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달마의 불종자론(佛種子論)-3.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通達無我法者 2008. 10. 10. 19:23

 

 

무심(無心)이 열반이 이르면 그대는 열반을 보지 못한다. 무심(無心)이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니르바나로부터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는 니르바나를 볼 수 없다. 그대는 그대로부터 분리된 어떤 대상만 볼 수 있다. 그대가 그것과 하나가 되었을 때 그대는 그것을 볼 수 없다. 눈동자가 그것 자체를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대가 열반을 보게 되면 그대는 마음 밖 어떤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그대는 이미 스스로 미혹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마음은 하나의 세계이며, 무심(無心)은 그 세계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움이다. 마음은 불행이다. 그리고 무심(無心)은 불행의 끝이며 황홀경의 시작이다.

모든 고통은 부처의 씨앗이다. 고통으로 인해 지혜를 찾는 마음을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는 고통이 불성(佛性)을 일으킨다는 말은 할 수 있어도 고통이 바로 불성(佛性)이라는 말은 못한다.

달마의 이 말은 매우 중요한 주장이다. 러셀은 그의 자서전에서 심오한 뜻을 지닌 말을 했다. "만약 이 세상에서 불행이 끝난다면 모든 종교도 그것을 따라서 끝날 것이다. 종교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은 바로 불행이다."

그는 달마와는 다른 각도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는 무신론자였고, 모든 종교가 사라지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나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그러나 나 또한 다른 이유 때문에 종교가 사라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그는 종교가 인간의 진화에 해를 끼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종교가 사라지기를 원했다. 하지만 나는 종교 때문에 진정한 종교스러움이 설 땅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종교가 사라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종교는 종교적 성격이 자라나는 데 해가 된다. 그리고 나에게는 종교적인 성격이야말로 인간 진화의 궁극적인 꽃이다.

고통조차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된다는 달마의 말은 옳다. 그것은 바로 부처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마약 고통이 없다면 그대는 결코 진리를 찾지 않을 것이다. 고통 때문에 그대는 그것을 초월하려는 무엇인가를 계속 찾게 된다. 고뇌와 번민은 그대로 하여금 그것들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만든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잠에 빠질 것이다. 너무 편안해서 식물처럼 될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데는 고통이 필요하다.

그대의 마음과 육체는 하나의 밭이다.
고통은 씨앗이다. 지혜는 그 싹이고 불성은 그 열매이다.

이 말에서 달마는 그대의 육체와 마음과 그 고통에 가치를 불어넣고 있다. 그는 그대 삶의 모든 부분을 다 헤아리고 있다. 그는 어떤 것도 그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것이다.

그대의 마음과 육체는 하나의 밭이다.
고통은 씨앗이다. 지혜는 그 싹이고 불성은 그 열매이다.

이것은 삶을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으로 보는 사람의 길이다. 소위 종교라고 하는 것은 살아 있는 근원과의 접촉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육체를 무시한다. 육체를 하나의 밭으로 생각하고 감사하는 대신에 그것을 고문하다. 육체는 부처가 사는 하나의 사원이다. 달마와 같은 사람은 고통이나 번민조차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고통과 번민은 그대를 각성시키고 지속적으로 깨어 있게 한다. 그리하여 그대를 자극하고,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그대에게 도전한다.

그대의 마음 속에 세 가지 독이 있을 때 그대는 예토(穢土)에 사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 속에 세 가지 독이 없을 때 그대는 정토에 사는 것이다.

사실은 천당과 지옥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삶 속에 들어 있다. 오직 그 구조만 바뀔 뿐이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그대 속에 있을 때 그대는 지옥에 있게 된다. 그것이 그대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다. 그대가 그것들을 벗어나는 순간 그대의 마음을 벗어난다. 그때 그대는 천당 속에 있게 된다.

세상에는 죽은 뒤에 천당으로 간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악한 일을 한 사람은 죽은 뒤에 지옥에 가고,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죽은 뒤에 천당으로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절대적으로 틀린 생각이다. 선한 사람은 이미 천당에 가 있다. 죽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천당은 어디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자신의 변형이다. 분노와 같은 에너지가 자비로 변할 때, 탐욕의 에너지가 나누어주는 것으로 변할 때, 어리석음의 에너지가 각성으로 변할 때, 그것이 바로 천당인 것이다. 그 에너지는 같다. 단지 그 방향이 다를 뿐이다.

