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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34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2:5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과거 생에 있었던 불선업의 과보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으며 그 양을 측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에도 괴로움이 있고 미래에도 괴로움이 상속됩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가짐으로 알아차리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과거에 구속되지 않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할 때는 자신의 욕망과 고정관념을 가지고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은 반드시 법이 요구하는 방법으로 알아차려야만

해탈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신견을 가진 자는 영원히 법의 길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내가 최고라고 여기는 자입니다.

그는 영원히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양의 존재론에서는 철학은 있지만 깨달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인식론에서는

실재하는 요소를 알아서 무상, 고, 무아를 알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다는 지혜가 나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 차이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차이입니다.

이때의 존재가 관념이고 느낌이 실재입니다.

 

관념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신의 이름입니다.

내가 누구라는 것은 부르기 위한 명칭에 불과한데

자신의 이름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깁니다.

자신의 이름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잘못했을 때 자신의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불선행을 해서 불선과보를 받는 것이지

자신의 이름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전통적인 관념에 의해 이름이 더럽혀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문에 이름이나 얼굴도 실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신문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엉덩이를 받치는 깔개로도 쓰이고, 물건을 싸는 포장지로도 쓰이고,

심지어 용변을 본 뒤에 휴지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실재를 알아야 지나치게 관념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것이 관념과 실재의 차이입니다.

 

관념의 또 다른 경우는 마음을 비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비운다고 했을 때 이 말이 무슨 말인지는 누구나 압니다.

탐욕을 갖지 말고 청정한 마음을 가지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마음을 비우면 죽습니다.

마음은 몸과 함께 항상 있어야 합니다.

만약 상징적으로라도 마음을 비운다면 그 순간에 죽는 것입니다.

 

좀 더 이 말을 이해하는 측면에서 보면

마음을 비우면 빈 집에 번뇌라는 도둑이 들어와서 주인행세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항상 알아차리는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런 것이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관념적 견해인 것입니다.

실재를 추구하는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예를 들어도 이런 예를 들지 않습니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실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은 마음을 비우라는 말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이런 표현이 관념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통증이라고 할 때도 통증은 아픔으로 표현하는 명칭입니다.

그래서 통증은 관념입니다.

그러나 통증의 실재는 찌르고, 화끈거리고, 쑤시고, 당기는 느낌입니다.

통증이라고 하면 육체적 느낌에서 무조건 정신적 느낌으로 발전하여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통증의 실재인 찌르고, 당기는 느낌을 알아차리면

단지 육체적인 느낌의 상태라서 괴로움이 그렇게 크지는 않습니다.

 

통증이 생겼을 때 통증을 알아차릴 것이 아니고 통증 속으로 들어가서

통증의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리면 그것은 지켜볼만 한 것입니다.

 

수행자가 절을 할 때도 100배나 1,000배를 한다고 할 때도

몇 배를 해야 한다는 숫자를 채우기 위해서 하면 사마타 수행으로,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그런 횟수에 상관없이 절을 할 때 절을 하려고 하는 의도와

구부릴 때의 몸의 느낌, 천천히 몸을 구부리면서 손을 바닥에 대고 절을 하는 느낌을

하나하나 알아차리면 이것은 실재를 알아차리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같은 절을 하더라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절을 한다는 사실에 집중하면

관념적인 사마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절을 할 때의 의도와 몸의 느낌을 알아차리면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임으로

이러한 차이가 관념과 실재의 차이이며

이것으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이 구별되는 것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무엇을 성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하며 선정의 고요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바라는 것 없이 그냥 하는 수행이라서 지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자는 100배를 한다거나 1,000배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절을 하면서 실재하는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기 때문에

어떤 성취를 하고자 절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나타난 현상을 그냥 지켜보고 대상의 성품을 아는 수행이라서

무엇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관념과 실재의 차이이며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현재 자신의 상태에 따라서 필요한 것을 선택하여

적절하게 수행을 하면 유익할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수행이 되었거나 현재 자기 자신의 상태에 맞는

수행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은 근접 집중으로 시작해서

근본 집중에 이르러 고요함을 얻습니다.

대상이 관념이기 때문에 고유한 특성이 없어 몰입하기에 좋습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수행입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나타나는 많은 장애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의 대상에 깊게 몰입합니다.

그래서 번뇌를 억누르는 효과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색계 4선정과 무색계 4선정의 수행이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을 하면 집중의 힘이 커져서 때로는 신통한 힘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수행으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도과를 성취해야 궁극의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은 찰나집중으로 수행을 하기 때문에 지혜를 얻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릴 대상의 고유한 특성이 있는 느낌이기 때문에 대상에 깊게 몰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생겨 자연스럽게 지혜가 납니다.

 

처음부터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 수행이 아니고

수행방법의 자연스러움으로 지혜가 나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하는 수행이 아니고

장애가 나타난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번뇌를 억누르지 않고 번뇌를 말립니다.

번뇌는 억누르면 언젠가는 억누른 만큼의 반발력이 생기지만

번뇌를 말리면 반발력이 없이 자연스럽게 번뇌가 소멸합니다.

