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경봉 스님-우암 선생 영찬(影讚)해설

通達無我法者 2008. 9. 26. 09:19

 

 

거울 속 연꽃 무애를 보이다
 
 
사진/(상)우암 송시열 선생, (하)경봉스님

선비들은 한 여름에 너무 더우면 경서(經書)를 읽지 않습니다. 경서는 집중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날씨가 더우니까 경봉스님 影讚, 우암송시열선생 影讚 등을 먼저 소개하면서 더위를 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1. 鏡峰禪師眞影
一朶芙蓉影落鏡峰 芙鏡無碍 祗是恁마回光照處
한 줄기 연꽃의 그림자를 거울에 떨어뜨리니 연꽃과 거울이 서로 걸림 없도다.
다만 그렇게 진리의 광명을 되돌려 비추어 줄 뿐.
天玄地黃誰知如此 更來明日夜看燭舞
하늘은 검고 땅은 누런 이 도리를 누가 알겠는가?
아는 사람 내일 오면 밤에 촛불 켜고 춤을 추리라.

〈보충설명1〉 경봉스님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더러움을 한 터럭만큼도 허용하지 않는 연꽃과, 맑고 투명한 거울은 서로 분리된 사물이지만 거울에 떨어지면 연꽃의 영상이 거울과 하나를 이루어 서로 걸림 없이 잘 어울립니다. 거울은 잘난 모습은 비춰주고 못난 모습은 비춰주지 않는다는 생각 없이 모든 것을 여실하게 비춰줍니다. 만물을 공평하게 비추고, 만물과 하나를 이루며 비추어 주는 것은 바로 인아상(人我相)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충설명2〉 회광조처란 자신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진리의 광명을 자신에게 되돌려서 둘이 아닌 모습으로 비추이는 곳이란 뜻입니다.
〈보충설명3〉 천현지황의 진리를 아는 사람이 온다면 밤새도록 禪悅의 즐거움을 나누고 공감하면서 춤추고 놀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것은 妙有를 말합니다.

2. 尤菴先生眞影
이조 500년은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정치하려고 노력했던 시절입니다. 그 중에서도 대학(大學)의 3강령(綱領) 8조목(條目)을 특히 더 많이 실현시키려 애썼습니다. 우암송시열선생은 대표적인 유학자에 속했는데 자존심 강한 중국 사람들도 송자(宋子)라고 칭송했습니다. 제가 소개하려는 글은 우암 스스로 자신의 진영에 찬(讚)한 글인데 경봉스님과는 아주 대조적인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기껏해야 사슴무리 노니는 곳에 오두막이나 지으며 살고, 헛된 공부하여 책벌레 밖에 되지 않았다고 자신을 폄하하고 있습니다.

미鹿之群 蓬된之廬 窓明人靜 忍飢看書
크고 작은 사슴무리 가운데 쑥대로 얽은 초막에서
창 밝고 인적이 고요하면 굶주림을 참고 책만 보누나.
爾形枯구 爾學空疎 帝衷爾負 聖言爾侮
네 모습은 마르고 파리하며, 네 학문은 쓸모 없고 삶과도 멀어서
상제의 마음도 너는 저버리고 성인의 말씀도 너는 모독했으니,
宜爾置之 두魚之俉
마땅히 네가 있을 곳은 책벌레 무리의 가운데로다.
우암선생이 말년에 괴산의 화양동에 있으면서 지은 시입니다.

3.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청산도 자연 그대로, 녹수도 자연 그대로.
산은 산대로 물은 물대로, 산수간에 나도 또한 자연그대로.

4. 赴京詩(서울에 나아간다)
綠水喧如怒 靑山默似嚬 靜觀山水意 嫌我向風塵
녹수의 아우성은 가지 말라 성내는 듯, 청산은 말 안 해도 찡그린 듯,
산수의 뜻을 가만히 살펴보니 풍진을 향한 나를 싫어함이로다.

〈보충설명〉 세자 책봉의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효종이 화양동에 있는 여든 둘 노구의 우암선생을 불러 들였을 때 서울로 가며 지은 부경시입니다. 우암은 그 후 사약을 받아 화양동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죽음을 예감했을 것 같은 분위기의 열반시입니다.

금강경 오가해 계속
豫章沙門宗鏡提頌綱要序
예장사의 사문 종경이 강령(綱領)을 제시하고 요점(要點)을 송(頌)으로 지어 정리한 것에 대한 서문입니다.

