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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21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2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는 저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부질없는 꿈을 꾸지 않습니다.

세상의 영화란 얻지 못해서 괴롭고, 얻으려고 잘못을 저질러서 괴롭고,

얻으면 달아날까봐서 괴롭고, 더 많이 얻고 싶어서 괴롭습니다.

 

제게 주어진 것이면 어떤 것이나 모두 감사하게 여기겠습니다.

그것이 비록 고통이라도 좋습니다.

올 것이 왔다면 결코 피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진정한 꿈은 정법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만나기 어려운 법을 만나는 것이나, 하기 어려운 수행을 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몸을 알아차리는 신념처 수행 중에서 세 번째인

‘분명한 앎’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첫 번째는 들숨과 날숨의 알아차림입니다.

두 번째는 몸의 네 가지 자세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분명한 앎에 대한 알아차림입니다.

 

분명한 앎은 분명한 이해, 또는 바른 이해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또는 주의 깊음, 사려 깊음, 심사숙고, 용의주도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알아차림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항상 분명한 앎을 함께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을 한 뒤에 분명한 앎을 함께 할 때라야

비로소 알아차림이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알아차림을 빨리어로 사띠(sati)라고 하며, 한문으로는 정념(正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앎은 빨리어로 삼빠잔냐라고 하며, 한문으로는 정지(正知)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이란 대상에 마음을 겨냥하는 행위이고,

분명한 앎은 대상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는 항상 같이 있는 것이 좋습니다.

 

알아차림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바늘 가는 곳에 실이 가듯이

분명한 앎도 항상 함께 해야 하겠습니다.

먼저 알아차림에 대해서 잠시 살펴본 뒤에 분명한 앎을 알아보겠습니다.

 

알아차림은 6가지 감각기관과 6가지 감각대상이 부딪혀서 6가지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깨어있는 마음을 일으켜서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무슨 일을 하거나 무심히 하지 않고,

하는 일을 정확하게 알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하는 것을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적당히 관행적으로 할 뿐이지, 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알면서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란 마음이 화살을 쏠 때 대상을 겨냥하듯이

마음이 대상을 겨냥하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계율을 지키며 마음이 청정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위빠사나 수행의 전부이며,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팔만 사천 법문을 하나로 줄이면 ‘알아차림’ 이것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알아차림은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할 때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은 자신의 기호에서 벗어나며

자신의 고정관념에 의한 판단에서 벗어나며 어떤 조건에도 걸리지 않고

단지 있는 그대로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관용으로 대상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비로소 선한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실천을 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바로 이것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다르게 표현하면 팔정도의 정(正)에 해당합니다.

바른 견해는 알아차림이 있는 견해라는 뜻이며,

바른 사유는 알아차림이 있는 겨냥이라는 말입니다.

정어도 알아차림이 있는 말이라는 뜻이며,

정업도 알아차림이 있는 행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팔정도의 나머지 부분도 모두 알아차림이 선행하는 것들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을 정확히 겨냥하고,

겨냥한 곳에 마음을 머물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알아차림의 지속이 없으면 반쪽짜리 알아차림이라서 효과가 크지 않습니다.

조금 알고 말면 고요함과 지혜가 성숙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림이 지속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바로 선입관 없이 보는 것으로,

이것이 통찰지혜를 일으키는 조건입니다.

 

대상을 알아차려야 할 때 알아차리지 못하고 보면

선입관으로 보거나 자신의 기호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할 때 혈연, 지연, 학연, 종교 등등의 선입관이 작용하여

대상을 판단하기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해서 고통을 경험하듯이

수행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볼 때 오직 보는 것에 대해서만 알아차려야 하며

들을 때는 오직 듣는 것에 대해서만 알아차려야 하며

냄새 맡을 때는 오직 냄새 맡는 것에 대해서만 알아차리고

맛을 볼 때는 오직 맛에 대해서만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 보는 것이며

잘못 보는 것으로 인해서 오는 고통을 고스란히 자신이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르게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러한 알아차림은 항상 부족하기 마련이라서

알아차림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분명한 앎입니다.

그래서 바른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두 개의 수레바퀴입니다.

이 두 가지는 새가 하늘을 날 때 서로 분리할 수 없는 두 개의 날개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이 있을 때 분명한 앎이 함께 하며,

분명한 앎이 있을 때 알아차림이 함께 합니다.

