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剛經五家解·덕민스님

구경무아분/7/상 없는 청정무아라야 보살 자격 있느니라

通達無我法者 2008. 10. 8. 16:56

 

 

<사진설명>경주 불국사 경내 전경.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名爲菩薩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수보리여! 보살이 만약 ‘내가 마땅히 무량한 중생을 제도했노라’와 같이 말한다면, 곧 보살의 이름을 붙일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여! 실제의 이치에는 보살이라고 이름 붙일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니라. 이런 까닭으로, 부처가 설한 일체법은 我 · 人 · 衆生 · 壽者相이라는 것도 없느니라.”

 

〈보충설명1〉 구경무아분은, 보살이 ‘나는 바라밀을 행한다’, ‘내가 무량중생을 제도한다’,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 등을 비롯한 모든 상(相)을 철저히 제거하여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는 청정무아의 상태여야만 비로소 보살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한결같이 진행됩니다.

 

〈보충설명2〉 ‘즉불명보살(卽不名菩薩)’은 ‘보살의 이름답지 않다’ 즉 보살도를 행하는 진정한 의미의 보살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뜻.

 

〈보충설명3〉 ‘실무유법명위보살(實無有法名爲菩薩)’은, 진리의 차원에서는 보살이라는 相을 내어 이름을 붙일 어떤 법도 존재하지 않는 다는 뜻.

 

〈보충설명4〉 ‘무아인중생수자(無我人衆生壽者)’는 나도 없고, 남도 없고, 공간에 얽매여 사는 중생도 없고, 시간에 머물러 장애를 받는 중생도 없다는 뜻.

 

[六祖]菩薩 若言因我說法 除得彼人煩惱 卽是法我 若言我能度得衆生 卽有我所 雖度脫衆生 心有能所 我人不除 不得名爲菩薩 熾然說種種方便 化度衆生 心無能所 卽是菩薩也
보살이 만일 ‘나의 설법으로 인해 저 사람의 번뇌가 없어졌다’라고 말하면 곧 ‘법의 아만(法我)’에 빠진 것이요, 만일 ‘내가 능히 중생을 제도 했다’라고 말한다면 곧 ‘내 것(我所)’이라는 집착이 있는 것이니, 비록 중생을 제도해 마쳤다고 하나 마음에 능소(能所)가 남아있어 아상과 인상을 제거하지 못하면 보살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치연히 갖가지 방편으로 설하여 중생을 교화하되 마음에 능소가 없으면 곧 보살인 것이다.

 

[冶父]喚牛卽牛 呼馬卽馬
소라고 부르면 곧 소요, 말이라 부르면 곧 말이로다.

 

〈보충설명〉 부처님께서 無我無人~ 등 무(無)자 일변도로 ‘없다’는 것을 강조하여 진리(법신의 경계)를 말씀하시니까, ‘우리 눈앞에 펼쳐진 삼라만상의 존재는 무엇이냐’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무아(無我) 등 무(無)만 강조하면 중생이 또 무(無)에만 집착하고 현실의 중요성을 멀리할까봐 염려하는 야보스님다운 고일착입니다. 이런 고일착을 통해 야보스님은 우리로 하여금 유무의 균형을 유지하며 유무를 초월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借婆衫子拜婆門 禮數周旋已十分 竹影掃階塵不動 月穿潭底水無痕
할머니의 두루마기를 빌려 입고 손자가 세배를 올리니, 두루두루 절하는 사이 모두가 만족하도다. 대나무 그림자가 뜨락을 쓸지만 티끌은 움직이지 않고, 달이 연못을 뚫었지만 물에는 흔적이 없도다.

 

〈보충설명1〉 無(무아, 진리, 法身, 眞空, 體)와 有(현상, 바라밀, 用)의 어울림을 표현한 것으로서 많은 음미가 필요한 시(詩)입니다.

 

〈보충설명2〉 땅에 끌리는 할머니의 옷을 손자가 빌려 입고서 모처럼 모인 온 가족에게 두루두루 세배하는 명절의 분위기를 상상해 보십시오. 손자의 걸림 없는 행(行)으로 너와 내가 구별 없는 하나가 되어 온가족이 만족스런 웃음꽃을 피울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고요한 진리에서 경쾌한 한 소리가 울려퍼져 활기가 돋아나는 무(無)와 유(有)의 어울림입니다. 고요하던 무(無)에서 리듬이 울려 청정하게 유(有)가 빚어지지만 무(無)가 자리를 움직이거나 바꾼 것은 아닙니다.

 

〈보충설명3〉 중국의 조동종에서는 ‘무(無)’를 ‘正(體)’으로 ‘有’를 ‘偏(用)’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위에서의 시(詩)를 조동종의 ‘정(正)’과 ‘편(偏)’으로 나누어 본다면, 서울에서나 부산에서나 다 같이 똑같은 정초(正初)는 모습이 끊어진 진리에 해당되므로 ‘정(正)’이며, 예수(禮數)가 가득찬 십분(十分)도 원만구족이므로 ‘정(正)’입니다. 반면, 할머니의 두루마기를 빌려 입고 세배를 올리는 것은 ‘편(偏)’에 해당됩니다.

 

〈보충설명4〉 전구(轉句)에서 정편(正偏)을 나누어 보면, 대나무 그림자가 뜨락을 쓰는 것이 ‘편(偏)’이고, 티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정(正)’입니다.

 

〈보충설명5〉 결구(結句)에서 정편(正偏)을 나누어 보면, 연못은 ‘正(體)’이고, 연못을 뚫고 물에 잠기는 달은 ‘偏(用)’입니다. 그리고 연못이 뚫리지만 흔적이 없는 것은 무아(無我)로서 행하는 보살도의 실천을 뜻합니다.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 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말한다면 보살이라 이름 붙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설하는 것은, (진리의 차원에서) 장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름이 장엄이라고 할 뿐이니라.”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 說名眞是菩薩
“수보리여! 만일 보살이 무아(無我)의 법을 통달한 자라면 여래가 참으로 보살이라고 설하노라.”

 

〈보충설명〉 구경무아분에서 ‘무아’를 강조하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나’라는 인식을 버리면 오히려 진정한 나의 모습이 드러나서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너그럽고도 시비에 말려들지 않음을 끝까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六祖]於諸法相 無所滯 是名通達 不作解法心 是名無我法 無我法者 如來 說名眞是菩薩 隨分行持 亦得名爲菩薩 然 未爲眞菩薩 解行 圓滿 一切能所心 盡 方得名爲眞是菩薩也
모든 법의 상에 막힌 바가 없는 것을 통달이라 하고 법을 안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을 무아의 법이라 하니, 무아의 법이란 여래가 참으로 보살답다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분수에 맞추어 수행하고 수지하는 것을 보살이라 이름 붙이기는 하나 아직 참된 보살이 된 것은 아니니, 바야흐로 지혜와 수행이 원만하여 모든 능소심(能所心)이 사라져야 참된 보살이라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冶父]寒卽普天寒 熱卽普天熱
내가 추우면 온 하늘이 추운 것 같고, 더우면 곧 온 하늘이 더운 것 같도다.

 

〈보충설명〉 부처님이 무아(無我) 일변도의 말씀을 하시니까, 야보스님이 또 춥고 더운 것을 아는 유아(有我)도 소중하다는 말을 붙여주는 것입니다. 〈계속〉

 

출처:법보신문/덕민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