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中 여산폭포 관련 선시(禪詩) 해설

通達無我法者 2008. 9. 26. 09:26

 

 

계곡 물을 따라서 내려가라
 
실오라기 같은 길을 통해 몸을 낮추니

어진 말은 채찍만 보고 천리를 가네



중국의 일급 명승지인 여산폭포로 안내도하고 서산스님 친견도 거들겠습니다. 중국에는 여산폭포를 읊은 시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에 이백의 시가 우리의 관심을 가장 많이 모읍니다. 이백의 여산폭포는, 폭포와 동화된 이백을 느낄 수 있으며 읽을수록 청량감과 생동감이 살아납니다. 소동파도 여산폭포에 관한 한, 李白의 詩 이상은 나올 수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이 자리에 여산폭포를 불러들이면 곧 바로 여산의 폭포가 여기에 존재하고 나의 것이 되는 것이니 그 청량감과 생동감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1. 廬山瀑布 (李白)

日照香爐生紫烟 遙看瀑布掛長川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

아침 햇살이 향로봉에 비추어 자금광 물보라가 피어오르고,
멀리 바라보니 긴 냇물이 걸려있는 듯 하네.
나르며 흘러내림이 삼천척이니,
은하수가 아득히 높은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것인가.

〈보충설명1〉 구천에서 내려와 수직으로 꽂힌 폭포를 바라보며 이백은 그 아름다움은 물론 하늘과 땅의 通情이나 교감, 음양의 조화 등을 함께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동을 三千尺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얼핏 생각할 때 폭포의 길이를 삼천척이라고 했으니 너무 과장했다고 여기겠지만 이백에게는 이 감탄도 오히려 모자랄지 모릅니다. 고려시대 때 우리나라의 유명한 시인 정지상(鄭知常)도 ‘送人’이라는 七言絶句, 轉句와 結句에서 ‘이별하는 사람의 눈물이 흐르고 흘러서 강물이 늘어나고 늘어날텐데 언제나 대동강물이 다하여 마를까?’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淚年年添綠波)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은 우리에게는 과장인 듯 여겨질 수 있어도 詩人에게는 그 만큼의 감동이 있는 것이니 우리도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읽어야 합니다.

〈보충설명2〉 紫烟의 자(紫)색은 숭고하고 위엄 있고 신비스럽다는 의미를 함축한 색입니다. 우리의 불국사도 청운교, 백운교를 지나 대웅전에 오르려면 자하문(紫霞門)을 지나야 합니다. 이 것은 佛國의 도량을 청정하게 가꾸면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를 視覺的으로 널리 펼쳐놓았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하문에 들어서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다듬고, 흩어짐 없도록 예의 주시해야 합니다.

2. 淸虛歌 (西山大師)

君抱琴兮 倚長松 長松兮 不改心
我長歌兮 坐綠水 綠水兮 淸虛心
心兮心兮 君與我

그대, 거문고를 안고 옴이여! 큰 소나무에 기대리로다.
큰 소나무여! 마음이 변치 않는도다.
나, 긴 노래 부름이여! 녹수에 앉으리로다.
푸른 물이여! 청정하고 텅 빈 마음이도다.
不改心이여, 淸虛心이여! 그대 마음 곧 내 마음이로다.

〈보충〉 무더위를 잊게 하는 청정하고 시원한 느낌의 글입니다. ‘兮’ 라는 어조사를 넣어 노래한 詩라서 淸虛 가운데에서도 율동이 살아납니다. 서산스님의 號, 청허(淸虛)는 아뢰야식까지도 모두 떨어져 나가서 무궁한 자유로움이 배어있는 모습입니다. 구만리 長天이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깊은 물이 고요하여 밑바닥까지 환하게 들여다보이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 청허의 마음으로 거문고를 튕기면 그 소리가 빈 공간에서 우러나는 소리이니 곧 금강경의 진공묘유의 소리입니다. 또, 소나무는 계절이 바뀌어도 푸르름이 퇴색하지 않으니 항상 변하지 않는 진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3. (大梅禪師)

회殘枯木倚寒林 幾度逢春不變心
樵客遇之猶不顧 郢人那得苦追尋

꺾이고 말라빠진 나무가 차가운 숲을 의지한 이래
얼마나 많은 봄을 맞았는데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는가?
나무꾼도 스쳐 지나가며 돌아보지 않건만
영인이 어찌 괴롭게 나를 찾아다니는가?

