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이야기·이규행

27. 해 떨어지는 낙양(洛陽)

通達無我法者 2008. 9. 20. 18:33

 

 

해 떨어지는 낙양(洛陽)

달마의 발자국엔 빗물이 고여 있었다

조사가 보이지 않았다
자광대사는 빗줄기를 뚫고
이곳저곳 찾아 나섰다



지극한 간병 덕분에 달마는 곧 건강을 되찾았다. 자광 대사의 안내를 받으며 절 안팎으로 산책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달마는 영령사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면서 이 절이 범상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우선 절의 규모가 엄청났다. 광주의 법성사나 금릉의 동태사보다 결코 작지 않은 규모였다. 건축양식도 독특했다. 선정불전(禪庭佛殿)이 아주 빼어났다. 주변의 경관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처럼 구도가 꽉 짜여 있었다.

게다가 영령사에는 자광 대사를 비롯한 여러 고승대덕이 주석하고 있었다. 수많은 승려들이 이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에 열중했다. 달마는 이런 절의 분위기에 마음이 끌렸다.

달마는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자광 대사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때로는 밤늦게까지 도담(道談)을 나누었다. 얘기를 나눌수록 자광 대사의 비범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자광 대사야말로 나무랄 데 없는 선학자(禪學者)였다. 이런 느낌을 갖기는 자광 대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달마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님을 진작 알아보았다. 애당초 진흙 속에 쓰러져 있는 이역(異域)의 노인을 발견했을 때부터 그의 심장은 가쁘게 뛰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자광 대사는 거의 무아지경에서 달마를 들쳐 업고 영령사로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레를 간병과 기도로 지샜다. 달마가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의식을 회복해서야 비로소 침소에 들어 눈을 붙였다.

자광 대사는 자리에 누워 왜 이방의 노인에게 그토록 정성을 쏟고 있는지 자문해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자비심의 발로가 아니었다. 분명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듯싶었다. 그는 더 이상 누워 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한달음에 달마의 처소로 달려갔다.

달마는 깊은 잠 속에 빠져든 것 같았다. 전혀 인기척을 의식하지 못했다. 자광 대사는 여태까지 했던 대로 달마 옆에 가부좌를 하고 앉아 달마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비록 여위고 창백했지만 얼굴에선 형언할 수 없는 기풍이 풍겼다. 달마의 숨소리는 들릴 듯 말 듯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호흡이 고르지 못했다. 빠른가 싶으면 이내 느려지는 등 심한 기복을 나타내고 있었다. 자광 대사는 긴장했다. 달마의 들숨과 날숨을 헤아리며 지켜보았다. 그러나 어느 사이 그의 숨은 달마의 숨에 합치되고 말았다. 그는 이런 사실조차 한참 뒤에야 깨닫고는 크게 놀랐다. 도대체 이 노인에게 무슨 힘이 있기에 숨조차 빨려들게 하는지 의아스러웠다. 숨만 빨려드는 것이 아니었다. 몸과 얼이 모두 빨려드는 느낌이었다.

자광 대사는 달마가 건강을 찾은 뒤에도 곁을 떠나기가 싫었다.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붙잡아매는 듯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그는 달마에게 가르침을 받으려 애썼다. 그러나 달마는 그 때마다 소이부답(笑而不答)으로 응했다. 겨우 알아낸 것이 천축의 28대 조사라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 해도 경천동지할 만했다. 자광 대사는 더욱 극진하게 달마를 모셨다. 그는 달마가 이 절에 오래도록 머물게 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다.

달마는 모처럼 안정과 평안 속에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던 하루는 혼자 선방을 나섰다. 절 안에 흐르고 있는 작은 실개천을 따라 거닐었다. 바위틈을 비집고 흐르는 개울소리는 마치 음악소리인양 분위기를 돋우었다. 물소리와 하나가 되어 흐르듯 걷듯 하며 한참을 내려갔다. 드디어 조그만 연못에 이르렀다. 개울은 그 곳에서 모든 소리를 멈추었다. 연못은 고요 그 자체였고 맑기가 거울 같았다. 달마는 연못 속에 드리운 자기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연못 속에 있는 자기와 연못가에 있는 자기가 둘 아닌 하나라는 사실을 새삼 되새겼다.

문득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 뒤로 커다란 불탑(佛塔)이 투영되었다. 달마는 몸을 돌려 산등성이를 올려다보았다. 구층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달마는 여러 번 연못 주변을 산책했었지만 산등성이에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곳에 불탑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긴 그 동안의 산책은 늘 자광 대사와 함께였다.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이야기에 팔리다 보면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별로 없었다. 달마는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산등성이를 향해 올라갔다. 가까이서 본 구층탑의 규모는 엄청났다. 안에서 예불을 볼 수 있을 만큼 큰 규모였다. 구층까지 층계가 놓여 있고 층마다 불상이 조성되어 있었다. 탑 앞에 서자 달마는 솟구쳐 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서둘러 탑의 계단을 밟았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단숨에 구층까지 올라갔다. 난간을 잡고 밖을 내다보았다. 구름과 안개가 산 아래에 깔려 있고 멀리 낙양성 전체가 한 눈에 들어왔다. 구층탑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선경(仙境)인 듯 느껴졌다. 구층탑 안팎의 조각은 거의 신기(神技)의 조화인 듯했다. 달마의 입에선 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불가시의한 일이로다!”
순간 그의 마음 속엔 이 곳에 오래 머물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게 일었다. 이전에도 자광 대사의 지극 정성에 끌려 때때로 정착하려는 마음이 생기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이렇게 절절한 감정은 아니었다. 이제 구층탑을 내려가면 자광 대사를 만나 결심을 밝혀야 겠다고 생각했다. 탑을 내려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멀리 낙양성을 바라보았다. 가슴이 탁 터지듯 후련했다. 그런데 낙양성 너머 멀리 천축이 아른거리더니 문득 스승 반야다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달마는 자신도 모르게 합장의 예를 갖췄다. “일하가련쌍상마(日下可憐雙象馬)”라고 읊조리던 스승의 게송이 귓가에 맴돌았다.