觀夫空如來藏 碎祖師關 獨露眞常 無非般若
관찰컨대, 저 여래장(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지니고 있는 것)을 공으로 파악하고 조사의 관문도 부셔서 홀로 진상(眞常)을 드러냄이 반야 아닌 것이 없으니
〈보충〉 반야는 닿는 곳마다 공으로 파악하여 부처와 조사도 텅 빈 모습으로 봅니다. 그러려면 제가 늘 강조하듯이 자신을 부정하여 사물과 한 모습이 되어야 하고, 나아가 그 한 모습이란 생각마저도 버려야 합니다.

설의) 如來藏 有空如來藏 有不空如來藏 空如來藏 所證眞理也 不空如來藏 能證眞智也
여래장에는 공여래장이 있으며, 불공여래장이 있으니, 공여래장은 증득할 바의 진리요 불공여래장은 능히 증득하는 진지(眞智)이다.
〈보충〉 공여래장은 우리가 공부하면서 깨달아야할 진리 그 자체(能)를 말하고, 불공여래장은 보살이 육바라밀을 통해서 깨달아 가는 것(所)입니다.

설의) 眞理 謂之空如來藏者 眞理絶相 如彼太虛 廓無纖翳故也 眞智 謂之不空如來藏者 眞智照理 如彼赫日 當空顯現故也 皆謂之藏者 藏之爲物 中虛且實 中虛故 可比於空也 且實故 可以比於不空也 今所謂空如來藏者 蓋異於空不空之空藏也 以碎祖師關 爲對故也
진리를 공여래장이라고 말함은, 진리가 모든 상을 끊어서 마치 저 태허공이 확연히 툭 트여 조금도 걸림이 없는 것과 같은 까닭이다. 진지를 불공여래장이라고 말함은, 진지가 이치를 비추는게 마치 저 붉은 해가 허공에 떠서 만물을 드러내게 하는 것과 같은 까닭이다. 두 가지 모두에 장(藏)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장(藏)의 속성이, 복판이 텅 비워졌지만 동시에 또한 차여져 있기 때문이니, 복판이 비워져 있어서 공에 비유되고 동시에 또한 채울 수 있어서 불공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공여래장은 공과 불공의 공장(空藏)으로서의 의미가 아니고 ‘쇄조사관’이라는 문장과 대구를 이루는 것이다.
〈보충〉 마지막 문장에서의 공은, 공여래장과 불공여래장의 공과 불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空如來藏 碎祖師關의 문장에서 碎의 對句로서 空이 동사로 쓰인 것입니다.

설의) 物所畜而封不露曰藏 八識之藏 隱覆自性如來 故名如來藏 關者 以不通去來 爲義 祖師眞機 聖解難通 凡情莫透 故名爲關 不妄曰眞 不變曰常 眞常者 生佛平等之大本也 空彼如來藏 碎彼祖師關 令眞常獨露 無非般若之功也
물건을 쌓고 봉해서 드러내지 않음이 장(藏)이니 팔식(八識: 모든 법이 생겨나는 근본식)의 장이 자성여래를 숨기고 덮고 있기 때문에 여래장이라 이름 붙였다. 관(關)이란 것은 잘 통해서 오가는 것이 없다는 뜻이니, 조사의 속 살림(眞機)은 성스러운 지혜로도 통하기 어렵고 범인(凡人)의 정량으로도 뚫기가 어렵기 때문에 관이라 이름 붙였다. 망령됨이 사라진 것을 진(眞)이라 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상(常)이라 하니, 진상이란 중생과 부처의 평등한 큰 근본을 말함이다. 저 여래장도 공으로 파악하고 조사의 관문도 부셔서 진상독로케 하는 것이 반야의 공덕 아님이 없다.

