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38

通達無我法者 2011. 1. 5. 22:3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부처의 조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과거 7불에 대해서 간단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너무 많아서 생략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주는 교훈은

부처가 되는 길은 참으로 상상을 뛰어넘는 오랜 세월 동안

오직 보살로써 바라밀을 쌓은 결과로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진리는 이미 정해진 것 이상 다른 특별한 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사람이 누구나 부처가 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을 불성이라고 합니다.   

불성은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살아 있는 생명이 어느 때인가 부처가 될 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아닌 것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육도 윤회하는 생명이 아닌 것과 불성은 상관이 없습니다.

이 불성의 정확한 뜻은 부처의 마음입니다.

부처의 마음은 우리들 안에 내재 되어 있는 무인작용심을 말합니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갈애가 끊어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받을 것이 없어 태어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일러 불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성은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바로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마음을 불성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해서 누구나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가 되고 싶다고 해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상상을 초월한 희귀한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확률의 문제로 보더라도 우리의 헤아림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타마 붓다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고타마 부처님께서 보살이셨을 때

부처가 되겠다고 생각으로 한 기간이 아홉 띤체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말을 하지 않고 오직 생각으로만

부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기간이 아홉 띤체이입니다.


여기서 띤체이란 말은 10의 140승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1하고 동그라미가 140개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띤체이를 영어로는 에이언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0(영) 하나가 한 생애가 아니고

사람이 사는 이 지구가 생겼다 없어지고 다시 새로 생기는 

성주 괴공을 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상상을 초월 하는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불교가 말하는 시간을 알아보겠습니다.

항하사는 10의 52승

아승지는 10의 56승

나유타는 10의 60승

불가사의는 10의 64승

무량대수는 10의 68승

방금 말씀드린 띤체이는 10의 140승입니다


여러분!

고타마 보살은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도

아직도 부처가 되겠다는 서원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라밀을 행하지 않고

이제는 말로만 부처가 되겠다고 한 것이 7띤체이가 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부처가 되겠다고 생각만 한 것이 아홉 띤체이고,

이제는 부처는 되어야 되겠다고 말로 한 것이 일곱 띤체이입니다,

다시 이 시기가 지난 뒤에 바라밀을 행하면서 부처가 되겠다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한 것이 4띤체이 하고 10만 성주괴공입니다.

4띤체이에다가 또다시 10만 번 우주가 생겼다 없어지는 과정을 말합니다.


자! 부처가 보살인 시기에 부처가 되기 위해서

서원을 세운 것을 한번 다시 요약해 보겠습니다.


첫째 고타마 보살이 붓다가 되겠다고 생각만 한 것이 아홉 띤체이입니다.

다시 붓다가 되겠다고 말로만 하면서 산 것이 일곱 띤체이입니다.

그리고 붓다가 되겠다고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바라밀 행을 쌓은 시기가 네 띤체이 십만 성주괴공입니다.


이렇듯 하나의 부처가 출현하기에는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세월 동안에 끊임없는 바라밀 공덕을 쌓아서,

살아있는 생명 중에서 최고의 바라밀공덕을 쌓은 과보로

붓다가 출현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붓다는 이렇게 위대하신 분입니다.

이렇듯 바라밀을 쌓으면서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우고 살아가는 과정이

모두 본생담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바로 이때 자신의 몸도 보시하고 처자도 보시를 한 시기입니다.

이 기간에 보살로 살면서 축생이 되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진 적도 있습니다.

이 시기에 살생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음행도 했습니다.

인간은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누구나 선심과 불선심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불선업을 짓는 이런 행위는 어찌 보면 일면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선업을 정당화해서는 안 되겠지요. 

바로 어쩔 수 없는 이 불선업 때문에 괴로워서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부처가 되겠다고 서원을 한 사람은 축생이 되었을 때도

부처가 되겠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축생이 되어도 왕으로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옥에 있을 때는 바라밀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자기가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웠으면,

자신의 전생에도 서원을 세웠다는 것을 안다고 합니다.


남이 부처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웠다고 해서

욕심이 생겨 자신도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웁니다.

그러나 서원을 세우고 나서도 바라밀 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부처가 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렇다고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생각으로 할 때나 말로만 할 때는 부처가 되는 일이 더욱 요원할 뿐입니다.


여러분! 저희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탐진치 번뇌를 불태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반 열반에 들면 부처나 아라한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서원으로 달라집니다.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운사람을

마하뿌릿사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마하뿌릿사라는 말은 큰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키가 큰사람이라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큰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마음을 갖지 않은 보통사람은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큰마음이 없으면

쉽고 빠른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아라한이 되어야합니다.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의미는 자신과 같은 붓다가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번뇌를 해결하여 행복을 얻는 것은 붓다가 아니어도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법을 펴신 겁니다.


