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강의·혜거스님

〈35〉선정 (禪定)의 공덕/범부의 망견과 성인 지위도 ‘초월’

通達無我法者 2009. 10. 7. 21:19

 

 

범부의 망견과 성인 지위도 ‘초월’

〈35〉선정 (禪定)의 공덕

 
 
“시지초범월성(是知超凡越聖)은 필가정연(必假靜緣)이요 좌탈입망(坐脫立亡)도 수빙정력(須憑定力)이니라 일일생취변(一一生取辨)이라도 상공마차타(尙恐馬差駝)온 황내천연(況乃遷延)이면 장하적엽(將何敵業)이리요 고(故)로 고인(古人)이 운약무정력(云若無定力)이면 감복사문(甘伏死門)이요 엄목공귀(掩目空歸)면 완연유랑(宛然流浪)이라 하니 행제선우(幸諸禪友)여 삼복사문(三復斯文)이면 자리이타(自利利他)하야 동성정각(同成正覺)하리라.”
 
범부를 초월하고 성인을 뛰어넘는 것도 반드시 고요한 경계를 의지해야 하고, 좌탈입망(坐脫立亡)하는 것도 반드시 선정의 힘에 의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생토록 취하고 가려도 오히려 잘못될까 두려운데 하물며 수행을 게으르게 한다면 장차 무엇으로 업(業)을 대적하겠는가?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선정력이 없다면 죽음의 문에 기꺼이 항복할 수밖에 없고 눈을 감고 헛되이 돌아가면 분명하게 생사윤회에 유랑하게 된다”고 하였으니, 바라건대 모든 선수행자들이여! 이 글을 3번 반복하면 자리이타(自利利他)하여 모두 정각(正覺)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 문단은 <좌선의>를 끝맺는 결론으로서 선정의 공덕에 대해 설하고 있다. 범부를 초월하고 성인까지도 뛰어 넘으며,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 자유자재함을 보이는 것은 선정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선정에 들도록 끊임없이 분발해야 하며,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반드시 정각을 이루도록 발원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심하게 감기만 들어도 염불조차 잘 안 되는 것을 누구나 체험했으리라고 본다. 하물며 죽음에 이르러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이것은 결코 보통의 정신력이 아니다. 오직 선정에서만 가능하다. 어떻게 하면 정(定)에 들 수 있겠는가. 분발해야 한다.
 
“일생동안 취하고 가린다 해도 오히려 잘못될까 두려운데 하물며 수행을 게을리 한다면 무엇으로 업을 대적하겠는가” 라고 한 문단에서 취하고 가린다는 구절과 무엇으로 업을 대적하겠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을 잊어버릴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인이고 解脫人
 
이와 같이 버리고 또 버려서
 
깨달았다는 생각까지 없어야 참 수행자
 
 
취하고 가린다는 것은 진(眞)과 망(妄)을 가려서 진은 취하고 망은 버린다는 뜻이다. 이는 수행자가 온전한 삼매에 들지 못하고 조금 일여한 듯하면 이를 삼매로 착각하고, 또 짐작으로 그럴싸하면 이치를 깨달았다고 잘못 여기니, 가려서 온전히 삼매에 몰입하는 것을 취하고 가린다고 한 것이다.
업에 대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업이란 관행의 업식이 쌓인 것을 말한 것으로 이 업식(業識)에 의해서 한 치도 틀림이 없는 과보(果報)를 받는 것이 중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과보에 의해서 온갖 고통이 수반되는데 어떻게 이를 대적하여 물리치고 성성한 삼매에서 자유롭게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를 일깨워 준 말씀으로 분발을 촉구한 것이다.
 
사람이 일생에서 성취해야 할 것은 중생의 업을 바꾸어 성인의 반열에 이르는 것이고, 성인의 반열에 이른 후 다시 성인의 경지까지도 뛰어넘어야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임종에 이르러 황망하지 않고 초연하게 성성일여(惺惺一如)하여 앉고 서서 갈 수 있는 선정력을 얻는 것이다.
 
이러한 심원(心願)을 이루는 것이 무루법(無漏法)이라 하고, 세간의 탐욕을 이루기 위하여 심력(心力)을 다하는 것을 유루법(有漏法)이라 한다. 유루법에는 공동의 이익에는 마음이 없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기 때문에 증애(憎愛)와 시비(是非)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모두 고통인 것이니, 진실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유루법에서 벗어나 무루법에 이르러야 한다. 이렇게 되면 곧 범부의 좁은 소견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성인의 경지까지도 뛰어넘게 된다.
 
따라서 본문에서 초범월성필가정연(超凡越聖必假靜緣)이라 하였으니 범부를 초월하고 성인도 뛰어넘는 경지 또한 반드시 반연에 끌려가지 않는 선정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과연 범부의 망견을 초월하고 성인의 지위를 뛰어넘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 좌탈입망(坐脫立亡)이 가능한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무엇이 범부이고, 무엇이 성인인가를 알아야 한다. 지금 농사꾼이라고 해서 영원한 농사꾼이 아니고, 지금 장사꾼이라고 해서 영원한 장사꾼이 아니며, 부자 또한 영원한 부자가 없고 권력 또한 영원한 권력이 없다.
 
범부와 성인도 그 근원이 하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범부는 왜 범부인가. 자재력이 없고, 지구력이 없고, 방탕하고, 환락적이고, 창의성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움직이고, 남에게 끌려가는 것이 바로 범부이다. 범부의 마음은 버리기가 쉽지 않아서 뜻을 세워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혹 뜻을 세운다 해도 중도에서 실패하고 만다. 어떻게 하면 범부의 마음을 바꿀 수 있는가. 범부의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범부의 마음은 끝내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고통을 받게 하는 무지한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참모습을 깨닫게 하는 공부가 바로 참선수행인 것이다.
 
참선 수행이 없는 범부는 오관에 의해 보고 듣고 아는 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하여 계산하고 집착하여 마치 찻잔으로 바닷물을 헤아리는 것과 같이 세상을 헤아리고 계산하기를 끝이 없이 하기 때문에 아는 것 자체가 감정적이고, 나아가고 흘러감에 이성적이지 못하여 하는 일마다 집착하고 고집한다. 보고 듣고 집착하지 않고 동요됨이 없으면 정견.정사유가 되지만 조금이라도 관념에 의하여 분별한다면 이것이 바로 범부의 소견인 것이다.
 
성인은 왜 성인인가. 자재력이 있고, 지구력이 있고, 방탕하지 않고, 환락적이지 않고, 창의성이 있어서 남을 따라서 행동하지 않고, 자주성이 있어서 모든 일을 스스로 하기 때문에 성인인 것이다. 그러면 성인을 뛰어넘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성인이 되어서 ‘나는 성인이다’라는 생각까지도 없어야 한다.
 
결국 성인이라는 생각에 집착하게 되면 자유인이 되지 못한다. 이것이 수행하는 사람의 마지막 관문이다. 성인이 되어서 자신을 잊어버릴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인이고, 진정한 해탈인(解脫人)이다. 이와 같이 수행은 버리고 버려 깨달았다는 생각까지도, 성인이라는 생각까지도 버려서 더 버릴 것이 없어야 진정한 수행자인 것이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 2563호/ 10월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