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강의·혜거스님

〈41〉깨달음으로 생사해탈 이뤄야/생사해탈 성취해야 가야할 일 분명

通達無我法者 2009. 11. 12. 23:30

 

 

생사해탈 성취해야 가야할 일 분명

〈41〉깨달음으로 생사해탈 이뤄야

 
선수행이 비록 생사가 존재하는 차안(此岸)을 떠난 피안(彼岸)의 열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지만 결국 피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차안이 곧 피안이고, 세간이 바로 출세간이고, 생사가 바로 열반이고, 범부가 곧 성인이라는 둘 아닌 이치를 바로 알 때 삶의 현실 속에서 생사를 극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란 대립적 사고가 초월된 삶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의 전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을 때 비로소 생사를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깨달음을 통해서 생사해탈이 이루어져야 아상이 없음을 성취하게 되고 내가 가야할 일이 분명해져서 세상을 위해 헌신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종에서는 중생에게 고통을 벗어난 참 삶을 개시해 주신 초조 달마대사로부터 현대의 선사들에 이르기까지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의 모습을 실제로 보여준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이러한 것은 타종교와 극명하게 차별되는 모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법상수좌(法常首座)는 가흥부(嘉興府) 보은사(報恩寺) 스님으로 그의 생활은 청빈하기 그지없어 방엔 작은 의자 하나가 있을 뿐, 그 어떤 물건도 없었다. 경자년(淳熙 7년: 1180) 9월, 그는 스님들에게 “한 달 뒤에는 다시 여기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하고서 10월22일에 방장(方丈)으로 가서 공양을 마치고 동이 틀 무렵에 방문에 <어부사(漁父詞)>를 써 붙이고 작은 의자에 올라가 발을 거두어 마침내 열반하였고, 가흥부(嘉興府) 화정(華亭)의 성공묘보(性空妙普) 암주(庵主)는 한주(漢州) 사람으로 사심(死心)선사를 사사(師事)하여 깨달음을 얻고서 곧 수수(秀水)에 이르러 선자화상처럼 그의 유풍(遺風)을 따라 생활하였다. 소흥(紹興) 경신년(1140) 겨울, 큰 동이를 만들어 둥이 아래 구멍을 뚫고 그곳을 마개로 막아두었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설두지(雪竇持)선사에게 “내 머지않아 수장(水葬)을 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임술년(1142), 설두 지선사가 그를 찾아와 살아있는 것을 보고서 게를 지어 그를 비웃자, 성공스님은 지선사 게송을 보고서 웃으며 “형이 와서 증명해 주기를 기다렸다” 하고서, 이에 사부대중(四部大衆)을 모두 모이게 한 후, 스님은 설법을 하고 이어서 게를 설하였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 통해
 
비로소 생사극복해 초월할 수 있고
 
아상이 없음도 성취할 수 있어
 
 
앉아 죽고 서서 죽는 것은 수장(水葬)만 같지 못하다/ 첫째는 화목(火木)이 필요 없고 둘째는 구덩이를 팔 게 없다/ 손을 흔들며 미련 없이 떠나는 것이 이 아니 통쾌한가/ 누가 지음(知音)일까 선자화상이다/ 그의 고풍(高風)을 길이 계승하기 어려워서 <어부사(漁父詞)> 한 곡조 부르는 이 적어라.
(坐脫立亡 不若水葬/ 一省柴燒 二省開壙/ 撒手便行 不妨快暢/ 誰是知音 船子和尙/ 高風難繼百千年 一曲漁歌少人唱.)
 
스님은 마침내 큰 동이에 가부좌한 채 앉아서 조숫물 따라 둥실둥실 흘러가자, 모두가 동이를 따라서 해변에 이르렀다. 스님이 보일락 말락 할 때, 스님은 마개를 뽑아버렸다. 그러다가 다시 물을 퍼내면서 되돌아왔다. 대중이 둘러싸 동이를 살펴보니 물이 한 방울도 들어오지 않았다. 스님은 다시 조숫물을 따라 떠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船子當年返故鄕  선자(船子)스님 그 당시 고향 돌아갈 제
 
沒蹤跡處妙難量  종적이 없는 곳 헤아리기 어려워라
 
眞風徧寄知音者  참다운 유풍 두루 지음에게 전하고
 
鐵笛橫吹作散場  쇠피리 가로 불며 한 바탕 분탕쳤네
 
 
그의 피리가락은 목 메인 듯 흐느꼈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바다 위에서 피리를 허공에 던진 후 사라져 갔다. 죽은 후 사흘 후에 강변의 백사장에 살아 계신듯 가부좌한 채 되돌아오자, 스님과 신도들이 앞 다투어 맞이했다고 한다.
 
특히 현대스님 중 한암스님의 좌탈입망 모습은 실제 사진으로 전해져 오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암스님(1876~1951)은 1941년 조계종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4년간 종단을 이끌었으며, 한국 전쟁 때는 소각 직전에 오대산 상원사 법당을 지켰다. 당시 인민군이 사찰을 근거지로 삼을 것을 우려한 국군이 법당에 불을 지르려 하자 한암은 가사 장삼을 갖춰 입고 법당에 앉아 “나도 함께 불을 사르라”고 했다. 이에 압도당한 국군 장교가 법당의 문짝만 떼어 불사르게 한 뒤 철수했다. 1.4후퇴 때도 오대산 모든 승려가 피난했으나, 한암스님만 남아 상원사를 지켰다.
 
1951년 3월22일 가벼운 병에 걸린 한암스님은 시자에게 물었다. “오늘이 음력으로 2월14일이지?”라고 말한 후 가사와 장삼을 입고 청량원 선상(禪床)위에 단정히 앉아서 열반에 드셨다. 이 순간 강릉 8사단 정훈부대 장교이자 육군소위로 복무중인 당시 35세의 김현기 스님(전 83세.원효정사 주지)이 지프로 사진사와 함께 도착해 스님의 마지막 모습을 촬영토록 지시했다.
 
이와 같은 선사들의 생사초탈 일화는 선정력으로 인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본문 끝에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선정력이 없다면 죽음의 문에 기꺼이 항복할 수밖에 없고 눈을 감고 헛되이 돌아가면 분명하게 생사윤회에 유랑하게 된다”고 한 것이다. 고통이 끊어지지 않는 범부세계에서 벗어나고, 청정국토에서 무위자적(無爲自適)한 성인의 경지마저도 초월할 수 있는 수행법이 참선수행으로써 선정을 닦는 일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간절한 가르침에서 우리는 발심하여 모두 함께 정각을 이루고자 발원하고 또 발원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 “바라건대 모든 선수행자들이여! 이 글을 3번 반복하면 자리이타(自利利他)하여 모두 정각(正覺)을 이루게 될 것이다”라는 구절은 단지 글을 세 번 반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실천하라는 간절한 당부인 것이다. 우리는 이런 간절하고 자상한 가르침을 마음깊이 새겨 반드시 발심해서 선정을 닦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를 이익되게 하는 대승의 문에 들어 모두 함께 정각을 이루고자 백 번 천 번 발원하고 또 발원해야 한다.
 
끊임없는 내면세계의 욕망과 번뇌를 잠재우고 무한한 법계의 실상을 착각하지 않고 바로 보는 것이야말로 참인간의 길이기에 역대 조사 선지식께서 그토록 조바심이 간절하도록 참선수행을 일러주신 것이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