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어록(達磨語錄)

달마의 중생론(衆生論)-2. 마음은 그대를 얽어매는 굴레이다

通達無我法者 2008. 10. 18. 19:06

 

 

달마의 중생론(衆生論)-2. 마음은 그대를 얽어매는 굴레이다


"마음은 그대를 얽어매는 굴레이다." 달마는 어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통찰력을 갖고 있다.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의 제자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아무도 달마와 같은 통찰력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들은 단순히 침묵해 있거나 말을 한다. 그러나 그 침묵이나 말들은 달마의 의식에까지 높이 오르거나 깊이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 자신이 하는 말에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두려움을 모른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상관하지 않는다. 그가 말을 할 때면 어떤 누구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과 같았다.

9년 동안 그는 벽 앞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오면 그의 등뒤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질문을 했지만 달마는 오직 벽하고만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침묵 속으로만 몰입했다.

어젯밤 나는 크리슈나무르티(J. Krishnamurti)의 마지막 책을 받았다. 그는 어떤 누구를 향해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직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말들은 녹음되었지만 청중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 이 책은 그의 다른 책들보다 진리에 더 가까울 것이다. 청중이 하나의 한계를 만들어내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나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내가 나의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거기에 한계가 없다. 그때 나는 어떤 것을 말해야 한다거나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때 나는 마치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나를 알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는 커다란 한계가 생겨난다. 그때 나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의 얼굴, 그들의 눈, 그들의 동작이 나로 하여금 그들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며칠 전 인도 타임스의 기자들 70여 명이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내가 기자 회견을 하기 위해 강당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매우 이상한 분위기를 맛보았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매우 냉담했고, 길들이지 않은 야생동물들 같은 인상을 내뿜고 있었다. 내가 합장을 하며 인사를 했을 때 그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인도에서는 길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도 서로 합장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가 누군지도 몰라도 말이다.

합장은 영적인 의미를 지닌 인사법이다. 악수를 하는 것에는 아무런 영적 의미도 없다. 그것은 세속적인 의미밖에 없다. 그대는 오른손으로 악수를 한다. 그것은 그대의 손안에 무기가 없다는 뜻이며 서양에서 생겨난 인사법이다. 그것은 인사가 아니라 하나의 탐색전이다. 그 의미는 매우 정치적이다.

그러나 합장을 하는 것에는 영적인 뜻이 담겨 있다. 그것은 먼저 상대편의 신성에 절한다는 뜻이다. 그대가 낯선 사람이나 친구거나 적이든 간에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대는 신의 사원이며 살아 있는 신이란 뜻이다. 두 손을 합장하는 것은 살아 있는 신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비물질적이다. 그대가 친구이건 적이건 간에 말이다.

또한 합장은 두 가지 마음을 품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한마음이 되었다는 뜻이다. 두 손바닥을 합치는 것은 좌뇌반구와 우뇌반구가 만난다는 뜻이다. 나는 온전한 하나를 이루어 그대에게 절한다는 뜻이다.

내가 인도 타임스의 기자들과 만났을 때, 나는 무척 놀랐다. 그들은 모두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모두 지성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인사에 답할 줄을 몰랐다. 그들은 석상처럼 앉아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 말을 한다는 것은 벽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힘들다. 그들에게 보내는 나의 인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그들은 인간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런 무례함은 동양에서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의 기자 회견을 하겠다고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나는 그들과 잠시도 같이 있기가 싫었다. 그것은 그들이 계속 어리석은 질문만 던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내가 대답을 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내 이야기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 인도 타임스의 실무진 모두가 이곳에 왔기 때문에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사실 내가 그들의 뜻에 동의한 것은, 그들 중에 나의 사람이 한 명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사미르 자인이다. 그는 예전에 이곳에서 명상도 했고 또한 산야신이기도 하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나의 산야신이 되는 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했지만, 그는 아버지에게 결별을 고하면서까지 산야신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오직 그만을 바라보면서 인터뷰에 응했다. 그리고 나는 내 말을 왜곡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내 말을 왜곡하지 못하고 신문에 실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질문과 내 대답을 함께 실을 만한 배짱이 없었다. 왜냐하면 정치와 언론에 대한 나의 생각을 묻는 질문에, 나는 썩은 정치와 그 정권에 아부하는 썩은 언론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기 때문이다.

달마는 마치 자신에게 말을 하듯이 이야기했다. 그때 그는 어떤 한계도 없이 자신의 가슴을 완전히 열어젖뜨릴 수 있었다. 그는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나, 앞으로 나의 말을 기록한 책을 읽을 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도 이 점 때문에 그의 말은 인간의 본성 깊은 곳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대는 이전에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내용들을 그의 어록에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달마는 너무도 명확하게 말했기 때문에 그대는 그 말에 어떤 반박도 할 수 없다.

이 어록은 적어도 천 년 이상 존재해 왔지만 어떤 불교 학자도 그것들에 대해서 주석을 붙이지 못했다. 그것은 이 어록이 사원의 탑 안에 깊숙이 보관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야 서양의 학자들에 의해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엄청난 의미들을 지닌 불교 서적이 불교도들에 의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고, 오히려 감추어져 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불교도들의 공포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수천 권의 책들을 영어나 독일어,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언어로 번역했지만 달마의 어록은 완전히 무시했다.

