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28

通達無我法者 2011. 2. 27. 22:54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마음에는 종자가 있습니다.

마음에는 선한 종자가 있고 선하지 못한 종자가 있습니다.

이 종자가 다음 마음을 일으킵니다.


누구나 향상된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생각에 그치고 실행에 옮기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 발전을 하고

발전할 수 없는 사람은 발전을 하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축적된 성향이 있어서

발전할 수 있는 마음의 종자가 있습니다.


발전이 되었다고 해도 약간의 변화가 있을 뿐이지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본질이 바뀌지 않습니다.


발전할 수 있는 근기가 없다면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서 새롭게 선한 종자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종자가 결실을 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며

참고 노력하는 과정을 거쳐야 바른 조건이 성숙됩니다.


처음에는 무엇도 기대하지 말고

오직 새로운 마음에 선한 종자를 만드는 일에 몰두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에 선한 종자를 만드는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항상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선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제 18장 상견과 단견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소리를 듣는 이식이 일어날 때

내가 듣는다고 여긴다면 이것 또한 유신견입니다.

코가 냄새를 맡을 때 내가 맡는다고 여기는 것도 바로 유신견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내가 생각한다고 여긴다면 이 또한 유신견입니다.


이렇게 의식을 자아 혹은 나 등으로 인격화하여 잘못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유신견입니다.

수행자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는 것을

단지 오온의 작용으로 알고 거기에 아무런 자아, 내가 없다고 하는 지혜를 얻을 때

유신견이 뿌리 뽑히고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범부들은 항상 몸이 있다고 하는 유신(有身)과 개체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사견을

뒤섞어 버리곤 합니다. 그래서 유신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수행자는 몸이 있다고 하는 유신(有身)이 있을 뿐이라고 알고,

몸이 내가 아니라고 하는 정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유신견이라는 잘못된 견해가 생기는 것은 바로 유신과 사견이 뒤섞이기 때문입니다.

윤회의 전 과정을 살펴보면 반드시 유신에 사견이 뒤섞이면서 진행되어 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실재하는 몸은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지금 여기에 있는 이 몸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유신(有身)입니다.

그러나 이 몸이 나의 몸이라고 할 때는 잘못된 견해로 유신견(有身見)이 됩니다.


몸이 있지만 매순간 조건과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생멸하는 몸이 있을 뿐이지

변하지 않는 항상하는 몸은 없는 것입니다.

만약 나의 몸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몸이 있다는 유신에 잘못된 사견이 섞이게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그냥 몸만 있다고 아는 것이고,

이것이 나의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오온은 항상 함께 일어나지만 그중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게 일어날 뿐입니다.

어떤 오온이 일어나든 이를 단순한 오온의 일어남으로 알뿐,

그것을 나, 자아 등과 섞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수행자는 유신(有身)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게 되므로

유신(有身)을 바른 견해와 결합시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유신에 정견이 뒤섞이면 다시 유신이고, 유신에 사견이 섞이면 유신견이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자동차는 3만 가지의 부속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것을 자동차라고 이름 해서 자동차입니다.

우리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장기의 기능들로 인해서 몸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을 단지 몸이라고 명칭을 붙였을 뿐입니다.

그것들은 각각의 부속들이 모여서 몸을 이룬 것이지 그 몸 자체가 나의 몸은 아닙니다.

단지 그냥 몸일 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초보 수행자는 위빠사나 수행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우선 첫 번째로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는 연기의 법칙에 대한 기본원리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뒤에 비로소 본격적인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앞선 두 가지 지혜의 기본원리를 숙지하지 못한 수행자들은

이 내용을 충분히 알기 전까지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두루 아는 지혜를 통하여 사견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두루 아는 지혜 중에서 처음에 지변지(知邊知)를 얻고,

다음에 심찰변지(審察邊知, tirana-pariñña)를 얻고,

마지막에는 단변지(斷邊知, pahāna-pariñña)를 얻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는 법문을 듣는 문혜를 완성해야 합니다.

다음에 가르침을 충분히 사유하고 대상을 겨냥하는 사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수혜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문혜, 사혜, 수혜입니다.


여기서 두루 아는 지혜를 빨리어로 ‘빠린냐(pariñña)’ 라고 합니다.

빠린냐는 정확한 앎, 통달, 두루 앎, 완전한 이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중국에서는 변지라고 번역했습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두루 아는 지혜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앎의 두루 아는 지혜입니다.

이것을 지변지(知邊知, ñāta-pariñña)라고 합니다.

지변지는 물질은 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느낌은 느껴지는 특성을 가진다고

이와 같이 그 법들의 개별적인 특성을 조사함으로써 생기는 두루 아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법을 들어서 얻는 완전한 지혜를 말합니다.


둘째, 조사의 두루 아는 지혜입니다.

