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29

通達無我法者 2011. 2. 27. 23:0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마음에는 원인과 결과의 과보가 있습니다.

선한 마음을 가진 자는 옳고 그름을 알 수 있는 지혜가 있는 사람으로

선한 과보를 만납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을 가진 자는 옳고 그름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선하지 못한 과보를 만납니다.


선한 마음은 같은 파장을 가진 선한 과보와 만나게 되며,

새롭게 선한 원인을 만들어서 다시 선한 마음을 갖습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은 같은 선하지 못한 과보를 만나게 되며,

새롭게 선하지 못한 원인을 만들어서 다시 불선심을 갖습니다.


현재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선과 불선의 과보가 따르게 되며,

새로운 선심과 새로운 불선심의 원인을 만들게 됩니다.

선심은 선하기 때문에 수행을 하려는 마음을 내게 되며,

불선심은 선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을 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선한 마음이란 단지 마음을 먹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선한 마음을 실천할 수 있는 수행이 따라야 됩니다.


오늘은 교재, 제 19장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문으로 심념처(心念處)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저마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말은 많지만

진정한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존재하는 것들의 특성을 알아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해탈에는 반드시 열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열반은 오직 위대한 정신적 깨달음을 얻는 불교에만 있습니다.


같은 불교 안에도 사마타 수행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또 깨달음을 얻는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바른 스승에게 바른 수행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도 열반이 아닌 것을 열반이라고 착각하는

다섯 가지의 유사 열반이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의 유사 열반은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마치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착각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궁극의 깨달음을 얻고자 열망하는 사람들은

수다원 도, 사다함 도, 아나함 도, 그리고 아라한 도를 거쳐야만 합니다.


첫째 단계인 수다원 도를 얻기 위해서는 사견(邪見)과 의심을 제거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때의 사견(邪見)은 유신견, 상견, 단견을 말합니다.

그리고 의심이란 것은 불, 법, 승 삼보에 대한 의심입니다.

그래서 사견과 의심을 가지고 있는 한 누구도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상좌 불교의 칠론 중의 하나인 분별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행동하는 어리석은 자에게는 분별하지 않고

마음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심념처가 청정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견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지적으로 무딘 수행자가

도를 성취하는데 있어서는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은 심념처가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다고 하지만 사실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보이지 않고, 실체가 없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서 집중력을 키운 뒤에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한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바르게 하기가 어렵습니다.


실제 마음이 모든 것을 하기 때문에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쉽지만

알아차려 본 적이 없을 경우에는 매우 어려운 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각각의 근기에 따라서

사념처 수행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 수, 심, 법의 사념처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네 가지 수행의 대상은 기본이고, 좀 더 집중적으로

대상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에 따라서 수행의 발전이 다릅니다.


자기와 맞지 않는 수행은 효과적이지 못하며,

아울러 수행의 결과가 없으면 수행을 포기하기에 이르기 때문에

알맞은 것을 선택해서 수행을 하는 것이 이롭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스스로 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선택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스승을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주석서에서는 네 가지 대상 중에서 각각의 성향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감성적인 사람 중에서

무딘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효과가 있습니다.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감성적인 사람 중에서

영민한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효과가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이성적인 사람 중에서

무딘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효과가 있습니다.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은 이성적인 사람 중에서

영민한 사람이 선택하는 것이 효과가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 중에서 이성적이고 무딘 사람이란

바로 유신견이 강하고 이기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과연 그 마음이 나의 마음인가?’

그 마음을 내가 소유할 수 있는지 알아야 두꺼운 사견의 벽이 허물어 질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사념처 수행을 함께 해야 하지만,

수행의 발전을 위해서 주 대상을 선택하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초보수행자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신념처 수행은 기본적 토양이 되는 수행으로 알고 먼저 신념처 수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념처 수행의 주 대상은 호흡입니다.

그런 뒤에 집중력이 생기면 이제 심념처 수행을 하시기 바랍니다.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실질적인 수행 방법을 원하는 요즘

사람들이 보다 쉽게 접근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매우 단순하고도 복잡하지 않은 심념처 수행 방법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다음에 나오는 13가지 종류의 마음, 혹은 의식은 모두 마음으로

이것들이 모두 알아차려야 할 대상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13가지의 마음 모두를 동시에 알아차리는 것은 아닙니다.


한 순간에는 오직 하나의 마음만 일어나는데

어떤 마음이거나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은 반드시 한 순간에 하나의 마음만 일어난다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이 마음이 소멸하고 저 마음이 일어난다.’

이것은 하나의 마음이 사라지자 또 하나의 마음이 일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은 매 순간 빠르게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찰나 생, 찰나 멸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한 순간에 하나만 있습니다.

