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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27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4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좋은 일을 했다고 해서 모두 칭찬만 받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일도 하기 나름입니다.

잘못하면 좋은 일을 하고도 오히려 욕을 먹습니다.

 

좋은 일을 할 때 과시를 하거나 독선적으로 하면 오히려 비판을 받습니다.

자신의 욕망대로 하면 남에게 고통을 줍니다.

좋은 일도 나만 좋으면 안 되고, 나도 좋고 남도 좋아야 합니다.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남의 선행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남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좋은 일도 비난을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남의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때 자신의 욕망으로 해서는 안 되며

남의 비난을 받더라도 이것을 겸허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분명한 앎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에

‘대 소변을 볼 때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빠사나에서는 아무 행위도 무시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모든 행위를 알아차립니다.

수행자는 모든 행동들, 두드러지건 사소하건 이것들을 모두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모두 수행에 포함됩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도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적절한 시간에 화장실에 가야하며 적절한 때에 내장을 비워야 합니다.

만약 화장실에서 대 소변을 볼 때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른 행동을 하면

대변을 보는 것이 여의치 않을 수가 있습니다.

혹시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 대변을 본다면

오히려 오래 앉아있는 자세로 인하여 병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때가 되었는데도 대 소변을 보지 않으면 온몸에서 진땀이 나고

눈동자가 돌아가고 마음은 하나로 집중되지 않으며 다른 병이 생깁니다.

때가 되어 용변을 보면 이런 모든 현상들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이익이 바로 이익이 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정해진 장소가 아닌 곳에서 대소변을 보면

계율을 범하게 되고 명예를 훼손하게 되고 생명까지 위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적절한 장소에서 용변을 보는 것이, 이런 모든 결과가 없기 때문에 적당함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적당함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명상 주제를 버리지 않음을 통해서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 ‘자아’라는 어떤 것이 대소변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작용에 생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해서 대소변을 봅니다.

마치 종기가 곪아 터지면 나오려는 욕구 없이도 고름과 피가 흘러나오고,

마치 물동이가 가득차면 나오려는 욕구 없이도 물이 흘러나오듯이

똥과 오줌도 똥집과 오줌보에 모일 때 바람의 힘으로 밀려서

아무런 욕구 없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이처럼 똥과 오줌이 나오지만 그것은 결코 그 비구 자신의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닌, 단지 몸의 배설물일 뿐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이것은 마치 물 항아리로부터 오래 된 물을 퍼낼 때

그것은 퍼내는 자의 것도 아니고 남의 것도 아니요,

단지 청소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숙고함을 통해서, 여기서 미혹하지 않음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시 부처님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가고, 서고, 앉을 때에도,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에도,

말하거나 침묵하고 있을 때에도, 그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한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걸을 때 수행자는 분명한 앎과 수행 주제를 지니면서 걷습니다.

수행주제를 지니고 걷고, 수행주제를 지니고 앉고,

그리고 수행주제를 지니고 잠자리에 들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행동할 때 우리는 바른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졸음이 오면 졸리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잠에 듭니다.

깨어날 때는 깨어나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깨어납니다.

 

수행자 여러분! 시험해 보십시오.

주무시기 전에 바닥에 누워서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아랫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주시합니다.

이 때 희미한 느낌이 오면 희미한 마음을 살펴보시고,

몸에 무거움이 오면 몸의 무거움을 그대로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일어난 즉시 일어난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나고 꺼지는 아랫배의 호흡을 지켜보십시오.

이렇게 모든 상황에서 늘 분명한 앎을 지녀야 합니다.

 

말을 그만 두고 침묵할 때에도 침묵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앎을 해야 합니다.

수행자가 영역에 대한 분명한 앎을 유지하면

어리석음 없음에 대한 분명한 앎이 자동적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이들 행위에는 오직 마음만 있고, 그리고 몸만 있고,

이 두 가지만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려는 의도와 하는 것만 있고,

아무런 존재나 영원한 실체도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분명한 앎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몸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몸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단지 몸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몸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렇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알아차릴 때 수행자는 어느 것도 붙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음 없음에 대한 분명한 앎’을 통해서

수행자는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알게 되고,

집착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집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어느 것도 집착할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야 합니다.

이것이 분명한 앎을 지닌 알아차림이라고 부르는 세 번째 알아차림입니다.

 

주석서의 지속 시간에 따른 세 가지 자세에서 오는 언급이 있습니다.

오래 지속되는 자세, 중간 지속되는 자세, 짧게 지속되는 자세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오래 지속되는 자세는 즉, 가는 것 서는 것, 앉아 있는 것, 누워 있는 것 등을 말합니다.

 

이 절(節)에서 다른 자세는 앞으로 뒤로 가는 것, 앞으로 옆으로 바라보는 것,

구부리고 펴는 것은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중간 지속의 자세라고 말합니다.

