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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50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3:2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내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나는 없었고 그래서 현재에도 나는 없습니다.

 

단지 과거의 마음이 일어나서 사라지고 그 과보가 현재의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이처럼 과거 원인의 연속이 현재 결과의 연속으로 전해져서 오온이 있습니다.

 

다시 현재 결과의 연속이 원인이 되어 미래 결과의 연속으로 전해집니다.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어서 다음에 내가 되지 않고

단지 원인이 있어 결과가 있을 뿐입니다.

나와 원인은 다른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의 스승이신 쉐우민 사야도의 밑에서 수행을 할 때 일화가 매우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하나하나가 모두 귀감이 되는 내용이어서

수행자들에게 인식을 크게 개선해 주셨습니다.

 

일요일에 법당에 온 여자 수행자들이 좌선이 끝나고 여기 저기 누워서 자기도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을 보고 저의 작은 스승께 이것들을 시정해 주기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도 큰 스승께 이 말씀을 드렸더니 큰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

“얘야 그 사람들이 다른 곳에 가서 춤추고, 술 먹고 노는 것보다

여기 법당에 와서 자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그러니 그들을 이해해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귀국을 할 때 좀 더 집중을 하는 방법을 말씀해 주실 것을

부탁드렸더니 왜 그렇게 집중을 하려고 하느냐고 제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수행자가 집중을 원하여 가르침을 듣고자했는데도

“왜 그렇게 집중을 하려고 하는가?” 하고 오히려 반문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에 이 말씀이 가장 집중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퍼뜩 깨달았습니다.

사야도께서는 제가 집중을 집착하고 있는 것을 보신 것입니다.

집착을 하는 한 바른 집중력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야도께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셨기 때문에

항상 일상적인 것을 뛰어넘는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실재하는 현상을 깊은 지혜로

언제나 우리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이론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모곡 사야도의 12연기 수행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곡 사야도의 12연기 법문집인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번역에 참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완전하게 정리된 것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이론 없이 배웠는데

처음으로 글로 정리된 것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곡 사야도의 법문은 마음에 접근하는 방법이 조금 다를 뿐이지

이때까지 배운 마음에 대한 기본적 개념은 모두 같았습니다.

바로 이런 과정을 거쳐서 지금 여러분들에게 마음에 대한 말씀을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이란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나중에 생긴 마음이 먼저 있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먼저 있는 마음은 사라지고

나중에 생긴 마음이 그 순간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새로 내야 합니다.

이때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새로 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만약 수행자가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면

마음을 알아차리기 위해서 마음을 새로 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를 더 보태면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말을 많이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말을 많이 듣지 않으면 생각이 나지 않아서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로 마음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들어야

단 한번이라도 실천할 기회가 생깁니다.

왜냐면 해 보지 않은 것이라서 아무리 말을 들어도 실제 실천하기는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같은 말을 거듭 반복하는 것도 이러한 학습효과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불교는 정신세계에 관한 것이라서 동의어를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이것은 부처님으로부터 전해진 교습법입니다.

그래서 싫증이 날 정도로 들어야 조금씩 입력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에 접하려면 처음부터 인내가 필요합니다.

왜냐면 같은 이야기들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면서 새로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나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마음이나 내 마음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변하기 때문에 알아차리는 대상도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받아들여서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대상도 매순간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무상이고, 이것이 괴로움이고, 이것이 바로 무아입니다.

 

수행자는 이때 마음을 새로 낸다는 사실에 걸려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은 어느 순간에 한번이면 됩니다.

그러므로 새로 낸다는 것은 사실 이론입니다.

실제의 상황에서는 마음을 매순간 새로 낼 수는 없습니다.

어떤 대상이나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계속해서 대상을 새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워낙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이것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알아차리는 순간마다 새로, 새로, 새로 라고 하면서

알아차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새로 낸다는 것은 이론적인 설명이기 때문에 지혜로 알아야 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나타나는 대상이 모두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무상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새로 라는 것은 지혜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자동차의 바퀴가 굴러가면서 지면에 닿는 것과 같습니다.