달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게송에서 말한 일하(日下)란 무슨 뜻일까? 해가 떨어진다는 뜻의 낙(洛=落)양(陽)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가련(可憐)한 쌍상마(雙象馬)는 바로 이 곳에 머물기로 마음먹은 자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달마는 반야다라 존자가 읊은 게송의 끝 구절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주눈계구창창(二株嫩桂久昌昌).” 즉 ‘두 그루(二株)의 계수나무 피어 있는 곳(嫩桂) 오래도록 창성하리라(久昌昌)’고 하지 않으셨던가. 그렇다면 법연의 땅은 계수나무가 두 그루 우뚝 솟아 있는 곳이 아닐까?달마는 얼핏 자광 대사가 지나가는 말로 들려 준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숭산(崇山)이 있는데 그 곳에는 계수나무도 있고 숲이 우거져 경치가 수려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달마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숭산으로 내달았다. 달마 자신이 생각해도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달마는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심장의 박동은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다. 흥분으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달마는 천천히 구층탑에서 걸어 내려왔다. 올라갈 때와는 발걸음이 사뭇 달랐다. 그는 이것저것 여러 생각에 잠겼다. 이런 식으로 자광 대사와 헤어지고 영령사를 떠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벌써 날개를 달고 숭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달마가 막 탑 밖으로 나올 무렵 자광 대사는 부지런히 탑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달마를 보자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즉시 앞으로 달려가 달마를 부축하며 말했다.

“조사께서는 큰 병에서 막 일어나신 몸이 아니십니까. 불체(佛體)를 보중하셔야 하십니다.”달마는 머리를 끄덕일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눈가엔 눈물이 핑 돌았다. 다행히도 안개가 자욱해서 자광 대사는 그런 달마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광 대사는 달마의 손을 공손히 받들고 천천히 본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광 대사는 순간 무엇인가 이상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 전과는 달리 잡고 있는 달마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밤새 말이 없었다.
자광 대사는 이른 새벽에 눈을 떴다. 대야로 퍼붓는 듯하는 폭우소리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자광 대사는 온몸에 썰렁함을 느꼈다. 늘 하던 대로 옆에서 자고 있는 달마 대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누워 있어야 할 달마 조사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먼저 일어나 참선에 들어갔나 싶어 벌떡 자리를 박찼다. 그러나 방안 어디에도 달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자광 대사는 당혹스런 느낌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이 새벽에 조사께서는 무엇 때문에 밖으로 나가셨을까? 자광 대사는 급한 마음을 누르면서 살며시 방문을 열었다. 자칫 달마 조사에게 결례가 될까봐 발소리를 죽이며 문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달마 조사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자광 대사는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어둠 속에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이 곳 저 곳 살폈다. 머리에 피가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그만치 당혹과 충격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조사님, 조사님! 어디 계십니까!”
아무리 불러 보아도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메아리조차 빗소리에 파묻히는 듯싶었다. 자광 대사는 빗속으로 뛰쳐나갔다. 사방을 살피면서 절 문 쪽으로 치달았다. 닫혀 있어야 할 절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자광 대사는 밖을 살폈다. 그의 입에선 절로 신음 섞인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눈앞에 달마의 발자국이 보였기 때문이다. 뚜벅뚜벅 나 있는 발자국엔 빗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자광 대사는 발자국 방향을 바라보며 합장했다.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는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했다. 자광 대사의 가슴엔 구멍이라도 난 듯 스산한 새벽바람이 스며들었다.

달마는 자광 대사와 함께 잠자리에 들었지만 자는 체했을 뿐 깨어 있었다. 그는 몰래 영령사를 빠져 나갈 심산이었다. 번거롭게 할 것도 없고, 오고 가는 것을 알릴 까닭도 없었다. 다만 자광 대사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알리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더욱 크게 줄 것이 뻔했다. 달마는 빗속을 뚫고 빠른 걸음으로 절을 벗어났다. 달마는 숭산이 정확히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짐작으로 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직관에 바탕을 둔 그의 짐작이나 느낌은 거의 어김이 없었다. 마음 가는 대로 발을 옮기면 그 곳이 곧 목적지였다. 숭산으로 가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수십 일이 걸려서야 숭산의 소실산(小室山)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등봉현(登封縣) 북쪽에 있는 숭산은 동쪽으로는 태실산(太室山), 가운데 준극산(峻極山), 서쪽의 소실산(小室山) 등 세 개의 산이 모여 있는 명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