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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수행법/위빠사나159

通達無我法者 2010. 12. 28. 00:5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누구나 생각을 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생각은 선한 생각과 선하지 못한 생각이 있습니다.

 

선한 생각은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지만 궁극의 선을 얻기 위해서는 통찰지혜를 얻는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선하지 못한 생각은 어리석음이기 때문에 항상 더 나쁜 결과를 향해서 갑니다.

이러한 생각은 ‘내가 있다’ 는 유신견 때문에 일어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잘못된 것과 타협하면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나’ 라는 생각이 살아가는 힘인 것 같지만 사실은 잘못된 길을 가게 하는 범인입니다.

 

내가 없는 곳에 관용, 자애, 지혜가 있고

내가 있는 곳에 탐욕, 성냄, 무지가 있어서 고통과 슬픔이 끊이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계속해서 악한 의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악한 생각은 도과를 성취한 수다원과 사다함에서도 남아있습니다.

아나함이 되어야 악의가 소멸됩니다.

아나함은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

감각적 욕망, 악의가 완전하게 소멸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고

색계의 정거천에 태어나서 아라한이 되어 윤회가 끝납니다.

 

악의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다음 6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자애관을 배울 것,

자애관에 전념할 것,

자기 자신이 바로 자기 행위의 주인이며, 상속자임을 알아차릴 것,

이것에 관해서 자주 반성을 할 것,

훌륭한 도반을 사귈 것,

악의를 제거할 수 있는 적절한 대화를 할 것 등등입니다.

 

경전에서는 악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유했습니다.

 

“여기 불 땐 솥에 물이 펄펄 끓고 있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 그 속을 들여다보더라도

거기에 비친 자기 얼굴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의 마음이 악의에 차 짓눌려 있을 때

그는 이미 일어난 악의에서 벗어날 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복이나, 남의 행복이나,

자신이나 남의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에 새겨두었던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새겨두지 않은 가르침을 상기할 수는 없다.”

 

주석서에서는 악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쓸개에 이상이 생겨서 앓고 있다면,

설령 꿀이나 설탕을 입에 넣어도

이 담즙 병 때문에 토해내며 쓰다고 불평을 하며 맛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화를 잘 내는 기질을 가진 사람은

스승이 좋은 뜻으로 가볍게 타일러도 귀찮게 여기며 불평을 하며

그분들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승가에서 나가거나 이리저리 떠돌아다닐 것이다.

 

마치 담즙 병을 앓는 사람이 꿀이나 설탕 맛을 알 수 없는 것처럼

화를 내는 병에 걸린 사람은 부처님이 베푸시는 선정의 행복을 맛볼 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악의는 병을 앓는 것과 같다.

 

마치 담즙 병에 시달리다가 약을 써서 낫게 된 사람이 꿀과 설탕 맛을 되찾듯이

수행자는 악의는 많은 해악의 씨앗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떨쳐버리게 하는 방법을 닦아 악의라는 장애를 제거한다.

 

병이 나은 사람이 제대로 꿀과 설탕 맛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이 수행자 또한 경외심으로 계율을 받아 계율의 진가를 인식하여 이를 준수한다.

이런 까닭에 세존께서는 악의를 버리는 것을 건강을 회복하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이다.”

이상이 주석서의 말씀이었습니다.

 

다음은 세 번째, 나태와 혼침입니다.

나태와 혼침은 게으름과 졸림입니다.

수행을 하면 나른함, 권태로움, 무기력함, 선하품, 식곤증, 까라짐 등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나태와 혼침이 일어날 때는 이것이 일어난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졸음이 올 때는 희미해지는 마음과 무거운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지 않고 졸음과 싸우면 더 빨리 졸음에 빠지게 됩니다.

 

나태와 혼침이 있을 때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이것들이 사라졌을 때는 나태와 혼침이 사리진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나른함과 졸음에서 벗어나면 반드시 이것을 극복했다는 기쁨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혼침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기뻐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만약 수행자가 좋아하면 그 순간에 알아차림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면 갑자기 졸음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때는 알아차림이 없기 때문에 언제 졸았는지도 모르게 잠에 떨어집니다.

 

수행자들이 좌선을 할 때 움직이지 않으면 당연히 무기력해지고 졸음이 오기 마련입니다.

이때 법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법은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이므로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수면욕은 본능이기 때문에 누구나 알아차리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잠을 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상황이 종료됩니다.

그러므로 졸음도 와서 보라고 찾아온 손님이므로

졸음이 오는 것을 희미하나마 그대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수행자는 전에 없던 나태와 혼침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난 나태와 혼침이 어떻게 사라지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라진 나태와 혼침이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가 나태함과 졸음에 떨어지는 것은

권태로움과 무기력함과 졸음에 대한 현명하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자가 스스로 이러한 상태를 방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명한 생각은 스스로 노력을 하게 하여 나태함과 졸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러한 노력은 마음의 노력과 몸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졸릴 때 희미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마음의 노력이며,

나른하고 무거운 몸을 알아차리는 것이 몸의 노력입니다.