바퀴가 굴러갈 때 바닥에 닿는 점은 한부분이며

이것들은 한순간이라서 이것은 매번 새로운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때 바퀴가 굴러가는 것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매순간 새로운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이라고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항상 현재에 머물 수 있지만

법의 성품을 알기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법념처를 하기 전에 심념처 수행을 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법은 대상으로서의 법이 있고, 진리로서의 법이 있는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서 진리의 법을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가

더 가까이 온 것입니다.

 

마음과 느낌을 함께 알아차릴 수 있는 가슴은

아랫배에서 호흡을 위주로 알아차리는 수행자에게는 매우 훌륭한 신개척지입니다.

이때까지는 호흡을 위주로 하는 수직적이던 수행이

비로소 수평적으로 하게 되어 더 많은 대상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수행을 하면서 어떤 경우에는 호흡을 알아차릴 수 없어서 고심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때 가슴에 마음을 머물게 하면 여러 가지의 느낌을 느낄 수가 있어서 매우 좋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의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특히 가슴은 심장이 있어서 맥박도 느낄 수 있는 곳이고,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는 느낌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입니다.

누구나 미세한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마음을 머물게 하면 미세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을

모두 느낌으로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슴은 진리의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곳입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시간에만 하는 수행이 아닙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다른 모든 수행처럼 시간과 장소에 아무런 제약 없이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특히 수행을 하면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어떤 상황에서도

일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때 마음이 대상을 알아차리거나 알아차리지 못하거나에 상관없이

어느 때나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했다면

즉시 새로 수행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에서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했다면

훨씬 강한 노력과 알아차림으로 더 힘이 있는 집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호흡과 몸의 느낌이 완전하게 사라졌을 때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하면 더 높은 지혜의 단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다른 수행에 비하여 더 광범위하게

사용될 수 있으며, 지혜를 얻는 마지막 단계에서는 반드시 실천해야 할 수행방법입니다.

일부 수행자들이 몸의 느낌과 호흡이 사라진 상태에서

마땅한 지도를 받지 못해 수행을 계속하지 못하는 일들을 보았습니다.

이때는 반드시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최고라고 하는 상에 빠져서

오히려 수행으로 인해서 더 교만해 질 수도 있습니다.

 

대개 몸의 느낌과 호흡이 사라진 상태까지 간 수행자의 결과가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바른 지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른 말을 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잘못된 견해가 분명해진 것입니다.

 

수행도 때가 있습니다.

수행에 대한 열정이 식으면 다시 점화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수행에 대한 열정이 식으면 선업의 양이 다한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선업의 과보가 다하면 다음에는 불선업의 과보가 들어온 것입니다.

 

이때 바르게 수행을 배웠으면 그렇지 않겠지만

바르게 지도를 받지 못했을 때는 수행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생깁니다.

그래서 오히려 수행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고생을 해서 다다른 상태를 마지막으로 더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선업이 부족한 탓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선업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계속해서 수행을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선업을 만드는데 수행을 하는 것보다 더 큰 선업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과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몸의 느낌과 호흡이 사라졌을 때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평소에 충분하게 숙련이 되지 않으면 매우 결정적이고 중요한 시기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모르기 때문에 수행의 성공적인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까지 말씀드린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하나,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알아차립니다.

또는 ‘지금 내 마음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하고 알아차립니다.

 

둘,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는 계속해서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이때 대상이 더 밀밀해지더라도 놀라지 말고

그냥 고요하게 끝까지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셋, 대상을 알아차리지 않고 망상을 하거나, 멍청하게 있거나, 졸음에 빠져있거나,

통증과 싸우고 있거나, 어떤 경우에나 현재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나서

다시 몸에서 일어나는 제일 강한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이상 아는 마음 알아차리기를 요약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어느 때나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알아차리십시오.

그러면 항상 현재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 현재 당신의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