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달마의 불종자론(佛種子論)-2.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通達無我法者 2008. 10. 10. 19:21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달마는 나에게 순금 같은 존재이다. 그가 주장하는 단 두 가지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의 말은 이해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그는 그대 가슴에 가능한 한 깊이 새겨져야 할 존재이다. 그러나 단 두 가지 오류만은 그대가 짚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왜 달마의 동시대인 중에서 아무도 이 두 가지 오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는지 의아스럽다. 달마에게는 카리스마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앞에 오면 입이 저절로 닫혀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힘이 그들을 압도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달마의 어록에 나온 두 가지 틀린 점이 너무나 명확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스쳐 지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달마는 나름대로 궁극의 꽃을 피운 사람이다. 그는 집에 도착한 사람이다. 그는 단지 몇 가지 점에서 빗겨나갔을 뿐, 물론 그는 곧 되돌아왔다. 고대 동양에서는 어떤 사람이 아침에 도에서 빗나갔더라도 저녁이면 되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길을 잃는 적이 없다.

자유로운 사람들조차도 한번쯤 빗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로 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마치 노도처럼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거기엔 어떤 지도도, 안내자도 없다. 그 강은 히말라야에서부터 시작되어 산과 골짜기를 지나 들판을 흘러간다. 그리고 이곳 저곳을 돌아서 결국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거기엔 정해진 과정 같은 것은 없다. 몇 걸음 더 돌아서 갈 수도 있다.

한번 사람이 궁극에 이르게 되면 그는 거의 모든 과정을 잃어버린다. 그는 깨달음을 찾아 나서는 긴 여행을 마쳤다는 기쁨에 모든 어려움을 잊어버린다. 아마 달마도 자신의 두 가지 오류를 볼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 두 가지만 빼고는 그의 모든 말이 절대적으로 진지하고 진실하다. 그것들은 지식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의 순수함에서 그저 흘러나온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전 존재를 그대에게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이 어록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오류를 꼭 경고해야 한다. 먼저 한 가지는 그가 아라한에 대해 계속 편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마음에 관한 말이다. 그는 무심이란 뜻의 말을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그것은 제자의 실수인 것이다. 하지만 그 실수는 그 어록을 대하는 사람에 의해서 고쳐지지 않고 지금까지 내려왔다.

영어에는 마음이란 단어가 하나밖에 없다. '마음(mind)'이란 단어에 대해서 기발한 표현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보통 사람의 마음을 표현할 때에는 소문자로 시작하는 'mind'를 사용하고, 우주적인 마음, 즉 무심(無心)과 같은 의미의 마음을 표현할 때에는 대문자로 시작하는 'Mind'를 썼다. 그대에게 있어서는 마음이 사라질 때 바로 무심이 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주적인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달마의 어록을 완벽하게 바로잡고 싶다. 진리에 대해 말한 이토록 아름다운 어록에 있어서 조그만 티가 남는 것을 나는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록은 말하고 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도(道) 위에 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철학적인 관점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달마는 말하고 있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도를 체험하는 자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것은 나의 신념이 아니다. 나의 교리도 아니다. 그것은 나의 도그마가 아니다. 그것은 절대적인 나의 경험이다. 그래서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누구든지 도를 경험할 수 있다. 그는 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가 올바른 길에 있는 한 말이다.

이 말은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런 경험이 없는 한 그것은 그대가 올바른 길에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때 그대의 강물은 사막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것은 바다로 흘러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는 계속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라한과 중생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이다."

나는 달마의 말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는 나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은 결코 아라한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중생들의 시야를 넘어서는 것임에는 확실하다. 그리고 중생이란 이번 생이 전부이며, 자신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 오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은 단지 추종자이며 흉내내는 사람에 불과하다. 그들은 사회에서 교육을 받고 전통에 물든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식들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길을 모든 가능한 방식들을 통해 찾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처가 오직 한번 태어난 역사적 인물로만 알고 있다.

물론 석가모니 부처와 똑같은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많은 부처들이 있다. 그리고 각각의 부처들은 자신들의 말을 하고 있고, 자신들의 개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의 복제품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경전의 내용에 의해서 고정관념을 갖는다. 그런 관념은 죽은 생각이다. 그대는 경전에서 아름다운 장미를 발견하지만 이미 말라 버린 장미를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성서]에서, [꾸란]에서, [바가바드 기타]에서 그런 장미를 발견하지만 그것은 이미 죽은 꽃이다.