그리고 자신도 아라한이고,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는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하라는, 중생들을 위해 법을 펴신 겁니다.

우리가 이 길을 가는 것은 부처님의 뜻을 따르는

매우 지혜로운 행위라고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길이 쉽기 때문입니다.


미얀마에는 바간 왕국이 있었습니다.

무수한 탑을 거느린 바간 왕국이 몽고군에 의해서 멸망되었습니다.

여기서 출토된 기록에 의하면 바간 왕조시대에

비구들이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운 것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봐서도 상좌 불교에서도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러분이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우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너무 까마득한 세월에 하기 힘든 부처가 되기보다도

탐진치 번뇌를 불태우는 아라한이 되는 것 또한 여러분들의 선택의 자유입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오직 수행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팔정도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이 가신 길을 따르려면 수행을 해야 합니다.


붓다를 따르는 길은 많습니다.

일생에 삶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합니다.


지금 부처님이 계시다면 내가 한 이 일을 좋아하셨을까?

라고 이렇게 반문해보십시오.

또 지금 부처님이 계셨다면 부처님께서 이 일을 과연 어떻게 하셨을까?

이렇게 반문해보십시오.

이렇게 반문할 때 여러분들은 바른 견해를 갖게 될 것입니다.


고타마 붓다는 45년간 맨발로 탁발이라는 걸식을 하면서 생활하셨습니다.

제가 처음에 미얀마에 가서 비구계를 받고 탁발을 할 때였습니다.

퍼붓는 빗속에서 탁발을 하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눈물 콧물 빗물이 섞여서 볼 위로 흘렀습니다.

부처가 간 길을 따르는 구도자의 자랑스러움에 감격하였던 것입니다.

더 눈물이 났던 것은 비가 오는데도 비를 무릅쓰고 공양 보시를 하기위해서

비를 맞고 나와 서있는 신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붓다가 되신 이래로 평생을 탁발로 걸식하셨다는 것이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의 삶을 행동으로 저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출가자의 길이지만 누구를 막론하고

이런 부처님의 삶의 모습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여러분 부처님은 매우 인간적이고 중도를 표방하는

가장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절대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과 저것이 있는데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는

자신이 할 일이라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나 모든 것을 자신이 합니다.

누가 시켜서 이익이 있어서 하지,

결국 하는 것은 자신입니다.

이는 모든 일을 자신이 좋아해서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결국 자신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누가 개입될 수 없는 그런 실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책임도 자신에게 있습니다.


여러분!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누구도 바꾸려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이미 축적된 성향이 있어서 안 바뀐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번뇌는 상당부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것을 부단히 바꾸려합니다.

그래서 괴롭습니다. 안 바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작 바뀌어야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된 고정관념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사건이나 사람들이 아닙니다.

특히 사람들의 타고난 성향을 바꾸려하기 때문에 괴롭습니다.

물론 교육은 필요합니다.

그것은 인내의 역할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바뀔 가능성을 가진 오직 유일한 하나가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려서 수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그것이 계정혜 3학이고,

선업을 쌓아서 언젠가 조금씩 바뀌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단하나의 길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한 삶의 방법입니다.


여러분! 부처님은 자연 현상계를 보고 깨달음을 얻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린 결과로 위없는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이것이 팔정도이며, 사념처이며,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그리고 이 길이 단하나의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선언을 믿고 따라야합니다.

맹목적으로 믿을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체험을 통해서

진실성 여부를 스스로 판단해야하겠습니다.


이 길은 고타마 부처님께서 혼자서만 가신 길이 아니고,

역대의 모든 부처가 모두 이 길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깨달음을 얻는데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상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부모나 형제, 자매가 죽어서 무상의 괴로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느낌은 감상적이기 쉽고, 법에 실체에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육근이 육경에 부딪칠 때 마음이 밖으로 나가면

내가 본다는 유신견을 가지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볼 때는 지적 사유에 그치고 맙니다.


숫타니파타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알아야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할 바를 닦았고,

버려야할 것을 버렸느니라.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 즉 깨달은 사람이다.


여러분! 부처님께서 무엇을 아셨겠습니까?

바로 삼법인을 알아 사성제의 지혜를 갖춘 것입니다.


무엇을 닦았을까요?

바로 팔정도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으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으셨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버리셨을까요?

탐진치라는 불선업의 마음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버리려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결과로 지혜가 나서 소멸된 것입니다.

이제 함께 모두 이 길로 나아갑시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실 수행을 하실 것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이 길은 오직 실 수행을 말합니다.

오직 실 수행에 의해서만 지혜가 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한번 다시 되새겨야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부처님의 조건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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