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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28

通達無我法者 2010. 12. 24. 23:4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탐욕이 많은 사람이 수행을 하면 노력은 하지 않고 불평만 합니다.

수행은 새로운 습관을 길들이는 과정이라서 원래가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는 잘 안 되는 것을 알아차려서 받아들이는 수행입니다.

 

누구나 계속해서 노력을 하면 약간의 집중력이 향상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일시적인 현상이며 다시 잘 안 되는 과정이 되풀이됩니다.

청정과 지혜가 성숙될 때마다 새로운 장애가 끊임없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나타나는 장애를 법으로 알아차려야 더 높은 지혜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지혜는 눈에 보이지 않게 성숙하므로 바라는 것 없이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수행의 과정을 바르게 이끄는 힘은 확신에 찬 믿음과 불굴의 노력입니다.

그래서 수행이 잘 안된다고 한탄하지 말고 끊임없는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네 번째인

‘몸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수행’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수행을 한문으로는 염역작의(厭逆作意)라고 합니다.

염역은 싫어하여 거스른다는 말이고, 작의는 스스로 하려는 의도를 내는 것을 말합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는 수행자는 몸의 깨끗하지 못한 것을 알아차리는 수행이라고 해서

이 수행을 부정관(不淨觀)이라고 합니다.

이 수행도 부처님께서 설하신 여러 가지 수행 방법 중의 하나이지만,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자는 단지 이러한 수행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 수행을 하지 않더라도 이 수행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수행을 하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념처경에 있는 여러 가지의 수행방법은 반드시 모두 실천해야 할 기본항목이 있고,

경우에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수행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소개하는 몸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수행은

수행자가 스스로 선택할 수도 있고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수행방법입니다.

 

대념처경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이므로,

부처님 당시에는 이 수행방법으로 수행을 한 비구들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방법으로 수행을 하는 수행자들이 그렇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태국에서 일부 사마타 수행자들이 이 방법으로 수행을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행에 대한 선택은 자신의 선택이라기보다 전적으로 스승에 의한 선택입니다.

수행이란 스승이 어떤 방법으로 수행지도를 하는가에 따라 수행이 다르므로

어떤 스승을 만나느냐에 따라 수행방법이 결정된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부정관(不淨觀)을 한 비구들이 자살을 한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몸에 대한 혐오가 지나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바르게 수행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법으로 수행을 할 때는 경험이 있는 스승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 안전할 것입니다.

무슨 수행을 하거나 스승의 지도 없이는 바르게 갈 수 없지만

특히 이런 부정관 수행의 경우는 더욱 주의가 요구됩니다.

 

몸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수행의 대상은 몸의 32가지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몸을 32가지 기관으로 분해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이 32가지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몸을 이렇게 분석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몸을 왜 이렇게 분석했을까요?

그것은 몸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성품을 알기 위해서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존재로서의 몸은 32가지입니다.

마치 자동차가 수 만 가지의 부속으로 모여서 자동차가 되듯이

우리의 몸도 32가지의 부품들로 모여서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이런 것들의 형성과정을 앎으로써 오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분석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정신과 물질을 5가지로 분류하셨습니다.

그래서 5가지 무더기라는 뜻으로 오온(五蘊)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오온을 각기 더 자세하게 해체하셨는데

이것이 모두 치유에 목적을 둔 분석인 것입니다.

 

무슨 치유인가 하면 정신적 치유입니다.

누구나 자아가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뜻으로 부처님께서 분석을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의 모든 분석은 여기에 기인한다고 아셔야 하겠습니다.

 

수행을 할 때 대상을 단순하게 알아차려야 할 때도 있지만

이처럼 분석을 하는 것은 대상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한 분명한 앎이라고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기서 알아야할 것은 이 몸이 나의 몸이 아니고, 내가 소유하는 몸이 아니고,

단지 여러 가지 기관들의 결합물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몸이 32가지 기관으로 모여 있다는 것을 통해서 이런 지혜가 나야 합니다.

 

바로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무아의 지혜가 납니다.

몸은 마치 자동차처럼 부분들의 결합이지

그것 자체가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몸이 존재로서는 32가지이지만 인식하는 것으로는 느낌입니다.

존재는 관념적인 것이라서 사마타 수행의 대상이고

느낌은 인식하는 것으로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이 부정관 수행은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연계해서 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이 수행을 사마타 수행의 입장에서 보면

몸의 32가지 구성부분을 대상으로 집중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몸의 32가지 구성부분들을 차례로 외워서 일차적으로 집중력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32가지를 부분별로 앞에서 뒤로 다시 뒤에서 앞으로 외우면서 집중력을 키웁니다.

