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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36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2:56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마음이 자아가 아니고 무아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아직은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직 괴로움이 있다면 내가 있다고 하는

유신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인 유신견이 소멸되려면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해야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일시적인 소멸에 불과합니다.

 

바라는 마음이 끊어진 아라한이 되어야

비로소 유신견이 완전하게 소멸되어 드높은 행복을 얻습니다.

 

이처럼 내가 소멸되어 어리석음과 갈애가 끊어졌을 때라야

열반에 이르며 바로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어리석음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리석음은 나의 어리석음을 보지 못하고

남의 어리석음을 보는 것입니다.

 

고요해야 할 곳에서

흔들리는 마음이 일어난 것이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관용이 일어나야 할 곳에서

탐욕이 일어난 것이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대상의 실재를 보지 않고

대상을 관념으로 보는 것이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고

갖지 말아야 할 것을 갖는 것이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지혜가 열리면

어리석음을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마치 어둠에서 밝음이 오듯이 그렇게 사라집니다.

 

무지해서 잘못된 견해가 생기지만

무지와 잘못된 견해는 서로 내용이 다릅니다.

 

무지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지만

사견은 자아가 있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무지는 실재를 모르는 것이지만

사견은 관념이 나라고 압니다.

 

사견은 변하는 것을 영원한 것으로 알고,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알고,

무아를 자아로 알고,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압니다.

 

무지는 단지 모르는 것에 그치지만

사견은 무지보다 더 깊은 병에 걸린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지혜가 나면 그만이지만

사견은 지혜가 날 수가 없어서 바뀌지가 않습니다.

 

결국 내가 있다는 사견으로 인해서 불선심이 일어나고

불선행을 하여 사악도에 떨어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리석음 조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가장 큰 무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신견이라고 하는 사견입니다.

 

유신견은 잘못된 견해라서 사견(邪見)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신견은 몸과 마음이 나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몸과 마음을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견해는 자아가 있다는 유신견과

몸과 마음이 항상 하다는 상견과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하는 단견이 있습니다.

 

이중에 유신견이 사견을 이끄는 강력한 견해입니다.

 

몸이 있다는 뜻에서 유신(有身)은 진실이지만

이 몸이 나의 몸이라고 하는 유신견(有身見)은 잘못된 견해이고

이 견해로 인해 다른 잘못된 견해까지 생깁니다.

 

12연기를 돌게 하여 윤회를 계속하게 하는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로서 이것이 연기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연기는 무명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사실은 무명은 시작에 불과할 뿐

이 무명을 뒤에서 조정하는 것이 바로 유신견입니다.

유신견은 가장 깊은 곳에서 모든 불선업을 조장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고통과 슬픔의 직접원인이 유신견입니다.

그래서 내가 있다고 하는 생각이 있는 곳에 항상 불화와 고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고통을 겪을 때 즉시 무엇 때문인지 보십시오.

거기에는 나와 나의 것이라는 유신견이 반드시 도사리고 있을 것입니다.

 

무명의 상태에서는 언젠가 윤회에서 벗어날 수도 있지만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몸, 내 마음이 내 것이라는 사견으로 인해서

자신의 모든 불행이 만들어지고 행복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무아라는 법이

인류사에 가장 위대한 진실인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몰라서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무명에 눈이 먼 사람이고,

알면서도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무명에서 깨어나는 것도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며

믿음을 갖는 것도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무명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하며,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해야 합니다.

 

경전을 읽고 법문을 들어서 생긴 믿음으로

스승이 가르침을 따라 수행을 하면 차츰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무관심이 무지입니다.

수행은 누구나 똑같이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진실을 알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모른다고 포기하지 말고 몰라도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듣고, 읽고, 수행을 하면 조금씩 알게 됩니다.

 

수행이 복잡하다고 스스로 포기해서 더 어려운 것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해서 복잡한 것이지 사실 대상은 하나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단지 자신이 그렇게 판단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많이 알려고 하지 말고

아는 만큼 만족하고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모른다고 포기하면 영원히 기회가 오지 않지만

몰라도 알려고 노력하면 결국에는 지혜를 얻습니다.

 

무관심은 게으름으로 인해 노력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찮아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깊은 무지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을 할 때는 대상이 가지고 있는 법을 따르십시오.

