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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58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0:2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후회는 선하지 못한 행위입니다.

후회는 성냄, 질투, 인색과 함께 때때로 나타나는 행위에 속합니다.

후회는 지난 일에 대한 괴로움과 상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욕망과 어리석음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후회는 선하지 못한 행위이기 때문에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괴로움이며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으로

자책하는 마음과 함께하기 때문에 아무런 소득이 없습니다.

오히려 괴롭고 해로울 뿐입니다.

 

그러나 참회는 선한 행위입니다.

참회는 믿음과 알아차림을 가지고 하는 행위로써

양심과 수치심이 있는 행위입니다.

 

참회를 함으로써 탐욕과 성냄이 없어지고 중도의 마음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후회는 바람이 있는 마음이지만 참회는 바람이 없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불선업과 선업의 차이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각적 욕망이 있을 때는 있는 것을 알아차리면

새로 알아차리는 마음이 일어나서 감각적 욕망은 그 순간에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외에 달리 할 것이 없습니다.

감각적 욕망이 있는 것에 개입해서 어떻게 해결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또 다른 욕망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없을 때도 없는 것을 알아차리면

감각적 욕망이 다시 들어올 위험이 없어집니다.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을 알아차리는 새로운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대처방법입니다.

 

대상이 나타나면 개입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합니다.

과연 왜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하는 것이 최상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그 순간에 있는 대상은 사라집니다.

그러니 애써서 이것을 없앨 다른 방법을 선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없애려고 하는 새로운 욕망과 성냄이 일어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의 이익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도 똑 같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을 알아차리면

원래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거나,

아니면 욕망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원래 감각적 욕망이 없는 것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이 감각적 욕망이 완전하게 소멸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조건이 성숙되면 일어날 여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이 없을 때에도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더 일어날 여지가 없어집니다.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다가 사라져서 없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도

욕망이 다시 일어날 여지는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없는 것을 알아차리면 감각적 욕망이 다시 일어날 여지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이 있어도 알아차릴 대상이고,

없어도 이것은 알아차려야 할 대상입니다.

 

수행자는 없던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난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생각은 2가지가 있습니다.

현명하지 않은 생각과 현명한 생각입니다.

현명하지 않은 생각은 해로운 생각이고, 현명한 생각은 이로운 생각입니다.

 

현명하지 못한 생각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한 것으로 알고,

불만족을 만족으로 알고, 자아가 없는데 자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아름답지 못한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생각을 해서

해로운 것을 일으킨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현명한 생각을 해서 이로운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현명한 생각은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불만족을 불만족으로 알고,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가 없다고 알고,

아름답지 못한 것을 아름답지 못하다고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각적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현명한 생각을 해서

이로운 것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라진 감각적 욕망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이 있으면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없으면 없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림이라는 문지기가 지키고 있는 한

잠재적인 성향의 감각적 욕망도 나타나지 못합니다.

만약 나타났다면 다시 나타난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래서 항상 알아차리기만 하면 감각적 욕망이 나타나지 못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지혜가 나서 차츰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감각적 욕망의 더러움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은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이며 괴로움뿐이라고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감각적 욕망을 알아차리는 것을 부정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면 감각적 욕망의 더러움에 대한 개념이 생겨서

선정을 얻게 되어 번뇌를 억누를 수 있습니다.

 

범부는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으로 삽니다.

그러나 성자들은 감각적 욕망의 괴로움을 압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이 일어났을 때 알아차려서 다시 맨 느낌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처음부터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날 원인이 사라져 윤회가 끝납니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재미도 있지만

이 욕망을 제어하는 재미는 훨씬 더 큰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감각적 욕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스스로 행복과 불행을 결정합니다.

이것은 온전히 누구의 힘에 의해서 선택되는 것이 아니고

온전하게 자기 자신이 선택해서 스스로 얻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은 6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느낌이 갈애를 일으키는 것인데

이 중에 보는 것과 함께 먹는 것에서도 감각적 욕망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먹을 때 알아차리고 먹어야 합니다.

