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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60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1:0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선업과 불선업은 섞이지가 않습니다.

선심은 선행을 하여 선과보를 받고 이 과보가 다시 선심을 일으킵니다.

불선심은 불선행을 하여 불선과보를 받고 이 과보가 다시 불선심을 일으킵니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로 지속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잘못된 행위로 해서 괴로움을 겪는 것은 불선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이때 더 나쁜 쪽으로 가거나 좋은 쪽으로 가는 것은

과보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괴로울 때 인생을 포기하는 것은 불선과보를 받는 것이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은 선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수행은 통찰지혜를 얻어 번뇌를 끊기 때문에 최고의 선과보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은 불선과보가 아니고 선과보의 지혜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들뜸과 후회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자는 전에 없던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난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라진 들뜸과 후회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들뜸은 믿음이 없고 탐욕이 많기 때문에 일어나며 노력이 지나쳐도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바른 알아차림을 하지 못하고 지혜가 없기 때문에

들뜸과 후회가 일어나므로 사물을 통찰하는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합니다.

 

들뜸은 아라한이 되어야 완전하게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에 단계에서는 아직도 들뜸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과의 단계가 높을수록 들뜸이 약해집니다.

후회는 아나함이 되면 소멸합니다.

 

들뜸과 후회를 극복하는 6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것,

교리에 대해서 탐구하여 허용되는 것과 되지 않은 것을 알 것,

계율을 아는 것,

연륜과 경험이 있는 분을 가까이 할 것,

훌륭한 도반을 사귈 것,

들뜸과 후회를 제거할 수 있는 적절한 대화를 할 것 등입니다.

 

경전에서는 들뜸과 후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유했습니다.

 

“여기 통 속에 물이 있는데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고

출렁거려서 파문이 일어난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기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이 들뜸과 후회를 해서 짓눌려 있을 때는

그는 이미 들뜸과 후회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복이나, 남의 행복이나,

자신이나 남의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에 새겨두었던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새겨두지 않은 가르침은 상기할 수 없다.”

 

주석서에서는 들뜸과 후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축제에 끼고 싶었던 하인에게 주인이 말했다.

이러이러한 곳으로 빨리 가거라. 거기에 급한 일이 있다.

만약 가지 않으면 손발이나 귀, 코를 자를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주인이 시킨 대로 서둘러 가야되고,

축제의 일부도 즐길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는 그가 다른 사람에게 매여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율장을 숙지하지 못하면서

외진 곳에서 지내고자 깊은 숲속에 들어간 수행자와도 같다.

가령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테면 허용된 고기가 무엇인가 사소한 문제에 부딪쳐도,

자기가 먹은 고기는 허용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는 자신의 행위를 정화하기 위해서 벽지생활을 중단하고

율장에 밝은 비구에게 찾아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는 외진 곳의 행복도 즐길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는 그가 들뜸과 후회에 덮여 씌워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들뜸과 후회는 마치 종살이와 같은 것이다.”

 

한 종이 있는데 친구의 도움으로 주인에게 돈을 치루고 자유인이 되어

이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들뜸과 후회로 인해 일어나는 엄청난 장애를 인식할 수 있는 수행자는

거기에 대처할 6가지 사항을 닦아 들뜸과 후회를 떨쳐버린다.

그것을 버리고 난 수행자는 이제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으로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할 수 있게 된다.

 

그 누구도 자유인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이제 들뜸과 후회도 이 수행자의 행복한 출리의 길을 걷는 것을 더 이상 막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들뜸과 후회를 버리는 것이

종살이에서 자유를 얻는 것과 같다고 밝히신 것이다.”

이렇게 주석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다섯 번째가 회의적 의심입니다.

 

회의적 의심은 대상에 대하여 의혹을 갖는 것입니다.

회의적 의심을 당혹이라는 뜻으로도 설명하며 또는 이해가 불확실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결정을 내릴 수가 없어 곤혹스러운 상태를 회의적 의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의심은 결단력이 부족한 것입니다.

지혜의 능력이 없으면 결단력이 부족하여 의심을 합니다.

그래서 의심은 혼란한 상태로 인해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회의적 의심은 부처님에 대한 의심,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의심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가에 대한 의심이라고 하는데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교도가 아니어도 의심을 제거하여 선정이나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함하여

자기가 하는 수행방법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불신을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대상을 탐구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의 대상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을 가지고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수행자가 회의적 의심을 할 때는

지금 내가 회의적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누구나 의심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의심을 생각으로 풀려고 하지 말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생각으로는 완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의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힘을 키우면 지혜가 나서 자연스럽게 의심이 해소됩니다.

