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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35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2:5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괴로움은 불만족입니다.

누구나 항상 만족할 수만 없기 때문에 괴롭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괴로움을 알지 못하면

아직 지혜가 성숙되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그 행복은 순간 적인 것이며

감각적 쾌락이라서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자신의 고통이 싫어서 생각하지 않으려고 피하면 괴롭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괴로움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괴로움이란 두려움과 불안함,

그리고 들뜸과 후회와 의심을 모두 포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괴롭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괴로움을 피하려하지 말고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괴로움은 단지 하나의 대상일 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만이 집착이 끊어져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소멸합니다.

이러한 법은 실재에 속하는 것에서만 나타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최고의 깨달음으로 가기 때문에

궁극의 진리이고, 최승의법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최종 목표에 도달하는 것의 출발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대상과 접촉할 때 실재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발은 이렇게 매우 단순한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해 보여도 이렇게 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어려운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관념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실재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출세간의 시각으로 보면 이렇게 실재하는 법의 바른 성품을 볼 수 없는 것을 무지라고 합니다.

오랜 세월 동안 관념으로만 살아왔다면 삿된 견해로 대상을 본 것이며

이것이 무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는 반드시 괴로움을 줍니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법의 참된 성품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움이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범부의 괴로움입니다.

 

무상을 알면 원래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서

무상이 주는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죽음까지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누구나 어차피 죽어야 합니다.

단지 늦고 빠르고의 문제밖에 없는 것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죽음을 준비해야합니다.

 

무상, 고, 무아라는 궁극의 실재는 도과를 성취한 성자들이 본 세계입니다.

누구나 무상, 고, 무아를 알 수가 있지만

이 법을 완전하게 보는 정도에 따라서 성자의 지위도 다릅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 수행자보다는

사다함의 도과를 얻은 수행자가 무상, 고, 무아를 더 자세히 본 것이며

사다함보다는 아나함이 더 자세하게 법을 보아서 성취한 것입니다.

아라한은 완전하게 무상, 고, 무아를 통찰했습니다.

그래서 이 궁극의 법을 성자들이 본 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수다원의 도과를 얻었다고 해서 그 지혜의 상태가 항상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다원이란 수다원의 정신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수다원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완성된 아라한이 아니면 수행을 해서 그런 정신적 상태가 있을 때만이

궁극적 실재를 압니다.

하지만 아라한은 이미 완전하게 모든 번뇌를 소멸시켰기 때문에

항상 같은 지혜가 유지됩니다.

 

우리는 통찰지혜가 아닌 겉으로 드러난 이 세상의 이치를 보고도

무상이나 괴로움이나 무아를 알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서 진리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찰지혜를 통해서 본 것과 세상의 이치를 보고 느낀 것은

정신적인 앎은 같으나 사물의 실재하는 참된 성품을 깨닫는 데는 확연하게 다릅니다.

 

하나는 통찰지혜로 안 것이라서 열반에 이르지만

하나는 관념에 그친 것이라서 사유에 그치고 맙니다.

이것이 관념과 실재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왜 이런 차이가 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에 드러난 것으로 본 지혜로도 무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내가 있다는 유신견을 전제로 본 것이라서 대상의 참 성품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상의 참 성품이 바로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를 가지고 보는 한 영원히 표피적이거나 관념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신과 물질이 있지만 이것이 나의 몸과 마음이 아니고

그 순간순간의 몸과 마음이라고 알지 못하는 한 대상의 완전한 성품을 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법의 바른 성품을 보지 못하는 한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가 실재를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정신과 물질을 대상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재라는 것은 자신의 정신과 물질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신과 물질을 가지고 탐욕, 성냄, 어리석을 일으켰기 때문에

불선업을 일으키게 한 정신과 물질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렸을 때 실재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말씀드린 궁극적 진리는 다음 4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마음입니다.

둘째, 마음의 작용입니다.

셋째, 물질입니다.

넷째, 열반입니다.

이상 4가지가 최승의법이며

깨달음으로 가는 실재인 궁극적 진리인 것입니다.

 

첫째는 오온 중에서 식이라고 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오온 중에서 수, 상, 행이라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셋째는 오온 중에서 색이라고 하는 몸입니다.

 

그래서 첫째부터 셋째까지가 모두 오온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번뇌가 불타버려서 도과를 성취하는 열반입니다.

