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각성론(覺醒論)-5

通達無我法者 2008. 8. 15. 19:26

그러나 그대의 본성이 드러나기 전에 달마는 그대가 명심해야 할 한 가지 경험을 제시하고 있다. 만일 그대가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본다면 그대 속에 남아 있던 집착은 갑자기 끝나 버릴 것이다. 그리고 실체의 본성이 드러날 것이다. 깨달음의 시작은 그렇게 나타난다. 그것은 깨달음의 전부가 아니다. 단지 깨달음의 시작일 뿐이다.

만일 그대가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본다면, 마음은 그런 것을 투사할 수 없다. 마음은 오직 알고 있는 것만 투사한다. 마음은 태양을 투사할 수 있다. 그러나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투사하지는 못하나. 그것은 이전에 전혀 본 적이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까비르는 명상 중에 일천 개의 태양이 그의 둘레를 비춘다고 말했다. 그 빛은 너무나 밝아서 두렵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시작에 불과하다. 그대의 모든 집착이―그 빛이 그대의 집착을 모두 태워 버린다―끝나는 것과 깨달음의 막이 열리는 징조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대만이 아는 것이다. 그대는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사실 그대는 그것에 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코웃음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우스갯거리로 만들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대가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특히 그대에 대해서 말이다. 그들은 그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항상 그대보다는 자신이 더 고상하고, 더 거룩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지금 그대는 사기를 치고 있는 것이 되고 만다. 아무도 그대에게 속지 않는다.

그러니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던 지식들로 그것을 파괴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는 깨달음의 시작을 막아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그대는 가슴속에 비밀로 간직하는 것이 낫다. 그것은 너무나 고귀한 것이어서 그들에게 함부로 내놓아서는 안 된다.

그대가 밤의 어둠 속에서 걷고 서고 앉고 눕고 하던 모든 것이 백일하에 드러날 때 그대는 놀라지 말라. 그것은 그대의 마음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깨달음이 다른 문으로 들어온다. 그것은 그대의 고유하고 독특한 개성에 달린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 나타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일천 개의 태양이 나타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 그대는 밤에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어둠 속에 있다가 갑자기 대낮처럼 밝아질 것이다. 그러나 놀라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좋은 징조이다. 그것은 그대가 막 깨달음을 얻으려는 시작이다. 그리고 그대의 모든 집착을 부숴 버릴 것이다.

만일 그대가 자신의 본성을 보거든 그대는 더 이상 경전을 읽거나 염불(念佛)을 할 필요가 없다. 이제 학식이나 지식 따위는 한낱 쓸모 없는 것이 되었다. 그것들은 그대의 각성을 가리는 구름일 뿐이다. 그것들은 정말로 백해무익한 것들이다. 경전의 교리는 그대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한번 그대가 자신의 마음을 본 이상 교리에 집착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깨달음을 얻었을 대 경전을 태워 버린 위대한 스승들의 예는 많이 있다. 자신의 본성을 찾는 작업이 끝났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본성을 알았고 따라서 모든 경전은 한낱 휴지에 불과한 것이다. 중생에서 벗어나서 부처로 가기 위해서는 그대가 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죽음에서 죽음 없는 상태로 가는 것, 분별에서 초월로 가는 것이며, 그대의 모든 행동을 끝내는 것이다. 그대는 이제 행위 없는 행동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대의 각성을 기르고 삶이 가져다주는 것을 받아들여라. 누구든지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한다. 어떻게 그대의 각성을, 그대의 깨어 있음을 기를 것인가? 깨어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걸을 때에도 깨어 있어 발걸음을 옮기라. 깨어 있음 속에서 손을 움직이라. 그때 그대는 내면에서 침묵을 느낄 것이며 축복을 맛볼 것이다.

먹을 때도 깨어 있음 속에서 먹으라. 대부분 사람들은 무의식 속에서 산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먹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의 입맛이 만족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깨어 있음 속에서 먹는다면 그때 그대는 허겁지겁 먹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그 음식을 음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대의 마음과 몸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과학자들은 그대가 식사를 할 때 40번에서 80번 가량 씹지 않으면, 그대는 소화기관에 불필요한 부담을 주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대의 수명은 소화기관이 얼마나 튼튼한가에 달려 있다. 만약 그것이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대는 오랫동안 육체에 남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대가 식사를 할 때 마구 삼켜서 소화기관에 부담을 준다면, 그대는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다가 결국 단명할 것이다. 그대는 잘 모르겠지만 소화기관에는 이빨이 없다. 그대가 잘 씹지 않으면 그것은 위장에 큰 부담을 주게 된다.

이제부터 식사시간마다 한번에 40번식 씹어 보라. 그대는 횟수를 세기 위해서 천상 깨어 있어야 할 5것이다. 기계적으로 씹고 기계적으로 삼키지 말라. 그대는 씹는 횟수에 집중해 있다가 40번을 씹고 나서 그 다음에 삼키어야 한다.

깨어 있음을 기른다는 것은 모든 일을 자각의 기회로 삼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비를 맞을 때 그대는 무의식적으로, 기계적으로 비를 맞았다. 그대는 항상 그렇게 해 왔기 때문에 비를 맞으면서도 수천 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지 말고 비를 맞을 때는 그 순간의 시원함과 선선함을 맛 보라. 그것을 충분히 의식해 보라.