三心 不動 六喩全彰 七寶 校功 四句倍勝 若 循行數墨 轉益見知 宗眼 不明 非爲究竟
삼심(업상, 전상, 현상)이 움직이지 않으면 여섯 비유가 온전히 빛나는지라, 칠보로 공을 비교해 보건대 사구(四句)가 배로 수승할 것이나, 만약 이에 (금강경을 읽으면서) 글줄이나 찾고 먹물 수나 헤아린다면 견문각지(見聞覺知)만 더 굴릴 뿐이라서 종지(宗旨)의 눈이 밝지 못해 구경이 되지 못한다.
설의) 三心者 第八根本心 第七依本心 前六起事心 是 一眞 獨露 三心 不動 三心 不動 六喩斯彰 六喩者 識心 不動 業障 自除 靑色 可以爲喩也 靑色 能除灾厄故也 識心 不動 無漏功德 自然具足 黃色 可以爲喩也 黃色 隨人所須故也 識心 不動 無生智火 生焉 赤色 可以爲喩也 赤色 對日出火故也 識心 不動 疑獨 自淸 白色 可以爲喩也 白色 能淸濁水故也 識心 不動 恒住眞空 空色 可以爲喩也 空色 令人 空中行坐故也 識心 不動 三毒 自消 碧色 可以爲喩也 碧色 能消諸毒故也
삼심은 제팔 근본심과, 제칠 의본심과, 제육 기사심이니, 하나의 진상이 홀로 드러나면 삼심이 움직이지 않고, 삼심이 움직이지 않으면 여섯 비유가 절로 온전히 빛나게 되는 것이다. 여섯 비유에 관해 말하자면, 식심이 움직이지 않을 때, 1) 업장도 저절로 제거되어 청색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청색은 모든 재액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심이 움직이지 않을 때, 2) 무루공덕이 자연히 구족되어 황색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황색은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성취시켜주기 때문이다. 식심이 움직이지 않을 때, 3) 생멸이 없는 지혜의 불이 생겨서 적색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적색은 해를 마주하여 불이 나오기 때문이다. 식심이 움직이지 않을 때, 4) 의심과 탁한 생각이 저절로 깨끗해져서 백색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백색은 탁한 물을 깨끗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식심이 움직이지 않을 때, 5) 항상 진공(眞空)에 머무르는지라 공색(空色)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공색은 사람으로 하여금 허공 가운데에서 다니기도 하고 앉게도 하기 때문이다. 식심이 움직이지 않을 때, 6) 탐진치(貪嗔痴) 삼독이 저절로 소멸되어 벽색(碧色)으로 비유할 수 있는데, 벽색은 모든 독을 소멸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보충〉 의본심은 제7 말나식입니다. 제8 아뢰야식을 끊임없이 자아라고 오인하여 집착하고, 제8식과 제6식 사이의 매개자가 되어 제6식이 일어나게 합니다. 아뢰야식에 저장된 種子를 이끌어 내어 인식이 성립되게 하며, 생각과 생각을 끊임없이 이어지게 합니다. 제6 기사심은 감각기관 등의 육근이 대상을 마주쳐서 움직이게 되는 마음입니다.

설의) 功用之所以至於如此者 只緣持無相經 悟無我理 行無我行故也 雖布施七寶之功 不若受持四句之爲愈也 布施七寶 所以爲劣者 七寶 人間世之所重也 布施 但感有漏之果 終未免於輪廻 故 劣也 受持四句 所以爲勝者 四句 超凡悟道之具也 受持 超生脫死 以至究竟 故 勝也 優劣 且置 只如四句 如何受持 便得超生脫死 言言 冥合本宗 句句 廻就自己 其或未然 增長我人知見 終無解脫之期
(식심을 없애는) 공용이 이와 같은 데에 이르는 것은, 다만 무상의 경전을 가지며, 무아의 이치를 깨달으며, 무아의 실천을 행하는 것을 반연하는 까닭이니, 비록 칠보를 보시한 공덕이 아무리 커도 금강경의 사구(四句)를 수지하는 것보다 못하다. 칠보를 보시하는 것이 사구수지보다 못한 것은, 칠보가 인간 세상에서나 소중히 여겨지는 것이라 보시하더라도 유루(有漏)의 결과만 감득할 뿐이어서 끝내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구를 수지하는 것이 수승한 것은, 사구가 범부를 초월하여 도를 깨닫는 도구라서 수지하면 생사를 초탈하여 구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우열(優劣)은 차치하고, 사구를 어떻게 수지하여 생사를 초탈할까? 말씀을 새길 때에는 그윽히 근본 종지에 계합시키고, 구절을 익힐 때에는 자기의 진여에 돌이켜 나아가면 되나니, 혹 그렇지 않으면 아상과 인상의 견문각지만 증장시켜 마침내 해탈을 기약할 수 없을 것이다. 〈계속〉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