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종경 스님의 제송강요 - 묵묵히 보리의 대도심에 계합하라

通達無我法者 2008. 9. 28. 18:28

 

 

[宗鏡]昔奇哉之善現 讚希有之慈尊 悲憐濁世衆生 諮決菩提心要 可謂一經正眼 三藏絶詮 千聖 不傳 諸祖 不說 如是降伏 扁舟已過洞庭湖 護念丁寧 何啻白雲千萬里 爲甚麽如此 毗婆尸佛 早留心 直至而今不得妙

예전에 기특한 수보리가 희유하신 자존(→자비로운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오탁악세의 중생을 가엾이 여기고 보리의 心要(→심장과 같은 요체)를 물어 해답을 이끌어내니, 可히 一經(→금강경)의 正眼이며 三藏(→경,율,론) 가운데서도 절대적인 말씀이라 할 것이다. 모든 성인들도 傳할 수 없고 많은 조사들도 說할 수 없는 것을 ‘如是降伏(이와 같이 항복 받는다)’으로 답해 주시니 이는 마치 조각배가 동정호를 지나쳐버린 것과 같다. 또, ‘護念丁寧(보살들을 잘 두호한다는 것을 정성스럽게 재삼 물은 것)’에 관해서도 어찌 다못 흰 구름이 천만리 만 멀어졌다고 말할 뿐이겠는가?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비바시불(→過去 七佛의 第一佛)도 일찍이 발심에 머물러 지금에 이르렀으나 아직도 묘한 진리를 얻지 못했다.

<보충설명>
1. 이 문장은 종경스님이 선현기청분의 요점을 다시 풀어서 頌한 제송강요입니다. 이런 문장들을 선에서는 扌占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금강경 야보송과 종경스님의 고일착은 염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종조의 가르침에 대한 왈가왈부가 금기사항인 것이 불문율이지만 불교의 선가에서는 염롱을 통해 진리의 깨달음을 고무시켜 줍니다. 즉, 부처님과 조사의 말 밖의 소식에 특색을 부여함으로써 밝은 눈이 빨리 열리도록 채찍을 가하는 것입니다. 또, 현실수용이 청정하게 굴러가도록 방망이질 하는 것입니다.
2. 奇哉之善現: 수보리존자가 언어도단인 진리의 세계를 알아차리고 ‘희유--'라 하였기 때문에 기특하다는 형용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3. 扁舟已過洞庭湖: 배를 타려면 적재적소에서 때 맞춰 타야합니다. 그런데 이미 배가 지나쳐 버리면 다시 배를 돌려 탈 수 없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본원의 마음을 ‘여시항복’이라고 재단해 버린 것은, 배가 이미 지나가 버린 것과 똑같은 형국입니다.
4. 護念丁寧 何啻白雲千萬里: 진리에 관해 묻는다는 것은 흰 구름이 천만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진리에서 멀어졌다는 뜻입니다.

[說]善現之所以奇哉者 以其不待聲敎而信無疑也 慈尊之所以希有者 以其不現聲敎而開覺人天也 無言演化 爲上根上智 卽得 中下之機 如盲處日 不知玄化 所在 又末世衆生 尙未遇玄化 爲二障之所礙 昧菩提之知見 須假語言方便 開示菩提心要 以故 空生 爲之諮決 只此菩提心要 可謂一經正眼 三藏絶詮 千聖 不傳 諸祖不說 如是降伏 護念丁寧 謂之如標月指 卽得 謂之一經正眼 扁舟已過洞庭湖 何啻白雲千萬里 爲甚如此 多劫留心尙茫然
선현(수보리)에게 기특하다고 칭찬하는 까닭은, 부처님께서 육성으로 가르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요, 慈尊(부처님)께 희유하다 말씀 올린 이유는 음성을 빌려 가르치지 않고도 人天에게 깨달음을 열어 보였기 때문이다. 無言의 연설과 교화를 상근기의 사람들은 곧 알아차릴 것이나 중하의 근기는 마치 장님이 해를 보는 것처럼 현묘한 교화의 소재를 알지 못한다. 또 말세 중생은 아직 현묘한 교화를 만나지 못하고 二障에 걸려서 보리의 지견이 어둡게 덮였으니, 모름지기 말씀이라는 방편을 빌려서 보리의 心要(핵심적 요체/요긴한 법문)를 열어 보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수보리가 중생을 위해 부처님께 묻긴 했지만, 보리의 心要는 가히 一經(금강경)의 正眼(똑바른 눈)이며 三藏의 절묘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성인이 전하지 못하고 많은 조사도 說할 수 없기 때문에, 여시항복(如是降伏)과 호념정녕(護念丁寧)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얻을 뿐인데 그것을 일러 금강경의 정안(正眼)이라 한다면 조각배가 이미 동정호를 지나간 것이니 어찌 흰 구름이 천만리만 떨어져 있다 하겠는가?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다겁(多劫)동안 발심에 머물러도 오히려 아득하다.