참으로 이상한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는 가장 진지하고 진실한 것은 가장 위험스런 것이 되어 왔다. 며칠 전 이곳 뿌나에서 스와미 스바루파난드(Swami Svarupanand)는 신문에 이렇게 발표했다.

"오쇼는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인간이다." 나는 내 집 밖을 한 걸음도 나가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나는 어떤 정치적 권력에도 관심이 없다. 나는 어떤 핵무기도 갖고 있지 않다. 도대체 그는 어떤 근거로 내가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했는가? 그 위험이란 어디에 있는가?

그 위험은 내가 진리에 관해서 다른 어떤 사람과도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내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다. 진리가 위험한 것이다.

사람들은 거짓말을 통해서 자신을 위로한다. 그 거짓말은 사람들이 그들의 무덤에 갈 때까지 계속 희망을 준다. 그 거짓말은 그들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고통과 그들의 삶이 어리석다는 사실에 대한 허무함을 잊어버리게 하는 아편처럼 작용한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이렇게 하고 있다. 누군가가 진리를 말하면 그는 그 즉시로 위험한 인물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는 위험한 사람이 안 될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서른 세 살의 젊은이였다. 교육도 받지 못했고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말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도저히 그런 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유대교의 모든 거짓을 폭로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젊은이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소크라테스 역시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 하지만 진리를 말한 것이 그의 죄였다. 그는 독배를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달마 역시 독살되었다. 그를 독살시킨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다른 체질의 사람이었다. 그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고, 한밤중에 무덤 속에 신발 한 짝만 남겨 놓고 사라졌다. 다른 신발 한 짝은 그의 지팡이에 걸려 있었다.

3년 뒤 사람들이 그가 완전히 죽었다고 믿었을 때, 한 정부관리가 그를 보았다. 그는 국경 근처에서 히말라야로 막 들어가던 중이었다. 관리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달마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그는 달마에게 물었다. 그러자 달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깊은 혼수상태 속에서 밤에 될 때까지 있다가 깨어나 무덤을 빠져 나왔다. 나는 무덤에 신발 한 짝을 남겨 놓았다. 그것은 내가 무덤 속에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나머지 한 짝은 내 지팡이에 매달았다. 그것은 내가 달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이다. 그런 행동은 나를 나타내는 증표이다."

그 관리는 즉시 달마가 죽었다는 산으로 뛰어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 제자들은 관리의 말읕 듣고 그에게 무덤을 보여 주었다.

관리는 말했다.
"나는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싶소. 그분은 짚신의 다른 한 짝이 무덤 속에 남아 있다고 말했소. 그러니 무덤 속을 보고 그분이 진짜 달마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속였는지를 알고 싶소."

그 무덤을 파헤쳐졌고 거기에는 짚신 한 짝만 남아 있었다.
달마를 독살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그는 단지 그대의 잠을 깨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하건만, 그대의 반응은 그를 죽이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누가 제정신이 아닌가? 소크라테스가 미쳤는가? 예수가 제정신이 아닌가? 만수르(Mansoor)가, 사르마드(Sarmad)가 미쳤는가? 달마가 정말 정신이 나간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면 그들을 죽인 사람들은 무엇인가?

여기에 진리를 이해하고 모든 거짓말을 떨쳐 버리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말이 나와 있다. 마음이 없이는 부처도 없다는 말의 뜻은 부처가 마음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나 부처는 마음이 아니다. 마음은 부처의 굴레이다. 그는 마음을 넘어서서 무심의 경지로 나아간 사람이다. 그런 자만이 부처가 된다. 하지만 그도 처음에는 마음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대들 모두도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이미 반은 여행을 마친 셈이다.

나머지 반은 그대의 마음을 벗어날 때 완성된다. 그때 그대의 불성이 선언된다. 그대는 그것을 소리 쳐서 선언할 필요가 없다. 그대는 그것을 속삭일 필요도 없다. 그것은 스스로 선언할 것이다. 그대의 말 속에, 그대의 침묵 속에, 그대의 깊은 눈동자 속에, 그대를 감싸안은 향기 속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대는 선선한 미풍처럼 될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사용한 여래란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한 가지는 내가 이미 설명했듯이 그것은 존재계와 그것의 여여(如如)함을 신뢰하는 사람을 말한다. 선이나 악이 일어나도, 축복이나 불행이 일어나도 그는 당황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존재의 여여함이라고 말한다. 그는 더 이상 고통으로 마음이 흔들리거나 기쁨으로 들뜨지 않는다. 모든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그대는 그 현상에 휩쓸리지 말고 홀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여래의 한 가지 의미이다.

여래의 또 한 가지 의미는 이 경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여래란 미풍과 같은 사람을 뜻한다. 그것은 '이리하여 흘러오고 저리하여 흘러간다.'라는 뜻이다. 그는 그대의 초대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어느 날 문득 왔다가 그대가 붙잡아도 어느 날 문득 떠나간다. 그리고 그대에게 고요함과 정적의 경험을 남겨 놓고 사라진다.

이 정적은, 이 시원함과 산뜻함은 모든 존재계에서 그 어떤 것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 부처가 이 땅에 오면 모든 종교가들이 위험에 빠진다. 그리고 모든 정치가들의 내면에 전율을 일으킨다. 거짓에 의지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죽을까봐 겁을 낸다. 진리는 그런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단지 거짓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를 진동하게 만든다. 진리의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그런 일이 일어나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