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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51

通達無我法者 2010. 12. 27. 23:5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무명은 모르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지속하고

지혜는 알기 때문에 어리석은 일을 끊습니다.

 

무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행위가 있고

지혜로 인해 일어나는 행위가 있습니다.

 

무명으로 인해 일어나는 행위는 두 가지로

선한 행위와 선하지 못한 행위가 있습니다.

 

무명으로 인해 일어난 선한 행위는 좋은 일을 하되

부귀영화를 원하여 좋은 곳에 태어나고,

 

선하지 못한 행위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인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무명으로 인한 행위입니다.

 

선한 행위라고 해서 무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윤회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행위는 바라고 없애려는 것 없는 수행을 해서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부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요약을 해보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상좌불교는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의 가르침이 있으며,

존재를 분석한 논장(論藏)이 있는데 이것을 아비담마라고 합니다.

이 3가지는 모두 부처님에 의해서 설해진 가르침입니다.

 

경장과 율장은 지혜와 자비를 바탕으로 하여 괴로움을 해결합니다.

그리고 논장은 존재를 분석하였습니다.

논장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분석하여

존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아 근본적인 치유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경장과 율장과 논장에 근거하여 가르침을 폅니다.

이 세 가지를 합쳐서 삼장(三藏)이라고 합니다.

이것들을 모두 빨리(pāli)어 경전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다는 것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진리가 왜곡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삼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경전의 자의적 해석이나 왜곡을 막기 위해서 주석서들이 있어서

다시 주석서에 근거하여 경전을 해석합니다.

대표적인 주석서가 청정도론입니다.

지금도 위대하신 스승들에 의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석들이 쓰여 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중에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을 121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작용은 52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이러한 분류는 단순한 분석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서로 결합하여 다양하게 나타나는 경로를 밝힌 것입니다.

 

마음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각각의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철저하게 분석하셨습니다.

이러한 분석은 오직 이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무아를 알아야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오직 치유에 목적을 두고 이처럼 분석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현대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이며 어떤 신앙으로도 풀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찰해서 얻는 해탈의 지혜로서만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에 자아가 없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수준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혜안으로 밖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지혜는 특정한 사람만 소유하는 지혜가 아니고

누구나 일정한 과정을 거치는 수행을 하면 알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는 보편타당하고 일반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석을 한 것은 이러한 분석에 의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모든 번뇌가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석에 그치지 않고 그에 따른 방편을 제공하여 행복을 얻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분석이 논장이며 이러한 방편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행복을 얻는 해탈의 자유입니다.

이처럼 불교는 지혜와 자비라는 수행과 함께

논장을 바탕으로 분석한 것이기 때문에 이미 모든 것이 완벽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이 길은 이미 2천 5백 년 전에 밝혀진 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기 다른 문화와 사상으로 인하여

이 법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왜곡하였지만,

오늘 우리가 듣는 법은 빨리어 경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 그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지혜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얻으며,

자비(慈悲)는 사마타 수행을 통해서 얻습니다.

 

그리고 논장은 정신과 물질을 분석하였습니다.

이러한 분석은 오직 정신적 치유에 목적을 둔 것입니다.

이 정신적 치유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는 수행을 해서 지혜를 얻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불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정신과 물질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정신과 물질이 가지고 있는 번뇌를 해결하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학은 오직 수행을 돕는 역할을 하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교학과 수행과 지혜의 세 가지 단계로 완성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불교에서는 정신과 물질을 오온(五蘊)으로 나누어서 분석합니다.

오온은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이라는 5가지의 무더기를 말합니다.

이들 하나하나는 여러 가지의 구성요소로 결합되어 있어서 이것을 오온이라고 합니다.

이 5가지 중에서 물질을 말하는 색온을 빼고는 나머지 4가지가 정신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가 정신에 대한 비중과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류는 마음의 중요성에 대한 하나의 반증이기도 합니다.

 

정신이란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작용과 함께 있습니다.