의심이 나도 모른다고 해서 그 자리에 멈춰서 답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답은 지혜이기 때문에 알아차린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회의적 의심이 없을 때는 내게 회의적 의심이 없다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은 먼저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린 결과로 원인과 결과라는 지혜가 생깁니다.

그러면 비로소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인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아는 지혜가 나면

검은 구름이 벗겨지고 밝은 곳에서 사물의 이치를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의심에서 해방되는 청정에 이릅니다.

 

수행자는 전에 없던 회의적 의심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난 회의적 의심이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라진 회의적 의심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의심이 일어나는 원인은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배운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아를 강화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게 막연하게 기대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사물의 이치를 통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음이 의심을 일으킵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이 사라져 지혜가 나야 비로소 의심이 해소됩니다.

하지만 아직 완전한 지혜가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수행을 하지 않으면

새로운 의심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서 결정하는 능력이 없을 때는

수행을 해서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알아차릴 대상을 겨냥한 뒤에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차츰 단계적인 지혜를 얻습니다.

그래서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회의적 의심이 제거됩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는 열반을 체험해야 비로소 사물의 자연스러운 이치를 알 수 있습니다.

 

회의적 의심을 극복하는 6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것,

교리에 대해서 탐구하여 허용되는 것과 되지 않은 것을 아는 것,

계율을 아는 것,

불법승 삼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는 것,

훌륭한 도반을 사귈 것,

회의적 의심을 제거할 수 있는 적절한 대화를 할 것 등등입니다.

 

경전에서는 회의적 의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유했습니다.

 

“여기 한 통의 흙탕물을 휘저어 어두운 곳에 두었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기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이 의심에 싸여 짓눌려 있을 때

그는 이미 일어난 의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복이나, 남의 행복이나,

자신이나 남의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에 새겨두었던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새겨두지 않은 가르침을 상기할 수는 없다.”

 

주석서에서는 회의적 의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을 가고 있다.

여행자들이 강도들에게 약탈을 당하고 살해를 당하기도 하는 것을 아는 그는,

나뭇가지나 새 소리에도 ‘강도가 왔구나!’ 하고 불안과 두려움에 떨 것이다.

몇 발자국 걷고는 다시 두려움에 걸음을 멈추는 식으로 여행을 계속하거나

혹은 도중에 되돌아갈지도 모른다.

걷는 일보다 멈추는 일이 더 많은 고생 끝에

겨우 안전한 곳에 도달하거나, 아예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마치 8가지의 의심 중에 어떤 것에 대해 의심이 생긴 사람의 경우와도 같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분인지 아닌지 의심을 하기에

그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는 일로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는 확신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성스러운 도를 이룰 수 없다.

 

‘거기에 강도들이 있을까, 없을까’하고 반신반의를 하는 여행자처럼

의혹에 찬 수행자의 마음속에는 잇달아 동요와 주저가 일어나고

결단력도 부족해지며 근심만 생길뿐이다.

 

그래서 그는 안전한 성지에 도달할 수 없도록

자기 내면에다 장애물을 스스로 설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회의적 의심은 마치 사막을 여행하는 것과 같다.

 

여기 한 건장한 사람이 있어서 짐 보따리를 챙겨들고

잘 무장을 한 채 무리를 지어서 사막을 간다.

멀리서 강도들이 본다면 제풀에 달아날 것이다.

그러면 무사히 사막을 건너서 안전한 곳에 이르러

그는 무사히 도착한 것을 기뻐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수행자는 회의적 의심이 큰 해악의 원인임을 알아

거기에 대한 해독제로 6가지 사항을 닦아 의심을 떨쳐버린다.

마치 무장을 하고 동료들과 어울린 건장한 사내가 강도들을

땅바닥의 풀처럼 대하듯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사막을 빠져나와 안전한 곳에 다다른 것처럼 ‘악행의 사막’을 건넌 수행자는

마침내 가장 안전한 경지, 불사의 영역, 열반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세존께서는 회의적 의심을 떨쳐버리는 것을

안전한 곳에 도달하는 것으로 비유한 것이다.”

이상이 주석서의 말씀이었습니다.

 

회의적 의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을 알아차릴 때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나야 합니다.

그 뒤에 12연기의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나면

모든 사물의 이치가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라는 사실을 알아

모든 의문에서 풀려납니다.

 

이렇게 풀려날 때 비로소 대상의 성품을 바로 보는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