그렇지 않고 나의 법을 우선하면 대상과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어리석으면 무지에 속하는 덤덤한 느낌의 상태로 지냅니다.

이와 같은 덤덤한 느낌일 때 감각적 욕망, 악한 의도, 혼침과 게으름,

들뜸과 후회, 회의적 의심이라는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모르면 모르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다섯 가지 장애를 일으키고

이것에 대처할 수가 없어서 불선업을 짓거나 수행을 포기합니다.

 

이런 장애는 지혜가 없고 무지해서 일어나므로

반드시 지혜를 얻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통찰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무지로 인해서 일어나는 들뜸, 흥분, 산만함은 불선심과 함께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러한 마음이 일어나면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들뜨고 흥분한 상태에서는 알아차림이 없습니다.

알아차림은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선심에서만 일어납니다.

 

관용과 보시와 지계와 수행에서는 알아차림이 있지만

불선심에서는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먼저 이런 마음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그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치유의 효과가 있습니다.

 

어리석음과 함께 일어나는 들뜸이란

유익하고 바람직한 것에 대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기에는 들뜸이

안전부절하는 불안한 상태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안절부절 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며

여기서 말하는 들뜸과는 다릅니다.

 

들뜸이란 소리를 들을 때 그냥 소리로 듣지 않고

이 소리가 나의 수행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듣기 싫어하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런 들뜸으로 인해 화를 냅니다.

 

우리가 소리를 들을 때도 소리를 접수하여 듣는 과정이 있고,

다음에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반응을 보이고,

그 다음에 좋아서 집착하거나 싫어서 화를 내는 등의

일련의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러므로 어느 과정에서나 알아차려야 하며,

다시 그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들뜸은 아라한이 되어야 소멸하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날 때마다 들떠 있는 것을 차려야 합니다.

 

다음은 의심에 관한 것입니다.

어리석음과 함께 일어나는 의심은 불확실함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주저함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회의적 의심은 바르게 알고자 하는 것을 배제합니다.

 

그래서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도

확실하지 못한 상태에서 망설이는 것을 회의적 의심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의심은 정신적으로 혼란한 상태에서 방황하기 때문에

사물을 파악하는데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심은 합리적이지 못하고 체계적이지 못한 마음이 바로 원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심이 있을 때는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수행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의심은 반드시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말룽끼야뿟따라는 비구가 부처님께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질문을 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질문들을 합니다.

그래서 모두 관념적인 것에 사로잡혀 있고 실재는 모르는 상태로 질문을 합니다.

 

의심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실 정신세계에서 바른 질문을 한다는 것은 얼마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이 비구도 부처님의 법은 오직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것에

맞추어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현대에도 누구나 이런 의문을 갖고 이런 질문을 똑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말릉끼야뿟따의 질문을 들어보시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홀로 명상을 하다가 마음에 이와 같은 생각이 일어났습니다.

여래께서는 이와 같은 사변적인 견해들에 대해 답변하지 않고 제쳐두고 버려두셨습니다.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상은 유한다든가,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다르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든가,

여래께서는 이러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못마땅하고, 나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아가 그 의미를 여쭈어보아야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룽끼야뿟따라는 비구는 이렇게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씀드리고

만약 이 질문에 대답을 해주시면

세존 밑에서 청정한 삶을 영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으시면

배움을 포기하고 세속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이 생각한 것을 직접 하나하나씩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상 질문한 것을 부처님께서 알지 못한다면

알지 못한다고 답변을 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말룽끼야뿟따여, 내가 그대에게

‘말룽끼야뿟따여, 와서 내 밑에서 청정한 삶을 영위하라.

나는 그대에게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상은 유한다든가,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같다든가, 영혼은 육체와 다르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든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든가,

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할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그러자 말룽끼야뿟따 비구가 대답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에게 이러한 답변을 듣고자 한다면

그 사람은 대답을 못들은 채 이러한 문제와 더불어 죽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말룽끼야뿟따여, 어떤 사람이 독이 많이 묻은 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의 친구들이나 동료들이나 친지들이나 친척들이 와서 그를 의사에게 데리고 갔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나는 나를 쏜 사람이 왕족계층인지, 사제계층인지,

평민인지, 노예인지 알아야 화살을 뽑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