마음은 오온의 식(識)이며, 마음의 작용은 오온의 수(受), 상(想), 행(行)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대한 분석은

오직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만 알 수 있는 지혜입니다.

이렇게 완벽한 분석을 통하여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비로소 마음에 든 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분석해서 얻은 결론이 바로 무아입니다.

그러나 이 무아는 수행을 해서 통찰지혜가 나야 알 수 있는 최상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초보수행자가 무아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말해서는 허물이 되므로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수행자는 아직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를 거부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신에 대한 것을 다루는 심리학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심리학은 분석에 머물 뿐이지 치유에 대한 완벽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심리학은 이천 오백년 전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에 대한 분석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정신에 관한 것은 추론적이기 때문에

지혜가 없으면 밝힐 수가 없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정신분석에 근거한 수행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번뇌를 억누르는 효과가 있지

번뇌를 말려서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는 있지만

해탈을 얻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논장은 마음을 낱낱이 분석해서 마음이 변하지 않고 항상 하는 것인지,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한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그래서 궁극에는 이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단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이라고 아는 지혜를 얻습니다.

 

이러한 통찰지혜를 통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불태워 열반을 성취합니다.

이러한 차이가 현대의 심리학과 위빠사나 수행의 차이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을 알아차리는 힘을 얻어서 마음까지 알아차리는 수행을 합니다.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다른 수행방법과 다른 것입니다.

 

인류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서 보는 방법밖에 몰랐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위빠사나를 통하여

비로소 대상을 분리해서 보는 방법이 밝혀졌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알아차릴 때만이 마음의 병을 고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로부터 내려온 잠재적 성향까지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이것의 힘이 약해지도록 합니다.

그러면 현재에도 괴롭지 않고 미래에도 괴롭지 않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지혜를 얻습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에 개입해서는 안 됩니다.

개입을 하면 어떻게 하려고하는 자기 의지가 개입이 됩니다.

그래서 선입관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대상을 바르게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대상을 개입하지 않고 지켜보아야 단지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습니다.

오직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을 때 내가 본다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내가 본다고 하는 자아가 개입되면 바라는 것이 있어

이것은 사마타 수행이라서 통찰지혜를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알아차림은 있지만 알아차리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있지만 깨달은 자가 없는 것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을 알아차려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아 무지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의 병을 치유합니다.

이러한 결과로 몸을 건강하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라지 않고, 없애려고 하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다른 수행과 다른 위빠사나 수행만의 방법입니다.

이러한 방법에 의해서 결국에는 완전하게 번뇌를 소멸시킵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끕니다.

마음인 오온의 식이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을 이끌고 몸인 색까지도 이끕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다른 것들도 그대로 따라갑니다.

선한 마음이면 선한 말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합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이면 선하지 못한 말을 하고 선하지 못한 행동을 합니다.

마치 바늘에 실이 따라가듯이 마음에 따라서 모든 행위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현재의 선심과 불선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에 만들어진 선과보심과 불선과보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 만들어진 선과보심이 현재의 선심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불선과보심이 현재의 불선심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현재의 선심이 선과보심을 만들어

미래에도 선심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또 현재의 불선심이 불선과보심을 만들어

미래에도 불선심이 일어나도록 합니다.

이처럼 마음과 과보심이 서로 얽혀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 느낌, 마음, 법이라는 4가지를 알아차리는 수행이라서

반드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리기 위해서 필요한 마음의 수준에 머뭅니다.

하지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합니다.

이렇게 할 때라야 비로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현재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사실 널리 보급되어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극히 일부의 스승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수행을 시작하면 몸을 알아차리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반드시 다음 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결코 위빠사나 수행이 완성될 수가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릴 대상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초기에는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수행을 해 갈수록 장애가 생기고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도과를 성취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꼭 거쳐야 되는 과정입니다.

 

이 단계의 필요에 따라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도 있지만

평소에 해보지 않아서 생소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초보수행자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모든 것들을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