이때는 몸의 미세한 변화를 주목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태함과 졸음이 오는 이유는 많습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 매번 같은 호흡이 아니고 항상 새로운 호흡인데

같은 호흡이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싫증이 나고 재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호흡의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호흡의 강약과 장단과 바람의 압력 등등이 매순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집중이 되면 노력과 알아차림이 약해져서 졸음에 떨어질 수 있으므로

집중이 되는 만큼 노력과 알아차림을 더 강화해야 합니다.

 

나태와 혼침은 아라한이 되어야 완전하게 소멸합니다.

그러므로 범부는 물론이고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도 졸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 대상에 재미를 느껴야 합니다.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대상이 단순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고

매번 새롭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단순한 동작이 거듭된다고 볼 때는

마음이 싫증을 내서 달아나 버리거나 혼침에 빠지기 마련입니다.

 

나태와 혼침을 극복하는 6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과식이 혼침의 원인이므로 음식을 적절하게 섭취할 것,

수행 중에 자세를 바꿀 것,

빛을 볼 것,

너무 어두운 곳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갈 것,

훌륭한 도반을 사귈 것,

악의를 제거할 수 있는 적절한 대화를 할 것,

나태와 혼침을 제어할 수 있는 적절한 대화 등을 할 것입니다.

 

경전에서는 나태와 혼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유했습니다.

 

“여기 통 속에 물이 있어 이끼와 풀로 덮여있다면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거기에 비친 자시기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이 나태와 혼침에 사로잡혀 짓눌려 있을 때

그는 이미 일어난 나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자신의 행복이나, 남의 행복이나,

자신이나 남의 행복을 올바로 이해하고 보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에 새겨두었던 가르침도 상기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새겨두지 않은 가르침을 상기할 수는 없다.”

 

주석서에서는 나태와 혼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축제가 있는 날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축제를 하는 행사의 시작도 중간도 끝도 볼 수 없었다.

만약 그 사람이 다음 날 감옥에서 풀려나왔을 때 사람들이

‘어제 축제는 참 즐거웠지’ 하며

노래며 춤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도 대꾸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그는 축제를 즐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설령 아무리 감동적인 설법이 진행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떤 수행자가 나태와 혼침에 빠져있다면

그는 법문의 시작도 중간도 끝도 모르게 될 것이다.

 

법문이 끝난 뒤에 ‘그런 법문을 들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법문의 주제도 흥미로운 것이었지만 비유들은 또 얼마나 좋은가’ 라고

찬탄하는 말을 들어도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왜 그런가? 그는 나태와 혼침에 빠져 그 법문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태와 혼침은 감옥에 갇히는 것에 견줄 수 있다.

지나간 축제기간 동안 감옥에 갇혔던 사람이 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 다음 축제에 참가한 뒤에

‘예전에는 부주의했던 탓에 감옥에 갇혀 축제를 즐기지 못했지만

이제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하고 다짐한다.

 

이렇게 어떤 해로운 생각이 마음속에 들어올 수 없도록 자신의 행위에 신중을 기한다.

그는 이렇게 축제를 즐기고 나서 ‘아! 얼마나 멋진 축제인가’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어느 수행자가 나태와 혼침이 큰 해를 끼치는 것임을 알고

그것에 대적할 6가지 사항을 닦아서 나태와 혼침이라는 장애를 제거한다.

마치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이 칠일이나 되는 축제의 전 기간을 즐기는 것처럼

이렇게 나태와 혼침을 떨쳐버린 수행자는

진리의 축제를 시작과 중간과 끝의 극치를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마침내는 사무애해와 함께 아라한과를 성취한다.

 

이런 이유로 세존께서는 나태와 혼침을 떨쳐버리는 것을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수행자 여러분!

나태와 혼침은 무기력한 것이고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어리석음에 속합니다.

 

게으름에 빠져있으면 아무것도 발전할 수 없습니다.

게으름은 노력의 반대입니다.

그리고 어리석음은 지혜의 반대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나태와 혼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대상의 변화를 주목해야 합니다.

 

다음에는 네 번째 들뜸과 후회입니다.

들뜸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머물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후회는 나쁘거나 옳지 않은 것을 한 것과

좋은 것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말합니다.

 

후회는 과거에 한 일들에 대한 회한입니다.

하려고 하는 노력이 지나쳐도 들떠서 마음이 대상에 머물지 못합니다.

그래서 적절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의욕이 지나쳐서 탐욕으로 하면 들떠서 불안정한 상태가 됩니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해서 들떠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후회까지 합니다.

 

후회를 하는 것은 마음의 동요가 해로운 것인지를 몰라서 하게 되는

현명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들뜨지 않으면 후회도 하지 않습니다.

들뜸과 후회는 모두 불선심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선행입니다.

그러므로 들떠있을 때는 들떠 있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후회할 때는 후회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들뜸이 사라지고 고요하고 안정된 상태가 되면 들뜸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후회를 하다가 후회를 하지 않을 때는 후회를 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들뜸이 없는 것을 알아차리거나 후회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다시 이것들이 완전한 소멸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여지를 막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