 

걷는 것, 서는 것, 앉는 것, 잠드는 것, 깨어나는 것, 말하는 것, 침묵하는 것은

짧게 지속되는 자세입니다.

오랫동안 걷는 것은 첫째 절에 속하고, 짧은 시간에 걷는 것은

이 절(節)에 속한다는 것을 사실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서고 앉는 자세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지속시간에 따른 세 가지 자세가 이 두 절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어떤 자세를 취하든 수행자는 분명한 앎을 지녀야 합니다.

몸의 모든 움직임은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지니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분명한 앎’이라고 말하고, 때로는 ‘알고 있음’이라 말하고,

때로는 ‘지켜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똑같은 마음가짐입니다.

 

대상에 마음을 붙들어 두려고 노력할 때

수행자는 정진과 알아차림과 마음 집중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네 가지 상태를 가능한 한 보존해야 합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할 때 분명한 앎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 ‘철저하게 아는 것’, ‘분명하게 아는 것’,

‘분명하게 보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똑같은 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을 할 때 대상에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려고 노력하고 절대 다른 것을 보지 마십시오.

오직 행동할 때는 행동하는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야 됩니다.

이곳저곳으로 관심이 가면 이미 알아차림을 놓친 분열 현상이 생긴 것입니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겠다고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있는 무엇이든 그것을 알아차릴 때 통찰력은 저절로 나타납니다.

수행자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무엇이든 주목할 때 통찰지혜는 저절로 생깁니다.

 

수행자 여러분!

제가 미얀마에서 비구 생활을 할 때 매일 탁발을 나갔습니다.

우안거 때라서 비가 오면 길이 수렁으로 변해서 걷기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앞서서 탁발을 이끄는 선임비구가 약간 우회해서 길을 걸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모두 앞서서 이끄는 비구를 따라 그 길로 따라 갑니다.

 

어느 날 길이 너무 질척거리고 미끄러웠는데,

선임 비구가 길옆에 있는 작은 개울을 건너 우회하는 길로 탁발 대열을 이끌었습니다.

저도 앞선 비구를 따라가다 작은 대나무 다리를 건넜습니다.

그러다 대나무 끝을 밟았는데 대나무가 우지끈하고 부러져서 소똥물이 흐르는 개울로 빠져 버렸습니다.

 

개울로 떨어진 순간, 대나무 다리 끝을 잘못 밟았다는 부주의를 알았습니다.

그 순간 제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알았습니다.

개울에 떨어졌을 때 그 때까지 받은 밥을 흙탕물에 적시지 않으려고 발우를 번쩍 들어서 위로 올렸습니다.

그러자 탁발 대열이 멈추고 한 비구가 저를 끌어 올리고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저는 대열의 맨 끝에 서서 흙탕물에 젖은 가사를 끌고 갔습니다.

누구도 아무 말 없이 탁발을 계속 했습니다.

그렇게 사원에 돌아온 뒤 누구도 이 일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각자의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날 생겼습니다.

그날 제가 개울에 빠진 이후 다음 날부터 탁발 대열이 전혀 가보지 않은 다른 길로 간 것입니다.

물론 비구가 오지 않던 길이라서 그날 밥을 별로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가 지나가지 않던 길을 갔기 때문에 사람들의 놀라는 표정도 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늦게 뛰어와서 밥 공양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탁발을 하면서 참혹한 심정이었습니다.

제가 빠진 것 때문에 탁발코스를 바꾸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매일 가던 길에서 저희에게 공양을 올리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생각하니 사실 죄스러운 마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수행처에 돌아와서 스승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탁발 코스를 바꾼 것은 어제 제가 개울에 빠졌기 때문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스승께서는, “아니다 마침 바꾸려고 했는데 오늘 바꾸었다.” 라고

저에 대한 고통의 부담을 덜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빠진 것에 대해서 “그 때 비구가 알아차리지 못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가 빠지는 순간 알아차리지 못한 부주의함 때문에 빠진 것을 알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승은 “그래, 너 때문에 코스를 바꿨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바꾸려고 했는데 그냥 오늘 바꾸었다.” 라고 말한 것이 비구들의 정신세계입니다.

 

여러분들! 우리들은 항상 모든 행동을 할 때,

반드시 알아차림이 있는 분명한 앎을 하면서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는 일들이 실수가 많고, 때로는 부상을 당하거나 위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걷는 행동을 하면서 알아차려야 될 많은 대상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수행자들이 그냥 걷는 것이 아닙니다.

오른 발, 왼 발에 마음을 집중해서 기울이면

그 때 어떤 탐욕도, 어떤 성냄도, 어떤 무지도 붙지 않아서

청정한 상태로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는

성스러운 수행자의 자세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걷는 것이 매우 중요한 수행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이것을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