어내고 모든 집착을 버린다는 의미에서 수치(修治) 또는 기제(棄除)라고 한역되었다. 바로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불교수행의 원형인 것이다. 경전에서는 그 투타행을 12가지를 들어 말하고 있다. 즉 1)조용한 곳에 거주한다. 2)항상 걸식한다. 3)걸식할 때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4)하루에 한 번만 먹는다. 5)과식하지 않는다. 6)정오 이후에는 과즙이나 설탕물을 마시지 않는다. 7)헤지고 헐은 옷을 입는다. 8)삼의(三衣)만 소유한다. 9)무상관을 체득하기 위해 무덤 결에 머무른다. 10) 주거지에 대한 애착을 버리기 위해 나무 밑에서 지낸다. 11) 아무것도 없은 한데 땅(露地)에 앉아 좌정에 든다. 12)항상 앉아 있으며 눕지 않는다.

훗날 이러한 두타행은 산야와 세상을 순역하면서 세상의 온갖 고통을 인내하는 행각으로 변하는데 마하가섭은 이러한 두타행을 실행하는데 으뜸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간소한 생활을 해나간다. 엄격한 규율과 철저한 금욕 생활은 그의 사문됨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의 성문 제자로서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아 두타행을 모두 다 구족한 사람은 바로 장로 마하가섭 비구이니라'라고 했다.


석가모니의 마음을 세 곳에서 전해 받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 즉 기수급고독원에 머무시면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설법할 때의 일이다. 마하가섭이 오랫동안 아란야(aranyaka : 조용한 수행처로서 오늘날의 암자와 같은 곳)에서 수행한 결과 머리는 길게 자라 헝클어지고 수염은 한참 깎지 않아서 무성한 데다가 옷 또한 남루하기 그지 없었다. 바로 그가 멀리 숲속에서 부처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여러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차며 비웃고 깔보았다. 세존은 제자들의 이러한 마음을 알아 차리고 가섭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서오시오, 가섭이여. 내가 앉은 이 절반의 자리에 앉으시오.' 그러면서 부처님께서는 그를 일러, 나와 같은 선정에 머므르고 있으며 나와 같이 번뇌가 다 했으며, 나와 같이 지혜를 갖추었으며 나와 같은 광대하고 훌륭한 공덕을 갖추었노라고 칭찬했다. (잡아함 제41권 『납의중경(衲衣重經)』)

이러한 사연은 다자탑전 반분좌(多子塔前 半分座)라는 선(禪)의 고사(古事)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그 잔상을 해맒은 물결 위에 아련하게 흘려놓고 있다.

부처님이 중인도 북쪽에 있던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설법하고 계실 때의 일이다. 남루한 차림으로 마하가섭이 그 자리에 늦게 도착하자 여러 제자들이 그에게 멸시의 눈초리를 보냈다. 아 그런데, 석가모니께서 자신의 자리를 반쯤 내어주어 같이 앉는 것이었다.

석가모니와 마하가섭 사이에 말없이 이어지는 긴밀한 교감은 다음의 일화에서 신비로움의 극치를 달린다.

석가모니께서는 80생을 마감하시고 사라 쌍수 밑에서 조용히 열반에 잠겨 법신(法身)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때 가섭이 늦게 도착하여 열반하시는 모습을 못 본 것을 안타까와 하면서 흐느껴 울자, 석가모니는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보인 것이다.

이 이야기를 간결하게 표현해 주는 언어가 사라쌍수하 곽시쌍부(沙羅雙樹下 槨示雙趺)이다. 우리는 부처님과 가섭 사이의 이러한 말을 떠난 상징적 대화에서 죽인 이와 산 자를 갈라놓는 죽음의 경계마저 뛰어넘는 이심전심의 관계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영축산에서 가섭에게 꽃을 들어보인 일을 시작해서 다자탑과 사라 나무 아래의 세 장소에서 가섭에게 마음을 보였다 하여, 이를 일러 삼처전심(三處傳心)이라 한다.

마하가섭의 뛰어난 선적 직관은 아마 그의 철저한 수행, 즉 두타행의 소산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초기 선종의 역사를 펴나간 중국 선사들의 가슴 속에는 그의 두타행이 고스란히 살아서 움직이게 된다. 중국 선종의 초조 보리달마 입적 직후 초기 선종의 구도자들은 북부 중국을 중심으로 일정한 선원이 없이 두타행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혜가(慧可)의 제자들도 엄격한 두타행자였다고 일지(一指) 스님은 『100문 100단 -선불교 강좌편 -』에서 말하고 있다.


경전을 편찬하다


마하가섭은 부처님께서 입멸에 들자, 그분의 말씀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후세에 전하고자 경전을 편찬하는 우두머리 역할을 한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기 앞서 마하가섭과 아난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이제 늙어 나이가 들어 80이 다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오래지 않아 열반에 들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을 너희 두 사람에게 부촉한다. 잘 기억하여 외워서 가르쳐 끊어지지 않게 하고 세상에 널리 펴야 한다. 성문 중에서 가섭과 아난다 너희들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증일아함 권35)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자 마하가섭은 자신의 고향인 왕사성 칠엽굴에서 최초로 경전의 편집을 나선다(이것을 제1차 結集이라 한다). 부처님 말씀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부처님 입멸 이후 교단의 실질적인 통솔자가 없어지자,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혼란을 불식시키고자 교법을 통일시키고 자신의 위치을 공고히 다지려는 목적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증거는 편집 장소를 그가 태어난 고향으로 정한데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경전 편집에 따른 재정적 지원으로서 당시 아사세 왕의 후원을 맏았다고 하나 이는 명목상이고 실제로는 가섭 본가의 재력이 동원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최완수 선생은 말한다. 사실 여러 경전에서는 그가 일체의 재산을 다버리고 출가하고 철저한 두탈행을 했다는 증거가 여실하게 보이나, 그가 버린 재보는 항상의 그의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을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경전 편집의 일대사 일연을 펼쳤다는 것이다.

내막이야 어떻든 마하가섭은 수행승 중에서 대표자를 모아서 그 각각의 사람들이 기억한 교법을 표현하게 한 다음, 그 교의(敎義)를 통일시키려는 편집 회의를 열어 교의의 산실을 막고 교권을 확고하게 확립시키게 된다.

그런데 그 편집이란 게 문자로 써서 기록하는 그런 경전 편찬이 아니라 부처님 곁에 항상 머물렀던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 말씀을 기억해 내서 외우면 거기에 참가한 500제자가 그 말에 동의를 표현하는 식으로 머리 속에서 정리해 넣은 식의 편집이었다. 혹자는 그 방대한 경전을 외워서 기억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구도의 길로 나서는 인도인의 삶의 방식으로서는 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지금도 저 베다며 우파니샤드도 줄줄 외우고 있을 정도다.

오늘날 전하는 500나한도는 이때 모인 5백명의 아라한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마하가섭의 모습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염화시중의 광경을 그린 불화나 그 밖의 석가모니 후불탱화에서도 마하가섭은 백발이 성성한데다 길고 흰 수염이 나부끼는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석굴암 십대 제자상에서는 입구에서 본존불을 향하여 우측 사리불 다음에 등장하는데, 합장한 두 손을 눈 높이까지 극진히 올린 채 살짝 고개를 숙인, 누군가에 예경하거나 간절히 기구하는 모습으로 서 있다. 이 분만이 맨발로 서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그것은 두타 행자의 상징인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