그대 에너지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 그것의 새로운 조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종교의 기술인 것이다. 종교를 이와 다른 것으로 설교할 때 그것은 자신을 장님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장님을 만들어 함께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그들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인간은 본성에 의해 모든 것이 주어져 있다. 만약 그것이 올바르다면 이간은 이미 부처이다. 그 에너지가 잘못 얽혀 있다면 그대는 그것의 멋진 교향악을 만들어낼 수가 없고 그대의 삶은 지옥으로 변한다. 그대는 천당과 지옥이 존재할 수 있는 마당이다. 자그마한 각성만 일어나도 그대는 지옥을 천당으로 변하게 할 수 있다.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으며, 아무것도 그대로부터 떼어낼 것이 없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까지 있었던 것 중에 가장 위대한 통찰력이다. 이것은 인간을 자신의 삶에 주인으로 만든다. 만약 그가 지옥에 살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어깨에 그 책임을 져야 한다. 그는 '이것은 신의 뜻이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나의 운명이다.'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그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것은 나의 무의식이며 바로 나 자신이다.'

그대가 자신의 두 어깨에 책임을 지는 순간 그대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다른 누구도 그대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누군가가 와서 그대를 변화시켜 주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아무도 그대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 그대는 그저 자신의 에너지를 지켜보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리고 그대는 어떻게 그것들이 지옥을 만들며 불행을 만들어 내는지 알 수 있다. 또한 그대는 어떤 순간에 침묵에 빠지는지, 어떤 순간에 기쁨이 밀려오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에너지들이 무엇을 하는지 지켜 보라. 그것들은 같은 에너지이며 그대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자신의 에너지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만 하면 된다.

만약 누군가가 지옥 속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그의 선택이다. 그것은 그가 가진 타고난 권리이다. 아무도 그를 방해할 권리가 없다. 그가 변화를 원한다면 그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갖고 있다. 구세주를, 예수 그리스도나 크리슈나를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다. 그대는 자신의 구세주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달마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다.

진리가 아닌 말이 없다.

여기서 달마는 이상한 말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의미심장한 전환이다. 이렇게 말하는 신비주의자를 나는 달마말고는 본 적이 없다. 진리가 아닌 말이 없다. 어떤 것을 꼬집어 이야기하지 않고도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도이다. 그러나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때때로 그의 통찰력은 인간의 실체를 꿰뚫는다. 그것은 정말로 위대하고 놀라운 것이다. 그는 지금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하루 종일 떠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는 하루 종일 이야기하고 있는가? 아마도 그는 그 말을 통해서 상대방을 침묵의 상황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렇게 할 것이다. 모든 폭풍우 뒤에는 항상 정적이 감도는 것처럼 말이다.

스승이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출 때 갑자기 거대한 침묵이 거기에 생겨난다. 그는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말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그대의 마음을 완전히 몰두시켜 갑자기 그대가 몰입되었다는 것을 보게 만든다. 그는 하나의 작은 틈을 만든 것이다. 그 틈 사이에서 초월의 불빛이 생겨난다. 달마의 말 역시 초월의 불빛이다. 말과 말 사이의 순간에 어떤 기적이 일어난다. 그 침묵의 순간에 스승의 존재가 그대의 존재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는 42년 동안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침이고 점심이고 저녁이고 언제든지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진리를 말한 것이 아니다. 진리는 말로 표현될 수가 없다. 단지 그는 말과 말 사이에서 침묵을 통해 초월의 등잔에 불을 붙였을 뿐이다. 그는 침묵의 작은 틈을 만들어내기 위해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작은 틈이야말로 그의 진짜 설법이다.

달마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 역시 말을 하지 않는 소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안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은 그저 가식일 뿐이다. 그 순간에도 그들은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알파벳의 글자 모양을 갖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알파벳 글자 모양들을 짜 맞추어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그러면 그 옆에 앉아 있는 대변인 격인 제자가 입을 연다. 정말로 우스운 일이다. 차라리 앉아서 타자기를 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것이 시간이 훨씬 덜 걸릴 것이다.

또 알파벳 글자 모양 같은 것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직 손동작만으로 의사 소통을 하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그대는 그가 무슨 시늉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숙달된 제자만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주먹을 쥔다든지 손바닥을 편다든지 손가락 두 개만 편다든지 할 때 그 제자는 스승의 의사를 알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진정한 성자가 아니다. 그들은 코미디언일 뿐이다. 그들의 침묵은 절대적으로 난센스이다. 모든 종류의 멍청한 짓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영원히 포장된다.

내가 봄베이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유명한 성자로서 히말라야에 살고 있었는데 특별히 나를 보기 위해 봄베이에 왔다. 보통 나는 그런 종류의 성자들과 만나는 것을 피해 왔다. 그들은 내가 만나보고 싶지 않은 바보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만나기 위해서 매우 먼 길을 고생해서 찾아왔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말했다.
"그대 나를 만나기 위해서 고생을 했으니, 나도 어는 정도 고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와 만났다. 그는 자기 제자들과 함께 왔는데 그는 명상에 관해서 알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