이것이 두 가지 수행의 차이점입니다.

 

둘째, 실재에 대한 것입니다.

 

실재(實在)는 사실에 의하여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관념의 반대로서 실재라고 하지만,

빨리어로는 더 큰 뜻이 담겨있는 빠라마타(paramattha)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빨리어 빠라마타는 최고의 의미라는 뜻입니다.

한문으로는 최승의(最勝義), 승의(勝義)라고 하며, 이것을 궁극적 진리,

진제(眞諦), 실재, 성품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최고의 의미나, 최승의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을 통해서 궁극의 깨달음을 얻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재하는 법을 통찰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알아야한다고

전제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학문적으로는 관념과 실재에 대한 문제가 그렇게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실천하는 수행자에게는 이 관념과 실재의 문제가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넘어야할 산이고 건너야할 강입니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 어리석게 살고 있다면 바로 실재하는 진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빠라마타는 실재하는 것, 자연적인 것, 자연적인 것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빠라마타 담마(paramattha dhamma)라고 하면 근본법, 최승의법이라고 하여

궁극적 실재의 세계를 말합니다.

 

요약하자면 이 실재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법이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법이기 때문에 최고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적인 것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아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진리라는 것은 일의 이치가 마지막까지 다다른 진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도과를 성취하여 열반에 이르기 때문에 최고의 진리, 또는 최상의 지혜라고 합니다.

 

궁극의 진리는 관념이 아닌 실재이기 때문에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몸에서는 지수화풍이란 4대의 요소가 있으며

마음에는 실재하는 여러 가지의 선심과 불선심이 있습니다.

이러한 실재를 법이라고 합니다.

 

알아차릴 대상으로써의 법과 그것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로써의 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나’라거나 ‘너’라고 하는 개념으로 보지 않고,

지수화풍과 이것에서 파생된 요소로 봅니다.

 

관념이 배격된 실재는 인간의 정신과 물질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그래서 탐욕, 성냄, 어리석음 없이, 과장되거나, 왜곡되거나, 허례허식 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재를 보면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된다는 것과

존재하는 것들의 특성인 무상, 고, 무아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런 법은 오직 실재하는 진실 속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재하는 진실은 자신의 정신과 물질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근본법의 세계는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그 실재가 바로 정신과 물질입니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실재입니다.

 

눈으로 대상을 볼 때는 보이는 세계가 있으며,

귀로 소리를 들을 때는 소리의 세계가 있습니다.

코로 냄새를 맡을 때는 냄새의 세계가 있습니다.

혀로 맛을 볼 때는 맛의 세계가 있습니다.

피부로 접촉을 할 때는 접촉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하나의 작은 세계이면서 전부를 아우르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두 진실입니다.

이처럼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부딪히는 것은 모두 실재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세계라고 해서 모두 실재는 아닙니다.

보이는 과정에서 관념과 실재가 구별됩니다.

여기에 책상이 있습니다.

이때의 책상은 명칭이며 모양입니다.

그래서 책상이라고 할 때는 부르기 위한 명칭이고 모양이라서 관념입니다.

그러나 책상을 만져서 딱딱하다, 차갑다, 무겁다, 라고 할 때는 실재입니다.

 

모양으로써의 책상도 분명하게 있지만

실재하는 것은 딱딱하다, 차갑다, 무겁다, 라고 하는 성품이 있는 것입니다.

이때 책상은 존재이고 이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실재입니다.

 

책상을 만져서 단단한 것을 느꼈을 때 만진 대상인 책상은 근본법이 아닙니다.

책상은 단지 감촉의 대상입니다.

이때 딱딱하다는 촉감이 바로 근본법입니다.

 

여기서 딱딱하기 때문에 괴롭다고 여긴다면,

단단한 것은 물질적 현상이고 괴롭다는 것은 정신적 현상입니다.

이렇게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부딪쳤을 때 어리석음으로 인해

여러 가지의 불선심과 불선행이 함께 일어납니다.

 

우리가 살면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 대상과 부딪쳐서

여섯 가지의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이것은 실재이지만

이 실재가 그대로 존속하지는 않습니다.

 

부딪치면서 느낌이 일어나고 이 느낌은 좋거나 싫은 느낌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실재를 보는 것이 아니고

고정관념으로 보기 때문에 새로운 감정을 유입시켜 자기화합니다.

그래서 즉시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면 진실을 왜곡하여 살아온 습성대로 살아 고통뿐인 윤회를 거듭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볼 때 보이는 것의 진실은 보는 순간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마음은 시간처럼 빠르게 흐르기 때문에,

보는 마음이 일어난 순간에 사라지므로 보이는 것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무상합니다.

 

수행자가 실재를 본다는 것은 이런 단계에 이르러

보는 대상이나, 듣는 대상이나, 냄새나 맛이나 접촉하는 것이나

모두 순간적으로 일어나서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바른 성품을 보는 것이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묘원법사 :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