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강의·혜거스님

〈34〉구슬을 찾으려면 물이 고요해야 한다 (探珠靜浪)/내 안에 들어있는 .

通達無我法者 2009. 10. 7. 21:12

 

 

내 안에 들어있는 지혜구슬을 찾아라

〈34〉구슬을 찾으려면 물이 고요해야 한다 (探珠靜浪)

  
 
‘구슬을 찾으려면 마땅히 물결을 고요하게 해야 할 것이니 물이 움직이면 구슬을 찾기 어렵다’는 구절에서, 물 속에 빠뜨린 구슬을 찾으려면 물결이 고요해져야 한다고 했는데, 여기 구정물이 한 그릇 있다고 하자. 이 물을 맑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물을 맑게 하겠다고 휘저으면 물은 점점 더 혼탁하게 될 것이고 그 물 속에 있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물을 맑게 하려면 가만히 놓아두어야 한다. 가만히 놓아두면 물결이 고요해지면서 온갖 티끌이 가라앉고 물결도 점차 맑고 깨끗해진다. 이렇게 되어야만 물 속에 빠뜨린 구슬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멈추는 도리이다. 가만히 둔다는 것은 부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동요가 없는 것이 바로 멈추는 경지이다. 누가 칭찬해도 동요가 없고 욕을 해도 동요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물결은 사람의 탐욕과 번뇌를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구슬은 내 안에 들어있는 지혜를 뜻한다. 탐욕과 번뇌가 많으면 점점 어리석게 되어 지혜는 더욱 드러나지 않게 된다. 탐욕과 번뇌가 사라진 뒤라야 지혜가 그 모습을 보이듯, 모든 움직임이 사라져 물이 맑아져야 물 밑 까지 모두 볼 수 있다.
 
이처럼 내 안에 들어있는 지혜의 구슬을 찾기 위해서는 멈추어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하여 온갖 티끌이 가라앉게 해야 한다.
 
 
탐욕과 번뇌가 사라진 뒤라야
 
지혜가 그 모습을 보이듯,
 
모든 움직임이 사라져 물이 맑아져야
 
물 밑까지 모두 볼 수 있다
 
 
탐주정랑(探珠靜浪)은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권2에 나오는 비유이다. 그러나 원래 이 말의 출처는 <장자(莊子)> ‘천지편(天地篇)’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황제가 북쪽 곤륜산에 올라갔다 돌아오는 길에 적수(赤水)라는 호숫가에서 현주(玄珠)라고 하는 보배 구슬을 물에 빠뜨렸다. 이에 황제는 지식이 제일 뛰어난 지(知)라고 하는 신하를 시켜 구슬을 찾아오도록 했으나 찾아오지 못했다. 다음에 이주(離朱)라고 하는 신하는 백리 밖에서 개미가 싸우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눈이 밝았기 때문에 가서 구슬을 찾아오도록 했으나 역시 찾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끽구(喫)라고 하는 말을 잘하는 신하를 보냈으나 그 역시 끝내 구슬을 찾지 못했다. 이에 황제가 형상도 잘 알아볼 수 없고 백치에 가까운 상망(象罔)이라고 하는 신하에게 시켰더니 물 속에 들어가자마자 구슬을 찾아서 나오는지라 황제가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물 속에 빠진 구슬을 찾는 것은 지식으로도 안 되고, 눈이 밝은 것만으로도 안 되며, 말을 잘하는 것으로도 안 된다는 것을 도를 닦는 것에 비유한 일화이다. 이로부터 수행자의 마음 다스리는 것을 물 속에 빠진 구슬을 찾는 것으로 비유하게 되었다.
 
본문에서 <원각경> ‘변음보살장(辯音菩薩章)’의 “모든 보살의 걸림없이 청정한 지혜는 다 선정을 의지해서 생긴다 (一切諸菩薩 無碍淸淨慧 皆依禪定生)”고 한 구절을 인용한 것은 부처님께서는 무명을 끊고 성불하셨기 때문이다. 무명은 탐욕을 끊어야 없어지며, 탐욕은 사물을 바로 봄으로써 끊어진다. 바로 보는 것은 일념이 되어야 하고, 일념에 의해서 바로 선정이 이루어지고 선정에 의해서 지혜가 생기므로 모든 보살의 청정한 지혜는 다 선정을 의지해서 생긴다고 한 것이다.
 
<법화경>의 ‘안락행품(安樂行品)’의 인용구인 “한적한 곳에서 그 마음을 닦아 섭수하되 편안히 머물러 부동하기를 수미산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한 구절 역시 안선정려(安禪靜慮)가 성불의 길임을 거듭 강조한 것이니, 참선이란 지혜를 여는 중요한 문이며 지혜란 선정에 의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참선수행의 본래 목적은 생사해탈(生死解脫)에 있고 실상세계의 이치를 깨닫는 데 있다. 실상세계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은 현실 속의 실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현실세계의 극명한 이치가 곧 실상의 이치이므로 얽혀진 현실 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실상의 도리이다. 어찌 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여 망연한 곳에서 나아갈 길이 선명한 것 또한 실상의 도리인 것이다.
 
지옥의 늪에서 빠져나올 기약이 없는 중생에게 한 가닥 줄이 되어주는 도리가 곧 실상의 이치를 깨닫는 데 있고, 실상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 곧 현실세계의 바른 길이기 때문에 참선수행은 현실세계를 사는 가장 바른 길을 열어주는 요문이라 할 수 있다.
 
또 참선이 왜 필요한가. 그간 우리는 참선에 대한 올바른 인식없이 불립문자(不立文字)만을 고집해 왔기 때문에 수많은 인재들이 공부해야 할 시기를 놓쳐서 오히려 현실사회의 지식에도 미치지 못하고 자긍심만 강한 비현실적 모순에 처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선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참선하는 사람들이 잘못된 것이다.
 
참선이란 이 세상에서 지식으로도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풀어야 할 사무친 의문을 어느 곳에서도 해결할 수 없을 때 한다. 세상에서 배울 수 있고 해결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참선을 통해서 배우고 해결하려 하겠는가.
 
지식이 보편화되고 문화가 평준화되어 가고 있는 현대에 우리는 보편화된 지식을 능가하는 지식이 필요하고 모든 세상이 우러러보는 문화가 필요하다. 의문이 풀릴 때까지 참구하고 참구하는 습관, 한번 참구하면 밤낮을 잊고 모든 것을 잊는 습관, 꾸준하기가 시작과 끝이 한결같은 지구력, 세상의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부동한 마음이 참선을 수행하는 마음이다. 이러한 참선수행을 통해서만이 최상의 지혜를 얻고 생사의 관문에서 벗어나게 된다.
 
선정의 의미가 이미 그러하고 선정의 공능이 그러하다면 참선의 뜻을 올바로 인식하고 참선 수행을 올바로 했느냐가 문제이지 참선 그 자체에는 추호의 시비도 붙여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서예를 하는 사람이 자기가 쓴 글씨에 만족하기 시작하면 바로 오만해져서 더 이상 향상 될 수 없고 한계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써도써도 자신의 글씨에 부족함이 보이고 모자람이 느껴지면 계속해서 향상될 수 있듯이, 참선하는 사람도 자신의 허물이 보이고 부족함이 느껴진다면 계속해서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발심이 참선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561호/ 9월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