 

수행자 여러분! 현재 한국 명상원에서 좌선을 시작할 때

처음에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음에는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를 차례로 알아차립니다.

그런 뒤에 몸의 주 대상인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여기서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를 차례로 알아차리는 것은 집중을 위한 방편입니다.

마음이 처음부터 하나의 대상에 머물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길들이는 과정에서 이런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방법도 두 가지로 할 수가 있는데 하나는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의 느낌을

약 1분씩 정도만 알아차린 뒤에, 그리고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를 순서대로

몇 번이고 계속해서 반복하여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때는 대상을 순서대로 알아차리기만 합니다.

 

이처럼 좌선을 시작하고 마음이 처음부터 대상을 겨냥하기가 어려워

대상의 위치를 바꿔가면서 알아차림을 지속합니다.

이 두 번째 방법이 바로 몸의 32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과 유사합니다.

이렇게 몇 분 동안 계속하면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고

수행을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집중력이 생깁니다.

 

부정관은 이렇게 집중이 된 상태에서 다음으로 몸에 대한 더러움을 알아차립니다.

몸이 깨끗하지 못한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신을 학대하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몸의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누구나 자아를 가지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고 알기 때문에

몸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고 몸에 대해서 집착합니다.

이것이 바로 유신견입니다.

 

그래서 몸의 더러움을 알아차리면 몸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고

몸의 실재하는 성품을 알게 됩니다.

몸의 더러움을 알아차리는 것은 없는 것을 가상으로 만들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몸의 나의 몸이라고 알면 더불어 마음도 나의 마음이라는 확신이 더욱 강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것이 오히려 괴로움을 더욱 가중시키는 쪽으로 힘을 씁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실 몸은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며칠만 씻지 않아도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악취가 날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갖가지 병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의 더러움을 알아차리는 것은 실재하는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알아야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의 더러움을 알아차리는 것은

자신을 학대하기 위해서 알아차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몸이 가진 진실을 알아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수행을 하려면 적절한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몸의 32가지 부분들을 외워서 집중력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이것들이 가지고 있는 더러움에 대해서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혐오감이 일어나겠지만 집중의 힘으로

이것들이 진실인지를 알아 더욱 더러움이 주는 경멸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실재하는 진실을 알아야 몸에 대해서 초연해질 수가 있으며,

갈애와 집착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단지 몸일 뿐이지 이것이 나의 몸이라는 유신견이 사라질 것이며,

단지 오온일 뿐이지 오온을 집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몸을 오취온이 아닌 단지 오온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몸이 단지 오온일 뿐이지, 오취온이 아니라고 알면 지혜가 나서

괴로움이 사라지고 아라한으로 가는 길이 한결 가까워진 것입니다.

이러한 지혜가 나면 몸으로 인해서 자신이 처한 좋지 않은 상황을 쉽게 극복할 수도 있습니다.

 

가령 병이 났을 때도 쉽게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수행을 할 때에는 마음을 더욱 우울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정확한 알아차림을 항상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울하기보다 이성적으로 더 냉철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수행을 통한 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불교수행의 중요한 갈림길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핵심적 진리는 사성제입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의 일어남이 있다,

괴로움의 소멸이 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사실 불교는 온통 괴로움에 관한 것뿐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괴로움은 불만족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괴로움이란 하찮고 별 볼일 없는 것인데,

우리가 크게 생각해서 문제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괴로움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불교가 오히려 인생을 더 괴롭게 만드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각에 빠지면 염세주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학대하거나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시각으로 보면 불교를 염세주의라고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렇게 괴로운 것이

나라는 유신견으로 보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괴로움이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괴로움이 나의 괴로움이 아니고, 단지 원인과 결과에 의한 불만족이며,

이것은 감각기관이 느낄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하는데

그렇지 못해서 더욱 괴로움에 빠지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있는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보아서 그 괴로움의 원인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괴로움을 보지 않으려고 해서 문제입니다.

사실은 사실대로 알아야 적절한 대처가 나오는 것인데

아예 괴롭지 않으려고만 해서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괴롭지 않으려고 하는 것보다 괴로움이 있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필요한 방법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처음에 연기를 파악하시고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바른 견해를 가진 상태에서 오온을 있는 그대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얻은 것이 바로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시각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있는 그대로의 괴로움을 보셨기 때문에

괴로움의 원인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으며

괴로움의 원인을 알게 되어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에 이르게 되신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