〈보충설명1〉 이 것은 마조도일선사의 법을 이은 대매법상선사가 보림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지은 詩입니다. 산 속에 묻혀 지내는 대매선사 자신을 쓸모 없고 초라한 고목에 비유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곧 부처라는 생각만은 완전히 소화되어서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은근히 알려주고 있는 내용의 詩입니다.
우리는 수행의 결과에 대해 매우 관심이 큽니다. 그러나 대매선사의 이 시는 수행의 결과보다 한결같이 닦아 가는 수행의 과정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대해 우리를 깨우쳐 줍니다.

〈참고〉 이 시는 대매선사와 마조선사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일화에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날, 마조에게 젊은 대매가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조가 대답했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니라.(卽心是佛)” 이 대답에 대매가 바로 깨치고 깊은 산에서 은둔하며 수행에 정진했습니다.

마조에게는 鹽官이라는 또 다른 제자가 있었는데 대매와는 사형사제의 관계입니다. 그 염관의 제자 한 명이 산에 들어갔다가 한 수행자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염관의 제자가 그 수행자에게 물었습니다. “이 산중에 들어 온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수행자가 대답했습니다. “봄에 꽃피고 가을에 낙엽지는 것 밖에 못 봤다.” (이 대답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진리의 리듬에 맞추어 지냈다는 뜻입니다.) 염관의 제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이 산에서 나가려면 어떻게 나가야합니까?” 수행자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계곡 물을 따라서 내려가라.” (이 대답은, 작은 물줄기가 큰 바다로 흘러가듯이 어느 길이든 그 길을 따라가면 큰길을 만나게 되어 있다. 즉, 어떤 수행방편이든지 그것을 한결같이 지키면 大道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산을 내려 온 염관의 제자가 그의 스승인 염관에게 수행자를 만났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염관은 즉시 강서에 있을 때의 대매일 것으로 짐작하고 제자에게 한 번 더 산에 올라가서 그 수행자를 모셔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대매는 이 제안에 대해 거절하는 시를 쓰고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 거절의 意思를 표시한 答詩가 바로 여기서 소개한 시입니다.

마조는 이 소식을 듣고 뒷날에 대매를 시험하기 위해 시자를 보냈습니다. 마조의 시자가 대매에게 물었습니다. “스님은 마조선사에게 무엇을 배웠길래 이 깊은 산중에 들어와 사시는지요?” 대매가 응답했습니다. “마조께서는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씀하셨소. 그래서 산중에 들어와 살고있는 것이라오.” 마조의 시자가 다시 말했습니다. “마조선사의 요즘 가르침은 다릅니다.” 대매가 또 물었습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시자가 말했습니다. “예, 요즘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 대매는 관심없다는 듯 “그 노장이 뭐라고 말하든 나는 마음이 곧 부처인게요.” 하고 말했습니다. 시자가 마조에게 돌아와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조가 흐뭇하게 웃으며 “매실이 익었구먼” 했습니다.

〈보충설명2〉 초나라의 郢땅에는 나무를 깎아 목제품을 만드는 匠人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영인은 곧 匠人을 의미하며 또 염관선사를 비유한 것이기도 합니다. 대매는 ‘목공의 匠人 염관선사께서는 나무꾼도 관심조차 없는 보잘 것 없는 나무 대매를 찾지 마십시오.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은유로 보림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4. 艶情禪詩(簡翁)

郎心葉薄妾氷淸 郎說黃金妾不應
假使偶然通一笑 半生誰信守孤燈

낭군의 마음은 잎사귀처럼 엷고 첩의 마음은 얼음같이 차갑고 청정하네.
낭군은 황금으로 달래보지만 첩은 꿈쩍도 하지 않네.
우연히 한 웃음이라도 통했더라면
반평생 외로운 등불 지킨 것을 누가 믿어 주리오.

〈보충설명〉 대매선사의 일화와 시를 두고 후대(唐)에 간옹선사가 지은 禪詩입니다. 여기서의 낭군은 스승인 마조선사를, 첩은 대매를 말합니다. 만일 스승의 非心非佛 법문에 대하여 대매가 응수하며 웃음이라도 지었다면, 卽心是佛이라는 등불을 한결같이 지키며 수행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종경스님 제강 계속

嗚呼 微宣奧旨 石火電光 密顯眞機 銀山鐵壁 瞥生異見 滯在中途 進步無門 退身迷路 聊通一線 俯爲初機 良馬 見鞭 追風千里矣
오호라! 미묘하게 선설(宣說)하신 깊은 뜻이여! 돌이 부딪쳤을 때 번쩍이는 불꽃이요, 번개 칠 때 번쩍이는 빛이라. 비밀스럽게 진기(부처님의 속마음. 부처님의 진리)를 나타내심이여! 은으로 된 산이요, 철로 만든 장벽이라. 별달리, 다른 소견을 내면 중간 길에 막혀있어 나아가려 해도 문이 없고 물러 나려해도 길을 잃기 때문에, 애오라지 하나의 실오라기 같은 길을 통해서 몸을 낮춰 처음 공부하는 사람을 위하니, 어진 말은 채찍만 보고도 바람을 좇아 천리를 가도다.

