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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49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3:2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믿음은 바른 마음에서 나오는 청정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믿으면 맹신에 빠지므로 위험합니다.

 

맹신은 눈을 멀게 하는 어리석음이며 선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이런 믿음은 자신의 복을 기원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복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지 누구도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린 뒤에 충분히 납득했을 때

확신에 찬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선한 원인을 만드는 것밖에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서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이라는

3가지의 균형이 적절해지면 몸의 느낌이 다시 강해집니다.

그러면 다시 전면의 마음자리로 와서 대상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전면에서 알아차리는 것과 몸에서 알아차리는 것을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심념처와 수념처와 신념처를 고루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수행을 하는 것이 바로 법념처입니다.

 

이처럼 전면에서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힘이 약해지면

다시 몸으로 와서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런 뒤에 다시 전면으로 가서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은

하나의 방편에 속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대상의 위치를 전환하는 것도 새로운 마음을 갖기에 좋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지루함을 덜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떤 수행이나 항상 문제가 있기 마련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도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다보면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알아차림이 점점 약해질 수 있는 단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집중의 힘이 커져서 졸음에 빠질 수 있습니다.

대상의 느낌을 실제 하는 곳에서 알아차리지 않고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리면 대상이 점점 희미해질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것을 집중이라고 하는데

집중이 되면 자연스럽게 알아차림을 약해지고

집중의 힘이 커져서 결국에는 졸음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가

다음 단계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지켜보아 집중력의 힘이 커져서

졸음에 떨어지지 않고 알아차림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한 뒤에 이런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보완하는 차원의 수행방법이었습니다.

 

어떤 수행이나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때마다 새로운 방편을 마련하는 것이 스승들의 몫입니다.

스승들의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수행자는 보다 안전한 길로 법을 향해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계속하고 있을 때

사야도께서는 이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다음 단계의 주제를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이 말이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 않아 헤맬 수밖에 없었습니다.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니 이런저런 방법을 다 사용해서 수행을 해도

사야도께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니 답답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가 한 때는 화두가 되어서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여러 곳에서 통역을 해 주신

한 지인의 도움을 받아서 뜻으로나마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쉐우민에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하는 말이나

마하시 명상원에서 앎을 하라고 하는 말이 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느 날 통역을 해주시는 한 분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분께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가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해 줄 것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쉐우민에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라고 하는 것과

마하시 명상원에서 ‘앎’이라고 하는 것이 같은 말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쉐우민에 오기 전에 마하시 명상원에서 수행할 때도

‘앎’의 문제에 대하여 의문을 풀 수 없어서 제가 상기까지 와서

고생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 말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 뒤에 마하시에서 결국은 상기를 해결했던 터라

뜻밖의 사실에 놀라움과 반가움이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다시 앎에 걸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냥 ‘앎’을 하라고 할 때와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라고 할 때

이것이 같은 말이지만 내용이 다른 것 인줄 알고 고생을 했던 것입니다.

 

마하시 명상원에서 수행을 할 때는 ‘앎’을 하라고 합니다.

이때의 앎은 아는 마음입니다.

이때의 앎은 2가지 뜻으로 사용합니다.

 

첫째, 대상을 아는 앎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이 잘 안될 때는 잘 안 되는 것을 아는 앎입니다.

수행이 잘 될 때는 잘 되는 것을 아는 앎을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미워하는 것은 아는 앎을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났을 때는 화가 난 것을 아는 앎을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거나 일하고 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둘째, 호흡의 느낌과 몸의 느낌과 그리고 몸에 있는 호흡이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을 때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아는 앎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몸의 느낌이 완전하게 사라져서

더 이상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때 남아있는 것은 마음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방법이 바로 ‘앎’입니다.

이 앎이 아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앎이라고 할 때는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의 준말인 것입니다.