내가있는 집 앞에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나는 어디에 살든지 항상 그런 아름다운 정원 곁에 살았다 ―그리고 그 정원 가까운 곳에는 사원이 두 개 있다. 그 사원에 오는 예배자들은 내 정원에 와서 신에게 바칠 꽃들을 꺾곤 한다. 인도에서는 신에게 바치기 위해서 꽃을 꺾는 사람의 행위를 절대로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나의 정원에서 꽃을 꺾지 못하게 한다. 내가 그들의 행위를 허락하지 않자 그들은 충격을 받았다. 신에게 바칠 꽃을 꺾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어 있는 것이 인도에서는 기정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거의 반박조로 말한다.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예배자는 어디에서도 꽃을 꺾을 수 있습니다. 이 꽃들은 신에게 바칠 것입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이 정원에 있는 꽃들은 이미 신에게 바쳐진 것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들의 행위를 허락할 수 없다. 그것들은 살아서 태양과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있다. 그러니 그대의 우상 때문에 그것들이 생명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이 꽃들은 살아 있는 신들이다. 그대는 그대의 죽은 신을 위해서 꽃들의 생명을 파괴하려고 하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 정원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참으로 종교적인 사람들에게는 그 행위가 허락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인을 위해 꽃을 꺾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을 언제나 환영한다. 이 꽃들은 신성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꽃들을 꺾음으로써 그들의 사랑을 신성한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 이 꽃들을 꺾는 사람은 언제든지 환영한다. 하지만 그대들은 지금 이 꽃들을 죽은 우상에게, 돌조각에게 바치려고 한다. 그것은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

소위 성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경전에서 어떤 개념이나 수행 방법을 꺾어온다. 그것들은 죽은 꽃과 같다. 수천 년 동안 말라비틀어진 미라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향기도 없다.

이것은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살아 있는 스승으로부터 나온 것만이 진정한 수행 방법이다. 살아 있는 스승의 가르침만이 올바른 개념이다. 살아 있는 스승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단지 경전에서 따온 개념이나 계율이나 수행 방법은 죽은 것이다. 그대는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그것을 따를 수 있겠지만, 그것들은 그대에게 고통과 번민을 줄 것이다. 죽은 것을 따르는 한 그대는 서서히 죽어갈 것이다. 그래서 그대가 생각하는 소위 성자라는 사람들은 거의 죽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을 접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과 존재계 사이에 수천 가지 장애물들을 만들었고, 그것들은 그들은 진리나 수행 방법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어록을 그들의 시야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이들이나 중생들은 자신들의 불멸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아라한들은 다르다. 아라한들은 보살과 같은 경지에 있다. 보살은 아라한보다 경지가 더 높지 않다. 단지 방향이 다를 뿐 그들은 같은 봉우리에 이르른 존재들이다. 그리고 그 봉우리는 항상 하나이다. 물론 거기에 이르는 길은 수천 가지가 될 수 있다.

"마음이 열반에 이르면" 이것이 이 어록의 두 번째 잘못이다. 마음은 결코 열반, 즉 니르바나에 이를 수 없다. 사실 마음은 니르바나에 대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니르바나란 말 자체가 '마음의 정지'란 뜻이다 그대가 이해하기 쉽게 문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촛불이 꺼진' 상태이다. 마음은 의식의 작은 불꽃을 가진 하나의 촛불이다. 그러나 그 작은 불꽃이 엄청난 해를 끼칠 수 있다.

나는 그대에게 타고르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의 부친은 매우 부유한 영주였다. 그의 영지는 수백 개의 마을을 포함해서 수천만 평이나 되었다. 그의 영지 가운데로 아름다운 강이 흐를 정도였다. 그래서 타고르는 배를 타고 몇 달씩 이 아름다운 강 위에서 살곤 했다. 그 강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빽빽한 숲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그는 이 배 위에서 크로체(Croce)의 시를 읽곤 했다.

크로체는 아마도 아름다움에 관해서 그 어떤 철학자보다 깊이 생각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전생애를 통해서 아름다움의 의미를 찾은 철학자였다. 그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오직 아름다움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아름답지 못한 것은 진리일 수도, 선일 수도 없었다. 그는 아름다움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았던 사람이다.

타고르 역시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삶 자체를 미학적으로 살았다. 그는 아름다운 시를 지었을 뿐 아니라,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시였다. 그는 정말로 축복받은 사람이었다.

보름달이 뜬 어는 날 밤에 그는 나룻배 속에서 촛불을 켜 놓고 크로체의 작품을 읽었다. 밤이 깊은 시각에 크로체의 난해한 문장을 읽다가 그는 책을 덮고는 촛불을 껐다. 그리고는 배 위에서 잠을 청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보름달이 춤을 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름달은 나룻배 안을 환한 광채로 가득 채웠다. 그 순간 타고르는 침묵에 빠졌다. 그것은 매우 성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밖을 쳐다보았다. 고요한 밤, 고요한 숲 속에서 달빛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강물 역시 소리없이 천천히 흘러갔다.

그는 다음 날 아침 이렇게 일기를 썼다.
"아름다움은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러나 촛불이 그 아름다움을 가로막고 있었다. 촛불의 빛 때문에 나는 달빛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니르바나의 정확한 의미이다. 그대 에고의 작은 불빛 때문에, 마음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생각의 촛불 때문에, 우주 전체가 그대 속으로 돌진해 들어오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니르바나는 그대의 촛불이 꺼졌을 때, 그대 존재의 구석구석을 우주 전체가 관통하고 지나가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대는 더 이상 잃어버린 탕자가 아니다. 그대는 처음으로 시들지 않는 무한정한 아름다움의 보물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선의 보물이며 진리의 보물이기도 하다. 그것은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니르바나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직 무심(無心)만이 니르바나에 이를 수 있으며, 무심(無心)이 바로 니르바나인 것이다. 무심(無心)의 상태에서는 억지로 니르바나에 이를 필요는 없다. 무심(無心)이 바로 니르바나이다. 달마는 말한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