 

알아차림이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것이라서

그것 하나로는 수행을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알아차림은 새로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에게는 새싹처럼 취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거나 그것을 유지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알아차림이란 전혀 해보지 않은 새로운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이 함께 할 때만이 힘이 있고

바른 길에서 이탈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은 마음을 대상에 보내서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에서 마음이 달아나지 않고 머물게 하기 위해서

대상을 기억하여 놓치지 않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앎은 마음이 대상에서 달아나지 않고 계속 머문 상태에서

대상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인식하면서 대상을 파악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보조적 수단이 있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분명한 앎은 알아차림과 함께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며,

앞서 말씀드린 네 가지 자세에 대한 알아차림과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몸에 대한 행주좌와를 알아차릴 때 반드시 그 자세만 알아차릴 것이 아니고

이와 같은 분명한 앎을 함께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네 가지 자세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구부리고 펴고 들어 올리고 내려놓고 먹고 마시는 모든 행위를 할 때도

모두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앎은 네 가지 자세에서 더 발전하여

행위를 하는 모든 부분에 있어서 행위를 알아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파악하는 기능까지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분명한 앎은 이러한 것들을 행할 때

그 행위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앎과 적합성에 대한 분명한 앎과

수행의 대상으로서의 분명한 앎과 법의 실재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을 함께 함으로써

좀 더 바른 길을 향해서 효과적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알아차리는 힘은 한계가 있으며,

자신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은 더욱 부족하기 때문에

이러한 분명한 앎이 더욱 풍요한 알아차림을 확립하도록 도울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가 분명한 앎을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실용적인 목적을 실천하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누구나 진리에 대한 관심이 있다고 해도 항상 생각에 그치고 마는데

분명한 앎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수행을 실천해야할 필요성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에 좀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한 앎을 통하여 끊이지 않는 열정을 일으켜야 수행이 지속됩니다.

그러나 열정이 지나치면 그것이 번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균형 있는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 균형 있는 열정이 바로 지혜가 수반된 노력입니다.

 

또 일상생활과 정신의 함양에 대한 단계적인 통합의 필요성 때문에도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이 지식에 그치지 않고 실천적 경험을 통해서 정신을 고양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분명한 앎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분명한 앎을 함으로써 일상의 경험을 통하여 무아를 알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들어서 아는 무아가 아니고, 지식으로 아는 무아가 아니고,

분명한 앎을 통해서 확고한 신념으로 무아를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육체로부터 초연해지기 위한 분명한 앎이 필요합니다.

무아를 알면 자연스럽게 몸에 대한 집착도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앎은 낱낱의 의미를 통합적으로 묶어서 지혜를 향상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알아차림이 대상에 마음을 겨냥하는 단순한 행위라면

분명한 앎은 겨냥을 한 뒤에 여러 가지 이해와 판단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과 분명한 앎이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단순하게 대상을 겨냥하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시시각각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하여 그에 알맞은 대처가 늘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회인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수행자라고 할지라도 생활을 해야 하며 결정을 내려야할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순간은 하루 중에도 수없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알아차림에 의한 바른 판단이 언제나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판단이 바로 분명한 앎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앎이란 바른 알아차림에 의해 생긴 통찰력이 있고

그 다음에 어떤 것이든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분석적 능력이 바로 분명한 앎 중에 하나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러한 분명한 앎을 주석서에서는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다음 시간에 경전 본문을 설명할 때 분명한 앎을 다시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분명한 앎의 종류와 간단한 개요만 설명 드리겠습니다.

 

첫째, 목적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무슨 일을 하거나 목적이 없으면 안 됩니다. 목적은 이상이며 믿음을 갖게 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노력을 할 수가 없어 아무 것도 성사될 수 없습니다.

 

분명한 앎이 없는 목적은 이기적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앎이 있는 목적은 바른 이상입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은 선하지 못한 목적을 세우고

더 열심히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목적을 세울 때에도 분명한 앎이 필요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습관적으로 바라는 부귀영화는 분명한 앎으로 하는 목적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세속의 목적이고 출세간의 목적은 더 높은 고귀한 정신이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분명한 앎으로 세운 목표는 최고의 가치를 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이 어떤 유용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이익이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목적에 대한 분명한 앎입니다.

이것을 또 다른 말로는 유용성(有用性)이라고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도 이익이 있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무엇이 가장 이익인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익에 대한 유용성,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은 겨냥하는 것이고

분명한 앎은 판단에 의해서 알아차림을 돕는 동반자인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