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강의·혜거스님

〈36〉생멸이 다하면 적멸하여 즐거움이 된다/임종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通達無我法者 2009. 10. 14. 22:50

 

 

임종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정의 힘

〈36〉생멸이 다하면 적멸하여 즐거움이 된다

 
 
본문에 좌탈입망(坐脫立亡)하는 것도 반드시 선정의 힘에 의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했는데, 모든 일에는 끝맺음이 중요하듯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 중요한 만큼 마지막의 임종 또한 중요하다. 살아가는 과정은 임종으로 이어지고 임종은 내세로 이어지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감옥에 가는 것과 죽음이다. 그러나 감옥은 죄를 짓지 않으면 가지 않지만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죽음에 대해 준비하지 않는 것이 중생이다.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하듯이, 죽음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내 몸이라고 여기는 몸뚱이에 눈.귀.코.입.촉감 등 5가지 감각 기관이 있고 이를 총괄하는 의식이 있다. 이를 일러 6가지 감각기관이라 하고 줄여서 6근(六根)이라 한다. 6근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고, 부딪쳐서 촉감으로 알고, 의식으로 사량 분별하는 작용을 쉬지 않는 것을 삶이라 한다.
 
그러나 깊이 잠이 들면 6근은 일시에 정지되지만 사람은 죽지 않는다. 아직 꿈꾸는 의식인 잠재의식, 예지의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죽지 않은 것이다. 이 의식을 7번째 감각기관, 즉 7식(七識)이라 부르고 범어로는 말나식이라고 한다. 이 7식까지 모두 정지되고 모든 식(識)의 주처(住處)인 제8 아뢰야식이 완전히 떠난 때를 죽음이라 한다.
 
이때를 당하여 사람이 어떠한 상태를 유지하는가에 따라서 내생이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이란 내세로 이어지는 관문이기 때문에 임종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고, 일생을 살아온 과정이 곧 임종으로 집약되기 때문에 일생을 어떻게 사는가의 문제가 다시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조사, 선지식들은 반드시 임종할 곳을 가렸고, 임종할 때를 미리 아시고 임종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는 힘이 있었다. 이는 오직 참선 수행에서 선정의 힘을 얻은 선지식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참선은 관습에 젖은 나를 버려서
 
철저한 無我의 경지에 이르러
 
최상의 지혜를 얻고 최후에는
 
생사에 자재할 수 있는 공부
 
 
선정의 힘은 최후의 임종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이다. 살아있으면서 몸과 마음이 자재하여 탐욕을 버리고자 하지 않아도 버려지고, 풀어야 할 의문이 있으면 풀고자 하지 않아도 풀린다. 참선만이 관행과 관습에 젖은 나를 버려서 철저한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르러 최상의 지혜를 얻고 최후에는 생사에 자재할 수 있는 공부인 것이다.
 
그러므로 특히 불교에서는 생사대사(生死大事)라 하여 생사의 문제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만일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발심이 없었더라면 부처님께서 유성출가(踰城出家)하시지도 않았을 것이고, 불교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생사문제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생사 문제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하여 생사 문제의 철저한 해결로 대각을 이루셨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의 수많은 수행과 언설 모두는 생사문제를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이 가운데 불교의 선은 생사라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고 반열반에 들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이라 하겠다. 실제 수많은 선사들이 직접 체구연마(體軀鍊磨)하여 깨닫고 난 후 생사에 자유자재한 모습을 통해 생사란 본래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생사의 문제는 반드시 깨달음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대명제임이 분명하다.
 
일반적인 용어의 생사는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 일기(一期), 즉 일생(一生)을 의미하나 불교에서 생사라고 하면 윤회와 동일어로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업인(業因)에 의해서 육도(六道)의 미계(迷界)에 태어나서 죽기를 거듭하면서 윤회하는 것으로서, 열반(涅槃)의 반대개념이다.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불교에서 생사의 의미는 생과 사를 반복하는 윤회의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생과 사를 불가피한 현실로서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즉 생겨난 것은 반드시 없어진다는 ‘생자필멸(生者必滅)’, 존재하는 모든 것은 무상하다고 하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은 죽음을 불가피한 현실로 인식한 대표적인 사상이라 하겠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 부처님께서는 “‘제행(諸行)은 무상하니, 이것이 생멸의 법이다. 생멸이 다하고 나면 적멸(寂滅)하여 즐거움이 된다.’ 여래께서는 이 게송을 설해 마치시고 모든 비구들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모든 존재하는 것은 다 무상하다. 내 지금 비록 금강(金剛)의 몸이지만 이 또한 무상하여 변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생사 가운데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속히 생사의 불구덩이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라. 이것이 곧 나의 최후의 가르침이다. 나는 반열반(般涅槃) 할 것이니, 그 때가 이미 왔도다.(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爾時如來 說此偈已 告諸比丘 汝等當知 一切諸行 皆悉無常 我今雖是金剛之體 亦復不免無常所遷 生死之中極爲可畏 汝等宜應勤行精進 速求離此生死火坑 此則是我最後敎也 我般涅槃 其時已至)”라고 하는 유훈을 남기시어 무상(無常)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반열반에 드신 것이다.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다 무상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금강(金剛)의 몸을 가지신 부처님조차도 이 무상함을 피할 수 없으며 생사 가운데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부지런히 정진하여 생사의 불구덩이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부탁하시는 것을 최후의 가르침으로 삼으신 것이다.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도 <선가구감(禪家龜鑑)>에서 “몸에는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있고, 세계에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 있고, 마음에는 생주이멸(生住異滅)이 있다. 이러한 무상의 고화(苦火)가 사면을 모두 태우는 것이다. 진리를 참구하는 이에게 삼가 부탁하노니, 광음(光陰)과 같은 세월을 헛되게 보내지 말라(身有生老病死 界有成住壞空 心有生住異滅 此無常苦火 四面俱焚者也 謹白參玄人 光陰莫虛度)”고 하였다. 이처럼 생노병사, 생주이멸, 성주괴공은 우주 만유의 법칙이다. 몸과 세계는 물론 마음조차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렇지만 이 가운데서도 생사는 인간의 일생을 주도하고 있는 커다란 명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