이것을 심찰변지(審察邊知, tirana-pariñña)라고 합니다.

심찰변지는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다는 방법으로

그 법들에게서 보편적인 특징을 제기한 뒤에 생기는,

보편적인 특징을 대상으로 가지는 두루 아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의 두루 아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측정을 말합니다.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서 얻는 완전한 지혜를 말합니다.


셋째, 버림의 두루 아는 지혜입니다.

이것을 단변지(斷邊知, pahāna-pariñña)라고 합니다.

단변지는 이런 법들에서 영원하다는 인식 등을 버림으로써 생긴

특징을 대상으로 가진 두루 아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위빠사나의 두루 아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번뇌를 끊음으로써 얻는 완전한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바람직하지 못한 법을 버리고

이제 바람직한 법인 바른 견해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수행자가 있는 그대로 유신(有身)을 유신으로만 보아 사견과 혼동하지 않는다면

사견의 족쇄를 깨어 부수고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게 되어

비로소 다음 생에 지옥으로 떨어질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잘못된 견해인 유신견, 상견, 단견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통찰지혜를 얻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해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무엇을 어떻게 알아차려야 하겠습니까?


위빠사나 수행은 정신과 물질인 오온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오온을 어떻게 알아차려야 할까요?


오온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좋다거나 싫다고 생각하면서 알아차리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몸이고 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거기에 단지 몸이 있기 때문에 마음을 집중해서 알아차리는 것 외에

어떤 목적이나 어떤 선입관 없이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릴 때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지 않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사실 바르게 알아차리면 이런 선입관 없이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쉬운 것 같아도 가장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방법이 복잡해서 단순하게 보는 방법을 잊어버렸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바라지 않고, 없애려고 하지 않고, 알아차려본 적이 없습니다.


거의는 탐욕과 성냄으로 보았으며, 어쩌다 탐욕과 성냄이 없었을 때는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무지한 상태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온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꾸며서 보았기 때문에 오온을 집착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단순한 정신과 물질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여 집착한 것이 바로 오취온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정신과 물질의 무더기를 집착의 무더기로 우리 스스로가 바꾼 것입니다.

늦었지만 이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오취온을 그냥 오온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이유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단순한 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나의 몸과 나의 마음이라는 생각으로 인하여 갈애가 일어납니다.

이 갈애는 그냥 갈애로 있지 않고 반드시 집착을 해서 업을 생성시킵니다.

이렇게 생성된 업은 새로운 괴로움을 만들게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러면 어떻게 정신과 물질을 알아차려야 하겠습니까?

좌선을 하면서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을 정확하게 겨냥하여 알아차리고

반드시 알아차림을 지속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호흡이 일어날 때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리고,

꺼질 때는 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을 뒤따라가면서 알아차리면 안 됩니다.

일어나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며

꺼지는 순간에 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남과 꺼짐을 일어나고 꺼지는 순간에 밀착시키지 않으면 그 사이에 망상이 들어옵니다.

망상이 들어오면 본래 가지고 있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휩쓸려 들어옵니다.

그래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고정관념을 가지고 보게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에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바르지 못한 사견이 들어와서 집착을 하게 합니다.

이런 집착은 필연적으로 유신견과 상견과 단견으로 연결됩니다.


여러분들이 호흡을 알아차릴 때

몸의 움직임을 아는 것은 색온이고, 좋거나 싫거나 덤덤한 것은 수온이고,

인식하는 것은 상온이고, 숨쉬려고 노력하는 것은 행온이고,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 마음은 식온입니다.


이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단지 오온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해서 나의 몸이고, 나의 느낌이고,

내가 호흡한다고 알아서 집착을 하면 이것이 오취온입니다.

그래서 오온이 오취온이 되지 않기 위해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걸으면서 발을 알아차릴 때, 오른발 왼발의 움직임은 색온이고,

좋거나 싫거나 덤덤한 것은 수온이고, 인식하는 것은 상온이고,

걸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행온이고, 걷는 것을 아는 마음은 식온입니다.

이것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단지 오온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리지 못해서 나의 발이고, 나의 느낌이고, 내가 걷는다고 알아서

집착을 하면 이것이 오취온입니다.

그래서 오온이 오취온이 되지 않기 위해서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걷고 있는 발을 알아차려야 할까요?

걸을 때는 걸으려는 의도를 알아차린 뒤에

오른발, 왼발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겨냥하여 알아차리고

반드시 알아차림을 지속시켜야 합니다.


오른발을 들을 때는 오른발이 들리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오른발을 내려놓을 때는 오른발을 내려놓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발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려야 하며

발을 내려놓는 순간에 내려놓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정확하게 알아차려야만 그 순간에 망상이 들어오지 않아서

유신견, 상견, 단견이 제거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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