먹을 때 알아차리고 먹으면 탐욕으로 먹지 않고 계율로 먹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음식을 먹을 때는 먼저 지금 무슨 마음으로 먹는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때 즐기거나 자만하거나 몸을 윤택하게 만들거나

또는 몸을 가꾸기 위해서 먹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이 몸을 유지하고 지탱하기 위해서 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행을 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고통이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음 6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부정관을 배울 것,

부정관을 전념할 것,

6가지 감각기관을 알아차려서 잘 간수할 것,

식사를 절제할 것,

훌륭한 도반을 사귈 것,

감각적 욕망을 제거할 수 있는 적절한 대화를 할 것 등등입니다.

 

경전에서는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유합니다.

 

“여기 통속에 빨강, 노랑, 파랑, 적황색의 물감이 섞인 물이 있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 그 곳을 들여다본다 해도

거기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이 감각적 욕망에 사로잡히고,

감각적 욕망에 짓눌려 있을 때는

이미 일어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복이나, 남의 행복이나, 자신이나 남의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에 새겨두었던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새겨두지 않은 가르침을 상기할 수는 없다.”

 

주석서에서는 감각적 욕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빚을 얻어다가 탕진을 해버렸다고 하자.

이제 그는 채권자들이 빚을 갚으라고 거친 말로 다그치며

괴롭히고 때린다고 해도 대들지도 못하고 모두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참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은 곧 그 빚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향한 감각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은 욕망의 대상에 대해 애착이 가득한 나머지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상대로부터 호된 소리를 듣고, 괴로움을 당하고,

매를 맞는다고 해도 이를 모두 견디는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감각적 욕망은 마치 빚을 지고 있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빚을 내어 장사를 해서 번창하게 되었다.

그는 이 빚이 고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이자와 함께 빚을 갚고, 빚 문서도 찢어버렸다.

그 뒤로부터 대금업자에게 심부름꾼을 보내거나 편지를 보내는 일도 없다.

이제 그들을 만난다고 해도 인사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거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그는 더 이상 그들에게 매이거나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수행자가 감각적 욕망이 장애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여

감각적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 6가지 방법을 닦아 감각적 욕망의 장애를 제거한다.

그러면 마치 빚을 청산한 사람이 예전의 채권자를 만나도 더 이상 두렵거나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감각적 욕망을 버린 사람 또한 욕망의 대상에 더 이상 집착하거나 구속당하지도 않는다.

설령 천상의 미녀를 보고도 열정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을 버리는 것을 빚을 청산한 것이라고 비유한 것이다.”

이상이 주석서의 말씀입니다.

 

다음에는 두 번째가 악의(惡意)입니다.

 

악의는 선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악한 의도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성냄, 분노, 미움, 두려움, 무서움, 걱정, 긴장, 후회, 인색 등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의가 있을 때는 악의가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생각이 행동으로 옮겨져 불선행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악의는 현명하지 못한 생각에서 오는 해로운 것들입니다.

 

누구나 선심과 불선심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마음은 과보심에 의해 조정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악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악한 마음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악의가 일어날 때는 악의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악의를 가진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다시 악한 의도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악한 의도가 사라진 것을 아는 것이 악의가 없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의는 항상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습관적으로 다시 나타날 것입니다.

 

수행자는 전에 없던 악의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난 악의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아야 합니다.

사라진 악의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가 악한 의도를 알아차리면

악한 의도는 현명하지 못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악의를 가진 마음을 알아차리면 그 마음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그 순간에 일어나서 순간에 사라지는 마음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악의를 가진 마음이 사라지고

악의가 사라진 것을 아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서 악의를 분리해서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악의가 사라지는 것은 알아차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에 의해서 자애로운 마음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악의가 사라집니다.

악한 의도가 있을 때는 자애가 없으며 자애가 있을 때는 악한 의도가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악의를 알아차려서 이것이 나의 마음이 아니고

단지 이 순간의 마음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것이 나의 마음이라고 알면 이 결과로 자신을 학대하거나

더 나쁜 쪽의 결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의가 일어났을 때는 ‘악의가 일어났네’라고 알아차리고

악의가 일어난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