그대의 의식을 기르는 것은 24시간 계속된다. 그것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는다. 오히려 하면 할수록 힘이 나고 상쾌해진다. 그리고 두 번째로, 삶이 가져다주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래의 삶이다. 삶이 그대에게 가져다 주는 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아 들이라. 삶은 그대에게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시원한 미풍이 불어올 때 그대는 존재계가 그대에게 선물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는가? 아름다운 구름이 지나갈 때, 석양의 아름다운 색조와 무지개가 그대에게 보여질 때, 그대는 존재계에 감사함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대가 깨어 있음으로 인해서 점점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런 수용적인 자세 속에서 그대는 감추어진 초월을 맛볼 것이다.

한번 중생이 그들의 본성을 보게 되면 모든 집착이 끝나 버린다. 각성은 더 이상 감추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당장에만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오직 지금뿐이다. 이 구절은 반드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대는 지금이란 것에 집중함으로써 더 이상 연기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지난 30년 동안 나에게 와서 이렇게 말했다.
"그 다음부터 명상을 시작할 것입니다."

뭘 시작하겠다는 것인가? 그대가 명상의 참뜻을 깨닫는다면 지금이 바로 그것을 할 순간이다 미래에 하겠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연기한다는 것은 그대가 아직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명상은 그대가 삶의 마지막에 이루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다. 명상은 그대 삶의 근본이 되어야 한다. 우선 그대는 돈을 벌고, 딸을 시집보내고, 아들을 의과대학에 보내고, 그리고 큰 집을 사고, 그리고…… 할 일은 무한정이다. 언제 명상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명상은 그대 삶의 밑바닥에 있다. 신이 그대를 살게 하는 동안 빨리 그 근본으로 되돌아와야 한다. 그대가 정해 놓은 일은 많고 인생은 너무나 짧다. 다 이루어 놓고 명상을 하겠다면 이미 시간이 없다. 죽음은 그대가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 찾아온다.

그래서 달마도 '지금'을 강조하는 것이다. 적어도 한가지는 확실하다.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다는 점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은 확실히 그대가 살아 있지 않은가? 다음 순간에는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 한 순간도 더 이상 연기하지 말라. 만약 그대가 깨달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때는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여기가 바로 그 장소이다.

그대가 도를 진정으로 찾고 싶다면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그대가 도를 찾기를 원한다면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라. 어떤 선입관도 갖지 말라. 도를 찾으려면 이러이러한 요구 조건을 채워야 한다고 말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도를 알지 못한다.

에고의 요구를 들어주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결코 도를 찾을 수 없다. 그대의 선입관은 그대의 마음을 결코 초월시키지 않는다. 도는 그대의 마음을 초월하는 것이다.

한번 그대가 업에서 벗어나 그대의 각성을 기르기 시작하면 모든 집착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그대의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대의 각성이 자라날수록 그대의 집착은 줄어든다. 그리고 각성이 충만해지면 집착은 완전히 사라진다. 그것은 그대가 한 사람의 친구도 없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을 포기해야 되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남을 소유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은 추한 마음이다. 그대는 나눠주며 즐거워할 수 있다. 그 누구라도 그 무엇이라도 의존하지 말라. 그대는 결코 노예가 아니다.

집착을 떨쳐 버리는 것은 모든 노예 근성을 버린다는 뜻이다. 사람이나 사물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대는 정말 자유롭다. 그것만이 진짜 자유이다. 정치적인 자유나 경제적인 자유는 아주 부분적인 자유이며 왜곡된 자유이다. 진정한 자유는 영적인 자유이며 모든 집착을 떨어버릴 때 나오는 것이다 각성의 제단을 쌓을 때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참된 이해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그대는 아무런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광신자는 부처가 말한 뜻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더욱 애쓸수록 성현의 본뜻에서 더욱 멀어진다. 하루 종일 그들은 염불하고 경전을 독송한다. 그러나 자신의 신성한 본성에 대해서 그들은 여전히 장님이다. 그래서 그들은 생사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에 관한 일은 어떤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한가할 뿐이지 게으른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발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한가할 뿐이다. 행동이 필요한 상황에서 단지 대응할 뿐이다. 그는 자신의 의식을 기다리는 사람이다. 그의 본성이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노력 없는 노력을 하는 사람이다. 행위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단지 존재계가 자신을 통해 흘러가도록 자신을 열어 놓은 사람이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텅 빈 대나무일 뿐이다. 존재계는 그를 통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그의 유일한 기능은 노래를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는 속이 텅 빈 대나무 피리인 것이다. 노래는 존재계 자체에서 흘러나온다. 부처는 한가한 사람이다. 그는 복과 명성을 쫓아서 뛰어다니지 않는다. 결국에는 사라져 버릴 것들이 뭐 그리 좋겠는가?

그것들은 그대의 삶을 파괴할 뿐이다. 그것들은 그대를 알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없애 버린다. 그것들은 그대의 삶이 위대한 은총과 축복으로 변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깡그리 부숴 버린다. 달마의 이 간단한 몇 마디의 말은 그대로 하여금 존재계가 주는 가장 위대한 환희의 순간을 맛보게 해준다. 그러나 그대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준비를 갖추고 그대의 상속권을 요구하라.

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