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의 강의·혜거스님

〈47·끝〉좌선의 공능/지혜의 문 열어 安樂에 이르다

通達無我法者 2009. 12. 25. 20:36

 

 

지혜의 문 열어 安樂에 이르다

〈47·끝〉좌선의 공능

 
 
 
<좌선의>에서는 ‘좌선의 핵심을 안락법문’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안락(安樂)이란 고통에서 벗어남을 말한 것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지혜의 문이 열려야만 한다. 따라서 좌선은 나를 버리고 지혜의 문으로 들어서는 공부이다. 부처님께서는 일생 고통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사성제(四聖諦)이다. 선(禪)은 바로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으로 이르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좌선의>에서는 좌선의 공능에 대하여 네가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히 사대(四大)가 가볍고 편안해지며, 정신이 상쾌하고 예리해지며, 정념(正念)이 분명해지고, 법미(法味)가 정신을 도와 적연하고 청정하여 즐겁게 된다는 것이다.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7권에서는 선정의 10종 공덕을 설하고 있는데, ① 마음이 편안하여 위의를 갖추게 된다고 하는 안주의식(安住儀式) ② 자비심이 많아지는 행자경계(行慈境界) ③ 번뇌가 없어지는 무번뇌(無煩惱) ④ 육근(六根)을 보호하게 되는 수호제근(守護諸根) ⑤ 먹지 않아도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무식희락(無食喜樂) ⑥ 애욕을 멀리 여의게 되는 원리애욕(遠離愛慾) ⑦ 선을 바로 닦으면 공(空)에 떨어지지 않는 수선불공(修禪不空) ⑧ 악마의 걸림을 다 벗어버리게 되는 해탈마견(解脫魔) ⑨ 부처님의 경계에 편안히 머물게 되는 안주불경(安住佛境) ⑩ 해탈이 성숙되는 해탈성숙(解脫成熟)이다.
 
이와 같이 선의 공능은 말할 수도 없이 많다. 그러므로 선을 공덕총림(功德叢林)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좌선시 나타나는 장애인 마(魔)의 경계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아야 이러한 선의 공능을 잘 지켜나갈 수 있다.
 
 
자연히 四大가 가볍고 편안해지며
 
정신이 상쾌하고 예리해지며
 
正念이 분명해지고 法味가 정신을 도와
 
적연하고 청정하여 즐겁게 된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소란하게 하여 불도를 닦는 데 방해되는 가지가지 형태의 장애를 통칭해서 마(魔)라고 한다. 마(魔)는 범어 ma-ra의 음사어(音寫語)인 마라(魔羅)의 준말로 장애자(障碍者).살자(殺者).악자(惡者)라 번역한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마구니라고 한다. 또한 마를 인격화하여 마라(魔羅)라고도 하는데, 이는 곧 마왕을 일컫는 것이다. 마왕의 이름은 파순(波旬)이며 악마의 호칭이다. 선(禪)을 수행하는데 있어 마의 일을 잘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그러므로 <좌선의>에서는 ‘마(魔)의 일을 잘 알아 미리 대비하여 근심할 것이 없게 된 자는 가히 알지 못할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박산무이(博山無異, 1231~?) 선사도 <참선경어(參禪警語)>에서 “공부할 때에는 잘못됨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잘못을 모르는 것을 두려워 해야 한다”고 하여, 마의 일을 잘 알면 대비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으면 마의 침입을 받지 않게 되므로 마사(魔事)와 잘못을 모르는 것을 더 두려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공부를 지어나갈 때 잘못됨을 알면 고칠 수 있지만 잘못된 줄을 모르면 그것은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또한 <좌선의> 본문에서 ‘도가 높을수록 마가 치성하여 역(逆)과 순(順)이 끝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예로부터 도고마성(道高魔盛) 즉, 도가 높을수록 마(魔)가 치성한다고 하였고, 또는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 뒤에는 장애가 많다’라는 말도 있다. 수행자의 도가 높을수록 마는 어떤 때는 역경계(逆境界)를 나타내어 수행자를 괴롭히고, 어떤 때는 순경계(順境界)를 나타내어 수행자에게 혼란을 초래함으로써 수행자를 방해하여 불도를 이루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마는 외부에서 온다기 보다는 자신의 무지(無知)와 미혹(迷惑)에서 생긴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수행자에게 큰 장애인 마경(魔境)은 본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허공에 핀 꽃과 같은 것인데, 중생은 미혹해서 끊임없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흔히 한 생각을 돌리면 세상이 변한다고 한다.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이 비록 어렵더라도 그것을 얼마든지 좋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다. 마찬가지로 수행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마경도 얼마든지 깨달음을 향한 초석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지식들이 이 마경을 강조한 것이 아니겠는가.
 
마의 장애로부터 벗어났으면 참선으로부터 얻은 선정을 보호하고 유지(護持)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선정으로부터 출정하고 난 뒤에도 항상 선정을 유지하되, 마치 어린 아이 보호하듯이 하라고 한 것은 좌선할 때는 선정에 있다가도 출정하고 나서 일상으로 돌아와 매양 보통 때와 똑같다면 그 수행은 하나마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수행에서 선정을 얻고 그 얻은 선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선정이 쌓여 힘을 얻고 난 뒤라야 행(行, 가고).주(住, 머물고).좌(坐, 앉고).와(臥, 눕고).어(語, 말하고).묵(, 침묵하고).동(動, 움직이고).정(靜, 고요하고)에 늘 일여(一如)하게 되며, 일상의 일에서도 부동하게 되어 수행과 일상생활이 둘이 아닐 때야 비로소 득력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좌선의> 마지막에서는 ‘범부를 초월하고 성인을 뛰어넘는 것도 반드시 고요한 경계를 의지해야 하고, 좌탈입망(坐脫立亡)하는 것도 반드시 선정의 힘에 의거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생토록 취하고 가려도 오히려 잘못될까 두려운데 하물며 수행을 게으르게 한다면 장차 무엇으로 업(業)을 대적하겠는가?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선정력이 없다면 죽음의 문에 기꺼이 항복할 수밖에 없고 눈을 감고 헛되이 돌아가면 분명하게 생사윤회에 유랑하게 된다”고 하였으니, 바라건대 모든 선수행자들이여! 이 글을 세번 반복하면 자리이타(自利利他)하여 모두 정각(正覺)을 이루게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을 고구정녕 돌이켜보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좌선의>를 찬술하신 자각 종색선사께서 참선을 수행하는 수행인을 일러 반야보살이라 칭하신 것은 참선 수행이 곧 보살도를 이루는 길임을 전제로 한 것이다. 즉, 보살도의 덕목인 지혜와 덕을 선수행을 통해 이룰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이 곧 <좌선의> 라 할 수 있다.
 
어느 때보다 대반야와 보살의 덕성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지금 선의 바른 이해와 수행의 바른 방법을 이번 <좌선의>의 연재에서 조금이라도 이해되고 발심되어지길 간곡한 마음으로 바라는 바이다. 
 
혜거스님 / 서울 금강선원장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