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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24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3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믿음과 노력이 있어야 이상적인 조건이 성숙됩니다.

누구에게나 조건이 성숙되어야 대상이 보이고,

그렇지 않으면 대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보여야 바라는 것을 얻고, 보이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습니다.

알아야 행동을 하고, 알지 못하면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선한 것이 보이면 좋은 것을 얻고, 불선한 것이 보이면 나쁜 것을 얻습니다.

선한 것이 보이면 좋은 의도가 일어나서 좋은 행위를 하여 좋은 결과를 얻습니다.

불선한 것이 보이면 나쁜 의도가 일어나서 나쁜 행위를 하여 나쁜 결과를 얻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는 믿음과 노력이라는 이상적인 조건을 성숙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세 번째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네 종류의 비구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탁발을 나갈 때 수행주제를 마을로 지니고 가나,

수행처로 돌아오면서는 수행 주제를 지니지 않는 비구입니다.

둘째는 수행주제를 지니지 않고 마을로 가나,

마을에서 돌아올 때는 수행 주제를 지니고 오는 비구입니다.

셋째는 마을로 수행 주제를 지니고 가지도 않고,

마을에서 수행처로 올 때도 수행 주제를 지니지 않고 오는 비구입니다.

이것이 가장 나쁜 것입니다.

넷째는 마을로 수행주제를 가지고 가고,

또 수행처로 올 때도 온전하게 그 수행주제를 가지고 오는 비구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탁발을 할 때 알아차리는 상황에 따라

사원에서도 알아차리는 상태가 다릅니다.

실제로 탁발을 할 때 알아차림이 분명하면

사원에 와서 수행을 할 때도 알아차림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이처럼 수행을 할 때 움직이면서 하는 수행은 집중력이 생겼을 때 쉽게 흩어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탁발을 나갈 때 비구들의 네 가지 유형에 대해서 오래된 주석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탁발을 나갈 때 수행 주제를 마을로 지니고 가나 수행처로 돌아오면서

수행 주제를 지니지 않는 첫째 비구는 수행을 하기는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많이 수행을 하지 못합니다.

 

그는 경행과 좌선을 하면서 해가 떠있는 온종일 수행을 합니다.

그러나 밤을 삼등분 했을 때 밤의 두 개의 경에서만 수행을 합니다.

 

비구들은 밤을 세 가지 경으로 나눕니다. 첫째 경, 둘째 경, 셋째 경입니다.

첫째와 셋째 경 동안 비구들은 수행을 하고, 두 번째 경 동안, 한밤중에만 쉽니다.

이렇게 비구들은 해가 떠 있는 온종일과 밤에 두 개의 경 동안 수행을 합니다.

 

이 첫째 비구는 해가 떠 있는 온종일과 밤에 두 개의 경 동안 수행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수행처에서 해야 될 것들, 숙소를 깨끗이 하고,

수행처를 청소하고, 물을 나르는 것 등을 합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알아차려서 하고 얼마동안 좌선을 한 뒤에

탁발을 위해서 마을로 나갑니다.

마을로 갈 때 그는 수행 주제를 지니고 갑니다.

그래서 오른발 왼발의 발걸음과 그리고 탁발을 하는 그 모습 그대로를

전부 알아차리면서 갑니다.

 

마을에 도착한 후 그는 집에서 음식 공양을 받겠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는 거기서 음식을 먹든지, 그것을 발우에 넣어 수행처로 가져오든지 할 수가 있습니다.

 

마을에서 오는 길에 젊은 비구나 사미를 만날 수 있고,

그들은 음식공양을 한 사람에 대해서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는 친척입니까? 등.

 

비구는 그들에게 말을 해야 합니다.

그는 음식공양을 한 사람에 대해서 좋게 말해야합니다.

수행처로 돌아올 때 그는 수행 주제를 지니지 못합니다.

그는 젊은 비구나 사미와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그것을 포기해야합니다.

그러나 수행처에 도착한 후에는 그는 다시 수행을 합니다.

