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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23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3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알아차리지 못해서 혼미할 때는 감각적 욕망이 지배합니다.

욕망으로 인생을 시작하면 잘못된 죽음으로 끝납니다.

무명으로 시작하여 무명으로 끝나면 태어나고 죽는 윤회가 계속됩니다.

 

알아차려서 깨어있을 때는 지혜가 지배합니다.

지혜로 시작해서 해탈로 끝납니다.

지혜로 시작하여 지혜로 끝나면 다시 태어나지 않아 죽는 일이 없습니다.

 

혼미할 때는 방황하지만

지혜가 있으면 흔들리지 않고 고요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분명한 앎의 ‘삼빠잔냐’ 에서

접두사 ‘삼’에 관해서 세 번째 ‘삼’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세 번째 ‘삼’은 평등하게 고르게 아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다섯 가지 기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근(五根)입니다.

다섯 가지 기능을 다시 말씀드리면 믿음, 정진, 알아차림, 마음 집중, 지혜입니다.

 

수행자는 이와 같은 오근을 고르게 발전 시켜서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섯 가지의 근기가 다섯 가지의 힘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근이 오력(五力)이 됩니다.

 

오근을 바탕으로 수행을 시작해서 생긴 오력이 수행을 지속시키고 지혜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반드시 먼저 오근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이 오근이 평등하고 고르게 계발되어서 오력이 생겨야 합니다.

이러한 힘이 없으면 수행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오근의 첫째인 믿음은 바른 이해에 바탕을 둔 ‘확신에 찬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둘째, 정진은 굽히지 않는 강한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셋째, 알아차림은 정확하게 대상을 겨냥하고 그리고 그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넷째, 마음 집중은 고요하게 대상에 마음이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다섯째, 지혜는 꿰뚫어 보는 통찰력입니다.

여기서 지혜는 아는 마음이고, 알기 때문에 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혜는 단지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알기 때문에 끊는,

그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서 다시 윤회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 오근(五根)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다섯 가지가 서로 유기적으로 고르게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믿음이 있어야 노력을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이 믿음은 맹목적이지 않은, 확신에 찬 믿음이어야

그에 따른 바른 노력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노력이 없으면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이 있어야 비로소 지속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대상을 겨냥하고 대상에 머무는 것이 전적으로 노력의 힘입니다.

그래서 노력 없이는 알아차릴 수 없고 결코 알아차림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대상을 겨냥할 때 호흡을 세 번 밖에 보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때 노력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노력은 하려고 하는 균형된 의지를 말합니다.

그런 의지 없이는 결코 무엇도 저 스스로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야 비로소 다음 단계로 마음이 집중됩니다.

이렇게 고요한 마음의 집중이 되어야 비로소 마지막에 지혜가 계발됩니다.

그래서 이들 다섯 가지는 평등하고 고르게 균형을 이루면서 계발되어야 합니다.

 

수행은 앞에서 믿음이 이끌고

중간에 노력과 알아차림과 마음 집중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중간에 있는 이 세 가지가 바로 우리가 직접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가 적절하게 기능을 할 때 지혜가 뒤따라 일어납니다.

지혜가 계발되면 이제 이 지혜가 앞에서 믿음과 함께 노력과 알아차림과 마음 집중을 이끕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혜가 알아차림을 이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믿음과 지혜가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의심하지 않고 들뜨지 않고,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수행은 한 가지만 가지고 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신과 물질의 여러 가지 기능이 각각의 역할을 충실히 해서 균형을 이루어야

바르게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수행을 할 때 수행이 잘 안된다고 생각되면 그때,

지금 노력은 분명한가? 지금 알아차림은 분명한가?

지금 마음의 집중은 분명한가? 이 세 가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중 하나의 불균형으로 여러분들의 수행이

장애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분명한 앎이란 정확하게 보고, 모든 것을 전체로서 보고,

모든 정신적 기능들을 고르게 사용해서 본다는 뜻입니다.

다섯 가지 정신적 기능이 균형 있게 작용할 때만이 지혜의 높은 계발이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앎을 지닌다는 것은 수행자가 대상을 겨냥해서 지켜보고,

그것에 대하여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고, 그리고 그것을 철저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모든 정신적 기능들의 균형을 이루면서 보려고 노력한다는 뜻입니다.