마음이 한 순간에 하나만 있다고 알아야 비로소 무상, 고, 무아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마음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아마도 1,000가지 2,000가지, 그 이상의 많은 마음들이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 아비담마에서 밝히신 마음의 종류는

89가지 내지는 121가지로 분류하셨습니다.


그러나 모곡 사야도께서는 13가지로 분류하셨는데 사실은 내용이 모두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16가지의 마음의 분류는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6가지를 보면 탐욕이 있는 마음, 탐욕이 없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성냄이 없는 마음,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

위축된 마음, 산만한 마음,

커진 마음, 커지지 않은 마음,

향상된 마음, 더 이상 향상될 수 없는 마음,

집중된 마음, 집중이 안 된 마음,

자유로워진 마음,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

이상 16가지의 마음은 범부의 마음에서부터 사마타 선정 수행의 마음과

위빠사나 수행의 마음까지를 모두 망라한 마음들입니다.


마음의 종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혼란을 느낄 것이 없습니다.

한 순간에는 하나의 마음만 있기 때문에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마음의 종류가 많은 것 때문에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음은 모곡 사야도께서 마음을 13가지로 분류하신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3가지의 마음은 부처님께서 대념처경의 심념처에서 밝히신

16가지의 마음과 조금 다릅니다.


부처님께서는 큰 틀 안에서 알아차려야 할 마음들을 설명하신 것에 반해서

모곡 사야도께서는 실 수행자들이 연기적 구조 안에서

실제로 경험하는 마음들로 분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상 두 가지 분류는 그 내용이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수행 방법의 차이로 편의상 분류하신 것입니다.


특히 모곡 사야도는 알아차릴 마음을 세 가지 그룹으로 분류하였는데,

외부에서 방문하는 의식과 내부에서 방문하는 의식과 주인 의식입니다.

외부에서 방문하는 의식은 육근이 육경과 접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도표 부분 2의 육입과 접촉 사이에 부딪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내부에서 방문하는 의식은 자신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마음과 탐욕 없음, 성냄 없음,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때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하지 않고 모곡 사야도께서는 의식이라고

단순하게 그냥 마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주인의식은 모든 수행자들이 일반적으로 수행의 주 대상으로

호흡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호흡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상 13가지의 마음으로 분류한 것은 모곡 사야도께서 아비담마의 대가이시면서

12연기에 대한 완벽한 통찰을 한 결과입니다.

아울러서 교학의 대가이시면서 수행까지 체험하신 대 스승의 혜안으로

일반 수행자들에게 매우 현실적인 내용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곡 사야도가 말씀하신 13가지 종류의 마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눈의 의식입니다.

둘째 귀의 의식입니다.

셋째 코의 의식입니다.

넷째 혀의 의식입니다.

다섯째 몸의 의식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를 외부에서 방문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눈이 대상을 볼 때 대상을 보는 그 마음을 보라는 이야기이며

귀가 소리를 들을 때 소리를 듣는 그 마음을 본다는 것이며

코가 냄새를 맡을 때 코가 냄새를 맡는 그 마음을 보는 것을 말하며

혀가 음식을 먹을 때 음식을 먹는 그 마음을 보는 것을 말하며

몸이 대상과 부딪쳤을 때 대상과 부딪친 그 마음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탐욕이 있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

탐욕이 없는 마음, 성냄이 없는 마음, 의(意) 혹은 의식의 마음입니다.

이들 여섯 가지를 내부에서 방문하는 의식이라고 부릅니다.


이 이야기는 탐욕이 있을 때 탐욕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탐욕을 부리는 그 마음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

화를 낼 때 화를 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화를 내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어리석음이 있을 때 단지 어리석음이 있는 것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어리석음이 있는 그 마음을 보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들 여섯 가지를 모두 내부에서 방문하는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11번째의 의(意), 혹은 의식이라고 하는 마음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의(意) 혹은 의식의 마음을 무치심(無痴心)이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현재 알아차리는 마음이 정념(正念)과 정견(正見)이므로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의 주체가 이미 무치심(無痴心)이기 때문입니다.


상좌 불교 경전에서는 마음을 심(心), 의(意), 식(識),

세 가지로 분류한다는 것을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은 의(意)와 의식(意識)인데 의(意)는 빨리어로 마노라고 합니다.

마노는 법을 아는 감각 기관이나 기능으로 미세한 마음을 말합니다.


의식(意識)은 빠알리어로 윈냐나라고 합니다.

윈냐나는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심(心), 의(意), 식(識)은 같은 뜻으로 하나이지만 쓰임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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