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금강경(金剛經)

한형조교수/13강/소유냐 존재냐

通達無我法者 2008. 8. 15. 21:40

'위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삶의 목표는 쾌락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 속 깊이 이상주의자들입니다.

로맨티스트들이지요.

그렇지 않다면 왜 보살님네들이,

남편이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아이들도 다 컸으며, 아파트 평수도 남부럽지 않은데, 왜 절을 찾아,

스님들의 법문을 듣고, 대웅전에 참배하고, 참선에 열중하십니까.

또 한편, 옛적의 사랑을 떠올리며, 마음을 나눌 사람을 은밀하게 꿈꾸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외면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리 내면은 여전히 가난하고, 불만족스럽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공한 분들이 이럴진대, 그렇지 못한 분들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가치’는 우리가 익히 아는 것과는 다른 곳에 있고,

우리는 지금 길을 잘못 들어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붓다는 왜 성을 넘어 출가하셨을까
우리는 그동안 ‘위대한 약속(Great Promise)’을 믿었습니다.

산업과 기술의 발달이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실현시켜 줄 것이라는 그 약속을 말입니다.

무제한의 생산이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 자유를 주고,

그리하여 인류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믿음에 오랫동안 취했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이 약속이 결코 지켜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설명을 제 식으로 부연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는, 위에서 적었듯이,

욕망의 무제한한 충족이 인간에게 안녕과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욕망의 무제한한 충족이 행복과 안녕을 주는 것이라면,

고타마 붓다께서는 모든 것이 넘치게 갖추어져 있는 그 삶을 버리고 유성출가(踰城出家),

‘말을 타고 성벽을 넘어 출가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앙굿타라 니카야>에는 샤카 족의 고타마께서 누리던 유족함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다른 집에서는 하인과 종들에게 쌀겨에 소금죽을 섞어 주었으나,

내 아버지의 집에서는 하인과 종들에게 쌀밥과 고기로 된 음식을 주었다.” (폴커 초츠·<붓다>)
“비구들아, 나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나를 위해 각색의 연꽃이 핀 연못들을 만들어주었고,

몸에는 베나레스산 향유를 뿌렸으며,

거기서 생산된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내 머리 위에는 늘 하얀 양산이 받쳐져 있었다.

추위도 더위도 몰랐고, 먼지도 이슬도 맞지 않았다.

계절마다 다른 궁전에서 살았다.

우기 넉 달을 지낼 동안, 시녀들이 나를 둘러싸고 음악을 연주해 주었고,

나는 궁전에서 나올 일이 없었다.” (브루스터·<고타마 붓다의 생애>)
이렇게 부족함이 없는 삶도 붓다의 근본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속에는 먹고 입는 ‘동물적 욕구’뿐만 아니라, 의미와 유대의 ‘인간적 욕구’가 있습니다.

그 지점은 얼른 눈에 뜨이지 않고, 은밀하여,

그리고 순위에 있어 늘 뒷전이기 때문에 자각하기 어렵고,

또 그 욕구에 적절한 방법과 기술을 찾아내기 어렵습니다.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두 번째는 아주 중요한 것인데요,

우리가 얻은 자유가 환상이라는 것입니다.

세탁기와 냉장고가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고 손발을 더 자유롭게 해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예속적 상황을 살고 있습니다.

보이는 억압은 줄어들었으되,

미셀 푸코의 팬옵티콘(Panopticon·‘모든 것을 본다’는 뜻)이 예시하고 있듯이,

보이지 않는 감시가 삶의 전 영역에 침투해 있고,

더구나 인간은 자신의 욕망마저 자신이 선택하지 못하는 예속적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개인의 의지와 행동이 권력과 산업,

매스컴에 의해 조장되고 조정되는 시절이 없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곳곳에 감시카메라와 곳곳에 광고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환상의 비현실 속에서 추상적으로 타율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러면서도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17세기 서양 철학자 스피노자가 비유한 대로,

돌멩이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하늘을 날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늘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외적 강제와 억압이 줄어들고, 개성을 존중한다는데도,

우리는 왜 이렇게 획일적 가치와 판에 박은 삶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는지 말입니다.
세 번째는 사회간 국가간 빈부의 격차가 커진다는 점이고,

네 번째는 생태의 위기와 핵전쟁의 위협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프롬은 이 모든 요소들이 ‘지구적 종말’을 예비하고 있다는 음울한 경고를 발하고 있습니다.

프롬은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정신의 근본적인 변화에 의존하고 있다!”

이 진단에 따르면,

우리는 개개인의 내적 행복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지구라는 푸른 대리석 구슬을 깨먹지 않기 위해서도 삶의 태도를 혁명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것을 프롬은 ‘소유’에서 ‘존재’에로 라는 말로 정식화시켰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은 가히 불교적 삶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그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전 지구적 실패는 인간의 삶의 목적이 쾌락이라는 잘못된 심리적 전제로부터 야기된 것입니다.
삶의 목표는 쾌락이 아니라 행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성’, 혹은 ‘불성(佛性)’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관적으로 갈망하는 욕구’와 ‘객관적으로 타당한 욕구’ 사이에 있는 근본적 차이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 구분을 잊어버렸습니다.

이 구분은 동서양의 지혜의 전통을 읽는 키워드입니다.

불교 또한 그 전통을 따라 우리의 일상적 욕구가 인간의 객관적 본성과 일치하지 않으며,

나아가 그것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발상이 불교를 도저한 이원론 위에 세우게 했습니다.

상식은 이 점을 잘 납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불교를 어렵게 느낍니다.

심하면,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

혹은 말씀은 좋으나 물정 모르는 소리로 웃고 맙니다.

그러나 불교는 세상에서 가장 진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노자가 그랬지요, “듣고서 낄낄대지 않으면 진리가 되기에 부족하니라.”
불교는 ‘주관적으로 갈망하는 욕구’의 소외된 메커니즘을 밝히고,

그것을 회향하여 ‘객관적으로 타당한 욕구’에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것을 밝히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붓다는 보리수 아래의 깨달음을 얻고도 그 진실을 쉽게 설파하지 않으시려 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상식이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

오직 오랜 선정과 지혜의 계발로서만 보이는 이 ‘자리’를 대중들에게 말해 보아야 씨가 먹히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관적 갈망과 그 환상에 빠져 있는 중생들을 위해 의구심을 접고 대 자비를 베풂으로써,

불교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위대한 결단에 깊이 합장 올립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