 

그는 수행 주제를 지니고 마을로 가나,

수행처로 돌아오면서 그것을 지니지 않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돌아올 때 다른 비구와 대화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비구는 수행 주제를 지니지 않고 마을로 가나,

돌아올 때는 수행 주제를 지니고 오는 비구입니다.

다시 말하면 갈 때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가나,

돌아올 때는 자기의 발걸음을 알아차리고 오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그도 또한 해가 떠 있는 온종일과 밤의 두 개의 경 동안 수행을 하는 수행자입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수행처에서 해야 될 것들을 합니다.

그 후 얼마동안 좌선을 하고 수행이 끝난 후 탁발을 하기 위해서 마을로 갑니다.

 

그는 아주 좋은 소화력을 가졌습니다.

아침에 그의 위(胃)가 비어있어서 소화를 돕는 열이나 액이 위의 내부를 공격합니다.

위(胃) 안에 약간의 열이나 뜨거움을 느끼면 그는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대상에 머무르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위 안에 열이 있어서 땀을 흘리거나 어지러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양을 받으러 마을에 가는 동안 그는 수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수행을 포기하고 아마 마을로 빨리 갈 것입니다.

 

그리고 음식을 받은 후에 그는 마을에 있는

비구들이 앉은 넓은 방에 도착해서 음식을 좀 먹을 것입니다.

음식을 먹었으니 소화를 돕는 액은 위의 내부 대신에 음식을 공격합니다.

그는 평정을 이룰 수 있고, 비로소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는 음식을 먹을 때 집중 수행을 하는 것처럼,

먹는 행위와 관련된 모든 움직임을 알아차리면서 음식을 먹습니다.

지금 그의 위(胃)에 대해 아주 만족하여 수행의 대상에 더 집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수행자는 음식을 먹은 뒤에 수행 주제를 지닌 채 수행처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비구들이 먹는 동안 깨달음을 체험했다고 주석서에 쓰여 있습니다.

그들은 음식을 먹는 동안 알아차림을 유지했습니다.

그래서 집중 수행동안, 공양시간은 수행을 하는 시간입니다.

공양 중에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런 가르침은 주석서의 여러 군데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비구들이 수행을 할 때 뜨거운 불로 먹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먹고 싶은 욕망으로 먹지 말라는 말입니다.

 

저도 미얀마에서 비구 생활을 할 때 먹는 것에 관한 많은 지적을 받았습니다.

가령 잡채를 흘린다든가, 국물을 많이 뜬다든가,

오래 씹지 않고 꿀꺽 삼킨다든가 하는 문제들을 지적받았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는 것에 관한 지나친 지적에 대해서 다소 불편하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스승께서는 먹는 것이 모두 욕망으로 먹기 때문에

먹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욕망을 제어하는데 가장 좋은 수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먹을 때 욕망을 먹는 것이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단순한 대상으로 알고 필요해서 먹는 것이 수행자의 먹는 방법입니다.

 

주석서에서 말한 세 번째 비구는 조심성 없이 삽니다.

그는 수행에 대한 욕구도 흥미도 없습니다.

그는 수행 같은 것이 있다는 것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단지 먹고 이야기 하고 사람들과 어울립니다.

이런 비구는 수행 주제를 지니지 않고 마을로 가서 탁발을 모으고,

수행 주제를 지니지 않고 수행처로 돌아옵니다.

 

온종일 온밤 그는 수행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는 수행을 해야 하는 의무를 저버렸거나 수행에 대한 흥미를 잃은 비구입니다.

비구는 이렇게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네 번째가 가장 좋은 비구입니다.

그는 마을로 수행 주제를 가지고 갈 뿐만 아니라,

수행 주제를 가지고 마을에서 수행처로 돌아옵니다.

 

그는 마음에 수행을 위한 능력을 잘 키웁니다.

그는 일찍 일어나서 얼마동안 좌선을 합니다.

그리고 그는 수행을 하면서 마을로 가고, 수행을 하면서 탁발을 하고,

수행을 하면서 수행처로 돌아옵니다.