 

그래서 첫째부터 셋째까지는 원인과 결과가 있는 세속의 세계이고,

넷째는 원인과 결과가 끝난 출세간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오온을 가지고 있는 생명이 열반에 이르는 것으로

궁극의 진리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극의 진리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세속과

몸과 마음이 끝난 열반인 출세간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잠시 숨을 고르고 숙고해 봐야 하겠습니다.

최고의 진리라고 하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다름 아닌 오온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말씀드린 몸과 마음의 중요성이 비로소 여기서 드러난 것입니다.

또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몸과 마음인 것도 여기서 밝혀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최고의 지혜라고 하는 무상, 고, 무아도 특별한 것이 아니고

누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반적 특성이고,

또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특성이라는 사실도 이미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최고의 법이라는 것이 오온과 열반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그렇게 경이롭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라고 하면 상상하기 힘들고 심오하고 그런 엄청난 것 인줄 알겠지만

사실은 한 인간의 마음과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몸과 마음의 실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열반에 이르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처럼 몰랐을 때는 진리가 특별한 것이고,

누구나 알기가 어려운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실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관념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알아차려서

열반에 이른다는 것은 매우 단순한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먼 곳에 있지 않고 항상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몸과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진실을 다시 한 번 깊게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이상의 4가지 중에서 마음과 마음의 작용과 물질은

오온으로 원인과 결과가 있는 법이라고 해서 유위법이라고 합니다.

유위법은 이미 형성된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열반은 무위법이라고 하는데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열반은 오온에 해당되지 않고 오온을 통찰해서 얻는 궁극의 해탈에 이르는 경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궁극적 진리에 속하는 생명은 인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하는 31계의 세계에 사는 모든 생명이 공히 포함됩니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조건이 성숙되면

누구나 열반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궁극의 진리는 한정된 생명에게만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난 가장 큰 사명감은 수행을 해서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은 인간만 열반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궁극의 진리 중에서 첫 번째부터 세 번째까지는

오온을 가지고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가 있고

그래서 번뇌가 있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선심과 불선심이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선과보심과 불선과보심도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유위법이라고 합니다.

또 번뇌에 얽매인 속세의 범부라는 뜻으로 유루(有漏)라고 합니다.

 

유위법은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무상합니다.

그리고 고가 있고, 무아가 있습니다.

 

그러나 열반의 마음은 무인작용심이라서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마음입니다.

열반은 원인가 결과가 끊어졌기 때문에

조건 지어지지 않은 단 하나의 근본법이므로 무위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윤회가 끝납니다.

 

무인작용심은 아라한과 부처의 마음입니다.

무인작용심은 단지 작용만 할 뿐이지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마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래서 세속의 번뇌가 끊어진 성자의 마음이라서 무루(無漏)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오온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생멸의 유위법을 경험해야 무위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유위법을 경험하지 못하면 결코 무위법인 열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온의 법 없이는 열반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오온을 알아차려서 유위법을 아는 지혜가 나야

비로소 무위법의 지혜가 날 수 있습니다.

 

원인과 결과가 끊어져서 번뇌가 사라진 무인작용심이 바로 부처님의 마음이라서

이것을 불성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마음은 선하거나 선하지 못한 두 가지 마음과 함께 선과보와 불선과보가

모두 불타버린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선하다고 할 때는 반드시 선하지 못한 마음이 함께 하기 마련이지만

부처님의 마음은 이런 것에서 완전하게 벗어난 모두 선한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관념과 실재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누구나 모르는 채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통찰지혜가 나지 않는 한 자신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모르는 것에는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단지 모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면

불선의 과보가 더 큽니다.

 

모를 때는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아는 지혜입니다.

누구나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허물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알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르면서도 아는 척하면 이것은 큰 허물이 됩니다.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진실을 모르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우리는 욕망이 자신을 사망하게 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지혜가 자신을 살리는 것을 모릅니다.

인색과 후회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 관용과 보시가 자기를 즐겁게 하는 것을 모릅니다.

 

모르면 모르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고,

알면 아는 것을 좋아하여 집착을 합니다.

 

모르면 불선을 좋아하여 선을 멀리하고

자신을 더욱 가혹한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태어난 가장 소중한 사명은

무지에서 벗어나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제시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무지에서 벗어나서 지혜를 알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