 

마하시 명상원에서도 이상의 2가지 수행을 지도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하시라고 해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만 하는 곳이 아니고

신수심법 사념처를 모두 수행하는 곳입니다.

 

다만 쉐우민처럼 집중적으로 마음을 말하지 않을 뿐이지

어느 명상원에서나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면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하겠습니다.

 

통역을 해주시는 지인에게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와 ‘앎’이 어떻게 다른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명상원에서 사용하는 표현이 다를 뿐이지 같은 말이라는 것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인께서는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란

‘노팅(noting)하는 것을 위칭(watching)’하는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영어로 노트(note)는 주의하다, 주목하다는 뜻이고 워치(watch)는 지켜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알아차리는 것을 다시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제야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와 ‘앎’의 분명한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불분명했던 말의 뜻이 한순간에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때로는 영어가 의미전달을 하는데 간결하게 뜻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알아차리는 것을 다시 지켜보기 위해서는 알아차리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는 대상을 붙잡기도 어려운 상태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쉐우민에서도 일정기간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 뒤에

다음 단계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단계적 과정을 거치는 것입니다.

수행을 시작한 뒤에 지금 여기에 있는 몸을 대상으로 하나하나 알아차려서

집중의 힘을 키우면 차츰 그 단계의 지혜가 성숙합니다.

그러면 다시 다음 단계의 지혜를 위해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의 바른 과정입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에 대한 보다 명쾌한 이해는

그 뒤에 쉐우민 사야도를 친견하고 확립할 수 있었습니다.

쉐우민에서 몇 년 동안 수행을 한 뒤에

마지막으로 쉐우민 사야도를 친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쉐우민 사야도께 말씀드린 질문내용과 사야도의 답변입니다.

 

제가 사야도께 말씀드렸습니다.

“호흡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사야도께서는

“아니다. 호흡이 사라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닙니다. 몸의 느낌도 사라지고 호흡도 사라져서 아무 것도 알아차릴 것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저를 쳐다보신 뒤에

“그런가, 그러면 이제 아는 아음을 알아차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가

“아는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립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야도께서는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즉시 제가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그랬더니 사야도께서는

“마음을 새로 내라.”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사야도의 말씀은 마음에 대한 가장 간결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음이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는 표현밖에 몰랐는데,

이 말은 마음을 한 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매우 간결하고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사야도의 이 말씀을 들은 뒤에 비로소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알아차려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것과,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새로 낸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하여 마음에 대한 이해가 분명한 이해가 생겼던 것입니다.

마치 구름이 걷히고 달을 보듯이, 마음에 대한 뚜렷한 대상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

이 2가지 마음은 같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과정에서 입체적 현상이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유체이탈이라고 하는 것도 마음이 몸을 떠날 수 없지만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입체적 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평소에 집중이 될 때는

위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입체적인 인식이 가능한 것이

매순간 마음이 새로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이 마음을 분리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여기에 있는 마음은 앞에 있는 마음이고,

뒤에서 지켜보는 마음은 나중에 생긴 마음입니다.

그래서 시간적 공간적 형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죽기 전에는 절대 마음이 몸 밖으로 나갈 수는 없기 때문에

이 문제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 위에서나 또는 뒤에서나 또는 옆에서나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바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 우리가 이것을 행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집중의 힘이 생긴 상태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이런 현상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중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만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이미 경험한 것들입니다.

 

부처님께서 펴신 법문은 이미 우리가 경험한 것들이거나

앞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했던 것이나 앞으로 모르고 행할 여러 가지의 현상을

이제 알아차림을 가지고 확실하게 해서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마음에 대해서 말씀드린 내용이

모두 스승님들의 가르침에 근거해서 정리한 것들입니다.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2003년 90세에 열반을 하셨는데

제게 마음을 새로 내라고 하신 이 말씀이 마지막 면담이 되었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언제나 한 두 마디로 저의 막힌 것을 뚫어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 이래서 큰 스승님이시구나.’ 라고 생각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