 

그는 해가 떠있는 온종일과 온밤의 두 개의 경 동안을 수행을 합니다.

이런 비구는 주석서에서 말한 네 종류의 비구 중 가장 좋은 비구입니다.

 

그는 마을로 수행 주제를 가져가고 다시 수행처로 가져오는 사람입니다.

그는 항상 수행을 합니다.

 

집중 수행을 할 때 수행자는 이 비구처럼 항상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밤에 잠들 때까지 모든 순간 내내 부지런히 수행을 계속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수행을 할 때에 네 가지 종류의 비구들 중에서

어떤 비구의 유형에 속하는지 항상 스스로 자문해보셔야 하겠습니다.

 

몇 세기 전에 탁발 수행을 하면서 마을로 가고, 수행처로 돌아오는 비구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30명에서 40명, 또는 더 많은 비구들이 함께 살면서

진지하게 수행을 결의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타이르기를

‘우리가 비구가 된 것은 채권자에게 시달리거나, 왕의 처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며,

생계를 해결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윤회에서, 그 많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기 때문에 비구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수행을 해야 된다’고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들은 수행하기로 결정했고,

정신적 번뇌가 일어나면 즉시 그것들을 없애기로 결심했습니다.

 

예를 들면 걷는 동안 정신적 번뇌가 일어났을 때

그들은 바로 걷는 과정에서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했고,

다른 자세로 넘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비구들은 이런 계율을 계속 실천을 했습니다.

 

마음에서 온전하지 않은 생각이나 번뇌를 인지했을 때,

비구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을 성취하지 못하면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들이 걸음을 멈추면 그들 뒤의 다른 비구들도 역시 똑같이 멈추었습니다.

 

이렇게 멈추었을 때 비구들은 자신에게 말을 합니다.

‘다른 스님들도 지금 내가 번뇌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이 번뇌를 없애도록 노력하자.’

그래서 그들은 서서 번뇌를 없애려고 노력했습니다.

 

서있는 동안 번뇌를 없애는데 성공하면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번뇌를 처리하지 못했을 때 그들은 앉았습니다.

그리고 앉아서 그 순간에 그것을 없애려고 노력했습니다.

 

모든 다른 비구들 또한 앉았습니다.

그런 후 그들은 번뇌를 없앨 수 있고,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다고 자신을 타이릅니다.

 

이처럼 비구들은 언제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마을에 갈 때조차 항상 수행 주제를 간직하고 돌아올 때도 수행 주제를 간직해야 합니다.

이처럼 과거의 비구들은 처절한 수행을 했습니다.

물론 요즘 비구들이 단체로 탁발할 때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다음은 네 번째 종류의 비구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하 푸쌋데와’라는 장로가 계셨습니다.

이 스님은 수행 주제를 오고 갈 때 모두 알아차리는 계율을 실천했습니다.

 

이것은 마을을 갈 때에도 수행처로 돌아올 때도 수행을 하면서 걸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19년간 수행을 했습니다.

 

마을로 가면서 또는 돌아오면서 알아차림이 없이 어떤 행동도 하지를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가면서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알아차리지 못한 순간으로 다시 되돌아가서 알아차림을 시작했습니다.

 

알아차림이 없이 넷 또는 다섯 발자국을 갔을 때는

그는 첫 번째 발자국의 장소로 돌아와서 거기서부터 다시 알아차리며 걷는 수행을 했습니다.

 

이 때 들에서 일하는 시골 사람들이 그를 보고,

그가 길을 잃거나 무엇을 잃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스님은 그들에게 어떤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대에 어긋남이 없는 수행을 했습니다.

20년째 되는 해에 그는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수행을 했습니다.

마을로 갈 때 수행 주제를 지니고 가고,

수행 주제를 지니고 수행처로 돌아왔습니다.

 

일반적으로 비구들은 마을로 가면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법에 대한 질문이나 격의 없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해야 합니다.

오직 그때만 필요한 말을 하지 다른 때에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