〈보충설명1〉 부처님의 속 살림이 비밀스럽다 함은 오로지 범부의 입장에서 그런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의 分上에서는 비밀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한 중생의 근기로 진리를 보려하면 我相을 비롯한 四相에 걸려 은산철벽과 같겠지요.
〈보충설명2〉 부처님의 법을 석화전광이라 한 것은, 진리는 너무 깊고 오묘해서 들을 때는 환희용약(歡喜踊躍)하지만 그 깨달음이 지속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경스님 자신이 전광석화의 소식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제강을 지어 도움을 주려 하는데, 만일 훌륭한 자질의 수행인이라면 제강을 보지 않아도 부처님의 법을 알아서 낚아챈다는 뜻입니다.
〈보충설명3〉 부처님께 어느 날, 한 외도가 찾아 와 ‘有言으로도 묻지 않고 無言으로도 묻지 않사오니 한 말씀 해 주십시오’ 하고 질문했습니다. 질문을 받은 부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셨지요. 그 뜻을 알아차린 외도는 ‘대자대비 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미혹의 구름을 걷고 알아차렸습니다.’ 하고 찬탄하며 떠났습니다. 외도가 떠난 뒤 아난이 부처님께, ‘세존께서는 침묵을 지키셨는데 그 외도는 무엇을 어떻게 알아차린 것입니까?’ 라고 여쭈었습니다. 아난의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훌륭한 말은 채찍만 들어도 그림자를 쫓아 천리를 달려간다.‘ 라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설의) 奧旨 言旨之玄奧難測也 眞機 言機之純而無雜也 眞機 一似銀山鐵壁 堅固難透 高逈莫攀 奧旨 如石火電光 燦然可見 神速難追 況今佛 宣而微宣 顯而密顯 那容擬議於其間哉 若是過量漢 石火電光 一捉便捉 銀山鐵壁 一透便透 其或未然 滯在中途 進退俱失 由是 欲爲後學 開介徑路 遂於三十二分 隨分提綱 隨綱著頌 利根者 把來一看 則一經之奧旨 諸佛之眞機 便見昭昭於心目矣
오지란 뜻이 현묘하고 깊어서 측량하기 어렵다는 것을 말함이요, 진기는 기틀이 순수하고 섞이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진기는 한편으로 은산철벽과 같아서 견고하여 뚫을 수 없고 높고 멀어서 올라갈 수 없으며, 오지는 석화전광과 같아서 찬연히 볼 수 있으나 신속하여 추정키 어려운데, 하물며 지금 부처님께서 선설하시되 미묘하게 선설하시며 드러내시되 비밀스럽게 드러내시니, 어찌 그 사이에 헤아려 꾀함이 용납되겠는가. 만약 과량인이라면 석화전광을 한번 잡을 때 곧 잡을 것이며, 은산철벽을 한번 뚫을 때 곧 뚫을 것이나, 혹 그렇지 못하면 중간 길에 막혀 있어서 진퇴를 모두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후학을 위해 첩경을 열어 보이려고, 32분(分)의 각각의 분을 따라 강(綱)을 제시하고 강을 따라 송(頌)을 짓노니, 근기가 날카로운 자는 한번 잡아볼 때 곧 금강경의 깊은 뜻과 諸佛의 진기가 문득 심목(心目)에 분명히 나타남을 볼 것이다.

〈보충설명〉 金剛經의 第五分 如理實見分의 凡所有相이 皆是虛妄이니 若見諸相非相이면 卽見如來라는 四句偈에 대해 종경스님은 다음과 같이 頌했습니다. 報化非眞了妄緣이니 法身淸淨廣無邊이라 千江에 有水千江月이요 萬里에 無雲萬里天이로다.(보신도 화신도 참된 것이 아니고 망령된 인연이니, 법신은 청정하고 넓어 끝이 없도다. 千江에 물이 있어 千江에 달이 비치고 萬里에 구름이 없어 萬里가 하늘 뿐이로다.)
〈계속〉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