 

주석서에서는 네 가지 종류의 ‘분명한 앎’ 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무슨 이익이 있는가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 적절한가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세 번째는 ‘수행자의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네 번째는 ‘어리석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수행자는 몸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를

네 가지 종류의 분명한 앎을 염두에 두고 이해하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앞서 밝힌 네 가지의 분명한 앎은,

분명한 앎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개념적으로 정리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분명한 앎은 과연 수행자가 어떻게 수행을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분명한 앎의 첫 번째는 ‘유용성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무슨 이익이 있는가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을 하기 전에 그것을 하는 것이 유익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면 수행자는 그것을 할 것입니다.

그것이 유익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 수행자는 그것을 하는 것을 피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익을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과연 무엇이 이익인지를 아는 것이 가장 진실한 것입니다.

 

수행자라고 해서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손해만 보아야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바른 이익을 추구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익은 물질적인 이익을 말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혜를 계발하는 정신적 이익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수행자가 수행을 하기에 좋은 장소나 명상원에 가는 것은 유익한 행동입니다.

수행자가 이런 장소에 가서 수행을 하면 선업의 공덕을 쌓는 것으로

적극적인 정신 상태를 기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면 할수록 좋고 유익한 것들입니다.

이런 것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합니다.

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유익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익이 있는가에 대한 첫 번째 분명한 앎’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어떤 행위가 유익하다고 알았을 때라도 수행자는 바로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에 생각할 것은 그것이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알아야 합니다.

유익하다고 하는 것에 눈이 멀면, 바로 그것을 취해서 그는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유익하더라도 그것이 적절한가를 아는 분명한 앎이 함께 필요한 것입니다.

 

유익한 행위라도 때로는 장소와 때에 따라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수행하기에 좋은 장소에 가는 것이 유익하나,

먼 구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는 축제가 있을 때는

그것이 수행자에게는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 때 수행자는 그런 곳에 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곳에 가면 많은 사람들과 많은 사물을 볼 것이고 수행자는 들뜨고 산만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것 자체가 수행에 방해를 줄 것입니다.

 

수행처에 가는 것이 유익하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수행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익을 추구하되 적절한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수행자의 분명한 앎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두 번째 분명한 앎은 ‘시기, 상황, 적절성에 대한 분명한 앎’ 입니다.

법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예를 들면,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야기 하는 사람에게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있고 흥겹게 떠드는 어떤 행사가 진행될 때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또한 스님이 호젓한 곳에서 여인과 함께 있을 때 설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적절한가, 그렇지 않은가를 검토하는 것이 두 번째 분명한 앎입니다.

이것이 ‘무엇이 적절한가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비구 227계 중에서 비구는 결코 여자의 옷깃이나 손을 잡지 않습니다.

그리고 몸을 대지 않습니다. 뿐더러 비구가 여자와 한 방에 있지도 않습니다.

만약 문이 닫힌 방에 비구와 여자가 함께 있다면, 그것을 다른 비구가 발견했을 때

옷을 벗길 수도 있다는 그러한 계율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에 비구 혼자 있는 방에 들어갈 때에는 여자가 다른 사람을 동행하거나,

아니면 문을 열어둔 채로 들어가는 경우를 저는 많이 봤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모든 일에는 알맞은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시간은 흘러가 버리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지금 현재라는 시기와 자신에게 알맞은 상황을 파악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는 일이 적절한 것인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할 때 그것을 놓치면 그 시간에 나쁜 일을 합니다.

그래서 좋은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바로 나쁜 상황을 만들게 됩니다.

그래서 적절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부적절한 일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을 행할 때는 두 가지의 이익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해서 얻는 이익과,

좋은 일을 하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아서 얻는 이익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시기, 상황, 적절함에 대한 분명한 앎’ 을 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 분명한 앎은 ‘대상의 선택,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이것은 수행자의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수행자의 영역이란 호젓한 곳에서 수행을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영역, 또는 자신의 영토에 머무르면

그에게 어떤 해악도 닥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아무도 그를 귀찮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영역을 떠나면 괴롭힘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자신들의 영토,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을 할 수 있는 영역에 살라고 충고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야 될 곳과 가지 말아야 될 곳이 있는 것입니다.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의 실행을 수행자의 영역, 영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이란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의 실천을 뜻합니다.

앞으로 가건, 뒤로 가건, 앞을 보건, 뒤를 돌아보건,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항상 수행을 함으로써 수행자는 자신의 영역, 영토에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이라는 것으로, 바로 이것을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상좌불교는 부처님 이래로 비구 227계를 청정하게 지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전통을 따라서 탁발을 합니다.

사실 비구들이 탁발을 할 때 알아차려야 할 것들이 매우 많습니다.

 

다음 시간에 네 가지 종류의 비구의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