<보충설명1> 多劫留心尙茫然: 오랜 동안 발심해서 선정에 머물렀다 하더라도 부처님과 자신을 나누고, 능소를 가르면 한 모습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文句는 비바시불 당시의 수행자에 관한 고사를 인용한 것입니다. 당태종이 토목공사를 하려고 땅을 파헤칠 때, 머리는 제멋대로 흩어져있고 수염과 손톱이 길게 자라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사람이 땅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당태종이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는 비바시불 당시의 수행자라고 대답했습니다. 당태종은 오랜 수행자에 대한 대접으로 그를 목욕시키고 아름다운 여인을 곁에 두게 하면서 절도 지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수행자는 여인에 대해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당태종은 비바시불 당시의 발심자가 어찌 여인의 모습에 동요가 생기느냐고 절을 태웠습니다. 이 고사를 인용한 윗 文句는 진리가 얻으려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를 철저하게 비우고, ‘비워진 나’마저도 비우는 二重否定을 통해 대긍정의 본원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빗방울 한 방울이 태평양에 떨어지면 한 방울의 빗방울이 태평양 전체가 되듯, 마음을 텅 비운 내가 삼천대천세계와 하나가 되는 이치인 것입니다.
<보충설명2> 二障: 번뇌장과 소지장을 말함.
번뇌장→ 번뇌라고 하는 깨달음에의 장애. 번뇌가 법신을 덮고 있는 것.
소지장→ 번뇌의 밑바닥에 잠겨 있으면서 智에 방해가 되는 오염되지 않은 無智.
이것을 멸했을 때 보리가 얻어짐.

問處孤高答處深 妙圓眞淨不須尋 瞥然如是知端的 黙契菩提大道心
묻는 곳도 홀로 우뚝하고 답하는 곳도 깊어서, 묘하고 원만하고 참되고 청정한 자리는 찾을 수가 없도다. 언뜻 이와 같이 뚜렷하고 밝은 자리를 깨달으면 묵묵히 보리의 大道心에 계합하리라.

[說]一問一答 妙理所在 妙圓眞淨 不須別處尋覓 寒山指頭 月團團 多少傍觀 眼如盲 但向指頭開活眼 滿目寒光 無處藏
한번 묻고 한번 답함에 묘한 이치가 들어 있으니, 묘하고 원만하고 참되고 청정한 것을 모름지기 다른 곳에서 찾지 말지어다. 한산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의 달은 둥글고도 둥근데, 눈 먼 방관자가 얼마나 많은가? 단지 손가락 끝을 향해 活眼(살아있는 눈)을 활짝 열면 눈에 가득 찬 차가운 빛을 감출 곳이 없으리라.

<보충설명>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 합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쳐다본다면 이는 눈이 먼 것과 다름없습니다. 손가락은 단지 달을 보기 위한 수단인데 거기에 떨어져서 깨달음이라는 목적을 잃으면 안되겠지요.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